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심층취재 추적+
대한적십자사 줄줄 새는 혈세①
대한적십자사 회장에게 날아온
40쪽 분량 내용증명의 진실
규정 무시하고 특근수당 지급
논란 일었지만 윗선이 덮어
은근슬쩍 금지한 특근수당
그러면서도 환수 절차 안 밟아
# 휴게시간은 ‘쉬는 시간’이다. 당연히 수당을 지급해선 안 된다. 그런데 대한적십자사 산하 지역혈액원 15곳 중 7곳이 ‘주말 단체헌혈 시’ 휴게시간에도 특근수당을 지급했다. 대한적십자사가 헌혈과 적십자회비로 운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민 혈세가 ‘쉬는 사람’을 위해 쓰인 셈이다.
# 논란이 커졌지만 대한적십자사는 이를 은폐했다. 기관장 회의에서 안건으로 올라갔는데도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국정감사에서 다루겠다고 나선 국회의원(국민의힘)의 입은 통제했다.
# 그런데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대한적십자사는 은근슬쩍 ‘주말 단체헌혈 시 휴게시간엔 수당을 지급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부당하게 지급한 특근수당은 환수하지 않았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더스쿠프가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취재했다.
2023년 11월 10일. 대한적십자사는 서울의 한 5성급 호텔에서 ‘2023 레드크로스 갈라’ 모금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의 총수부터 유명 연예인, 7개국 주한대사, 레드크로스 아너스클럽(1억원 이상 기부자) 회원 등 380여명이 참석했다. 대한적십자사가 ▲보호 종료 아동, ▲장애·질병 가족 등 위기가정 지원에 사용할 돈을 모으기 위한 자리였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뜻밖의 논란이 터졌다. 오점을 남긴 건 김철수 대한적십자사회장(당시)의 말이었다. 김 회장은 이날 행사가 끝난 뒤 직원들에게 “외국 대사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다 모이더라”며 “얼굴 새카만 사람만 모으지 말고 하얀 사람 좀 데려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그는 직원들에게 “변두리 국가에서 와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만 온다”며 “소위 ‘빅5’에서 한두명은 꼭 오게끔 만들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김 회장이 대한적십자사 회장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내린 ‘이상한 령令’이었다.
김 회장의 인종차별 발언이 알려진 건 지난 10월 30일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였다. 논란은 삽시간에 퍼졌고, 11월 7일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감찰을 지시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곧장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떠난 회장’이 남긴 문제는 또 있었다. 김 회장은 자신에게 전달된 ‘부패익명신고(헬프라인) 후속조치 촉구’란 내용증명을 해결하지 않은 채 사표를 던졌다. 이 내용증명은 대한적십자사 산하기관인 지역혈액원 A원장이 김 회장에게 보낸 40여장 분량의 문건이다. A원장이 7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직접 제기한 공익신고의 후속 조치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A원장이 공론화를 꾀한 ‘공익신고’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40여장에 이르는 내용증명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더스쿠프가 지난 2월 보도한 ‘휴게시간에도 수당 지급한 혈액원: ‘혈세’ 받는 대한적십자사의 민낯(더스쿠프 635호)’을 다시 읽어봐야 한다.
■ 휴게시간 특근수당의 실체 = 더스쿠프는 당시 대한적십자사의 일부 지역혈액원이 주말·휴일 근무 시 휴게시간에도 특근수당을 부당하게 지급하고 있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그때 기사를 간략하게 복기해보자.
대한적십자사의 혈액원 15곳 중 7곳이 주말·휴일 근무 시 휴게시간에도 특근수당을 지급했다. 한두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전북혈액원은 2015년부터 주말 특근 시 휴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해 수당을 지급했다. 인천혈액원은 2016년, 경남혈액원과 부산혈액원은 2017년부터 주말 특근수당을 지급했다.
주말·휴일 근무 시 휴게시간에 특근수당을 지급한 이유는 혈액원마다 제각각이었다. 대전·세종·충남혈액원과 전북혈액원은 노사합의를, 인천·광주혈액원은 노사보충협약을 통해 휴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했다. 경남혈액원은 지급 근거를 ‘관례’로 삼았다.[※참고: 대전·세종·충남혈액원의 주말 특근수당 지급엔 대한적십자사 서열 2위인 사무총장까지 연관돼 있었다. 이 이야기는 후술했다.]
이렇게 휴게시간을 포함해 지급된 주말·휴일 특근수당은 모조리 내부규정 위반이었다. 대한적십자사 직원운영 규정 제41조는 ‘직원의 근무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일 8시간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41조의 2 출장 중 근무시간 규정에도 ‘직원이 출장, 기타 사업장 외에서 근무하는 경우에 근무시간을 산정하기 곤란할 땐 1일 8시간 근무한 것으로 본다’며 ‘다만, 별도의 지시가 있었을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내부규정만이 아니다. 이는 대한적십자사의 행정조치도 위배하는 행위였다. 대한적십자사는 2016년 6월 ‘혈액 기획관리업무 추진실태 특정감사 결과’를 근거로 그해 11월 25일 전국 15개 혈액원, 중앙혈액검사센터, 중부혈액검사센터 등에 “시간외 근로수당 지급 시 휴게시간을 공제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그런데도 몇몇 지역혈액원은 이런 행정조치를 외면한 채 ‘휴게시간 특근수당’을 지급했다.
■ 대한적십자사의 은폐 시도 = 더 큰 문제는 대한적십자사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도 계속해서 은폐했다는 점이다. 시계추를 2024년 6월 23일로 돌려보자. 대한적십자사는 이날 서울남부혈액원에서 제2차 기관장회의를 열었다.
이날 기관장회의의 안건 중 하나는 ‘혈액원별 보충협약 등으로 인한 운영시간과 일수의 차이’였는데,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단체헌혈 출발, 귀원 시간제한, ▲휴일 단체헌혈 출장 횟수 제한, ▲헌혈의집 운영시간 제한, ▲주말 단체헌혈 시 휴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 ▲헌혈의집 토·일·공휴일 운영 지정, ▲국고 헌혈의집 휴무일 지정, ▲직원 단체행사 연간 횟수 명시 등이었다.
이중 가장 논란이 된 안건은 ‘주말·휴일 단체헌혈 시 휴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천, 대전·세종·충남, 경남혈액원이 주말·휴일 근무 시 휴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해 추가로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는 게 골자였는데, 기관장들은 이 안건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한적십자사는 이 사실을 은폐했다. 시종일관 “기관장회의에는 주말 특근수당 논란’이 안건으로 올라온 적 없다”고 주장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김 회장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A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2024년 6월 열린 2차 기관장회의에서 주말·휴일 근무 시 특근수당 지급 내용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혈액사업본부가 관련 내용을 발표했다. 일부 혈액원에서 특근수당을 지급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혈액원장들이 집단 항의에 나섰다. 그러자 혈액사업본부가 급하게 자료를 회수하고 회의를 끝냈다. 안건이 올라왔는데도 논의하지 않은 셈이다.”
상황이 심각했지만 대한적십자사는 이 문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썼다. 대법원 판결(대법원 2006다 41990)까지 꺼내가며 “주말 단체헌혈 시 휴게시간에 지급한 특근수당은 문제가 없다”고 버텼다. 당시 대한적십자사는 “군부대에서 헌혈을 지원할 땐 휴게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휴게시간을 근무시간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익명을 원한 내부관계자는 “한번이라도 주말에 (군부대) 단체헌혈 현장에 나가봤던 직원이라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엔 얼마든지 부대를 벗어날 수 있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이들도 있다. 군부대에서 점심시간에 무리하게 헌혈을 진행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일부 혈액원에서만 휴게시간을 근무로 인정해 특근수당을 주는 것은 사실상 특혜나 다름없다.”
■ 휴게시간 특근수당 은밀히 금지 = 이처럼 해명 아닌 해명에만 급급했던 대한적십자사는 지난 7월 1일 15개 혈액원에 ‘주말 및 공휴일 단체헌혈 시 행정조치 안내’라는 제목의 행정조치를 하달했다. 골자는 “시간외 근무수당 지급 시 휴게시간을 공제”하라는 거였다.
쉽게 말해 주말·휴일 근무 시 휴게시간에는 특근수당을 지급하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근거는 대한적십자사는 근로기준법과 2016년 11월 25일 내린 행정조치를 들었다. 일부 혈액원이 무시했던 2016년 행정조치를 근거로 주말 근무 시 휴게시간 특근수당 지급을 다시 금지했던 거다.
대한적십자사는 ‘행정조치에 따른 별도 근로조건 합의를 지양하라’는 지침까지 덧붙였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대한적십자사가 ‘휴게시간에 지급하던 특근수당’을 은근슬쩍 금지한 셈이었다. 그럼 대한적십자사는 이번엔 또 어떤 주장을 늘어놨을까.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해 8월 관련 내용이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국민권익위)에 접수돼 조사를 받았다. 국민권익위는 주말·휴일 근무 시 휴게시간에 특근수당을 지급한 대한적십자사의 노사합의가 적정했는지 내부적으로 조사하라고 안내했다. 이에 따라 자체 조사를 실시했고, 휴게시간에 특근수당을 지급한 노사합의가 위법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바탕으로 근로자의 휴게시간을 보장하는 대신 특근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쪽으로 제도를 개선했다.”
이를테면 대한적십자사가 ‘셀프 결론’을 내린 셈인데, 그러다보니 “휴게시간 특근수당이 위법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지급해선 안 된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도출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상한 결과는 더 이상한 행태로 이어졌다. “주말 휴게시간 특근수당을 더 이상 지급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린 대한적십자사는 정작 지금까지 부당하게 지급한 ‘특근수당’을 환수하지 않았다.
행정조치를 어긴 채 특근수당을 맘대로 지급한 지역혈액원의 관련자를 징계하는 절차도 생략했다. 왜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일을 처리한 걸까. 이 이야기는 대한적십자사 줄줄 새는 혈세 2편에서 이어나가보자.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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