여해汝諧로 살아간 이순신李舜臣 ①
얼마 전 집에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는데, 어머님이 “날로 늙은 몸에 병이 깊어가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라며 “죽기 전에 네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남이 이런 얘기를 듣더라도 눈물을 흘릴 텐데, 하물며 자식인 제 마음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어머니의 편지를 본 뒤로는 마음이 산란하여 다른 일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계미년癸未年(선조16), 제가 함경도 건원乾元 권관權官으로 있을 적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급히 먼 길을 달려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하여 평생의 통한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님이 연세가 많아 돌아가실 날이 서산에 걸려 있습니다. 만일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저는 또다시 불효자가 될 것이며, 어머님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중략)
어머님을 찾아뵙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봄에는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하므로 도저히 진陣을 떠날 수 없을 듯합니다.
- 「대장부의 삶」, 역사의 아침
당시 체찰사體察使는 오리梧里 대감 이원익(우의정)이 겸하고 있었다. 진영陣營을 떠나 잠시 ‘어머님을 찾아뵙고 올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휴가신청서를 낸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였다. 해군총사령관이 국방장관에게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알린 셈이다.
삼도수군통제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할 직책이 필요하다 해서 만들어진 수군 총 지휘관이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겸하고 있었다. 이순신과 함께 7년간 전장을 누빈 당시의 육군사령관이자 합창의장은 도원수 권율權慄이었다. 명령 계통이 체찰사, 도원수, 삼도수군통제사로 이어졌으리라. 권율이 열 살이 많고, 이원익은 두살 아래다. 이런 관계에서 우호와 협조, 갈등과 대립이 없었을까.
순천집(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온 인편 편지를 받아들고 상관인 이원익에게 휴가신청서를 쓰는 쉰둘의 이순신은 애간장이 탔을 것이다. 하지만 이원익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 나랏일이 먼저’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원익이 휴가신청을 거절할 땐 ‘전시’가 임박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유경 대구가톨릭대(국어국문학) 교수는 이순신이 이 편지를 ‘1596년 겨울에 썼으리라 짐작된다’고 했다. 그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난 사실을 감안하면 앞뒤가 맞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3일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을지 모른다.
문제는 높으신 양반들과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해석이나 관점이 차이가 난다는 거다. 대한민국도 다를 바 없다. 현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현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음호에 계속>
심상훈 고전경영아카데미 원장 ylmfa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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