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노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노동하기 위해 견디는 시간도 새로운 ‘노동’ 개념에 편입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노동하기 위해 애쓰는 청년 세대는 물론, 모든 세대가 품고 있는 미래를 향한 불안 요소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노동’ 문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문학이면 문학이지 문학 앞에 굳이 ‘노동’이라는 단어를 붙여 구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미래파’라는 용어처럼 특정한 시기에 힘 있는 담론이 새롭게 ‘발견(명)’되는 과정에서 힘의 크기를 계량화하기 위해 시도된 하나의 사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아버지는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억눌렀던 진압군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아들에게 데모할 땐 절대로 앞에 서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되레 피에 젖은 아버지의 ‘월급봉투’에 빚을 지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교직에서도 해직됐다. 그후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택배일을 시작했다. 그의 노동은 참회의 노동이었을까.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다 보면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적인 시간과 사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제법 관계가 친밀해졌다고 믿는 경우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던 중 목숨을 잃은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씨. 그의 이름을 표제로 삼은 책이 나왔다. 「김용균, 김용균들(오월의 봄ㆍ2022년)」이다. 주목할 건 ‘들’의 존재다. 이 책은 ‘김용균’을 애도하는 차원을 넘어 ‘김용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권과 안전을 논한다. 죽음은 죽음을 부른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잉태한다. 죽음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타인의 죽음을 응시하면서 새로운 삶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죽음 이후를 만질 수
조성래 시인의 첫 시집 「천국어 사전」에는 다양한 ‘노동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중 그가 노동 현장에서 만났던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은 중요하다. 그들의 삶을 모질게 그리면서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를 쳐다보는 ‘표정’을 알려주고 있어서다.조성래 시인의 첫 시집 「천국어 사전(2024ㆍ타이피스트)」은 진실한 언어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진실하다는 것은 그의 언어가 동시대의 다른 시인보다 유달리 특별하거나 세련돼서 진실하다는 말이 아니다. 표현하는 언어도 세계관을 운영하는 방식도 시인마다 각양각색이니 하나의 표정만을 최고로 꼽기는 어렵다
소방관은 아주 종종 타인의 ‘대용품’으로 취급받는다. 누군가를 대신해 위험한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방관의 공상公傷(공무로 입은 손상) 처리 문제는 풀지 못하고 있다. 소방관이 질병에 걸리면 여전히 직접 입증해야 한다. 2017년에 공상입증지원제도가 생겼지만,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는 것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소방관의 표정을 주목한 이유다.문경수 시인을 본 것은 2024년 봄 출판기념회 자리였다.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는 탓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서먹서먹해서 혼
바나나 한 송이를 새벽에 배송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새벽에 바나나를 배송해야 할 노동자 한명 때문에 수많은 노동이 발생하고 또 얽힐 것이다.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이어진 노동의 다양성을 우리가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이번 ‘노동의 표정’에선 개처럼 뛰고 있는 노동자들, 그 사이 사이에 숨은 노동자의 애환을 살펴봤다.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 이 목소리는 고故 정슬기씨의 마지막 카톡 메시지다. 대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기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배달 플랫폼 노동자였던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고, 두번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인생이다. 무엇이든 잃은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도 삶의 일면이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럴 법도 하겠다. 김명남 시인이 2011년 출간한 「시간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다(2011년ㆍ시평사)」는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노동과 거기서 비롯되는 힘겨움을 고백한다. 지금은 인천에 사는 시인의 거리 때문인지 이 시집은 강원도의 노동을 진실하게 담아내고 있다.그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감정의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닿을 수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이 감정
그림과 글을 함께 작업하는 만화가. 이들에게 글값만 지불하는 건 정당할까. 이런 의문은 노동의 현장 곳곳에서 존재한다. 돈을 주는 사람과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이 다르니, 간극이 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건 이런 간극을 ‘무리 없이’ 풀어갈 수 있느냐댜. 만화가 권용득은 유머로 부조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만화가 권용득은 특별한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한 건 그가 성공한 사람이라거나, 가진 게 많다거나,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다거나, 그가 속한 만화계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 아니다.물론 그는 오랜 시
공간과 도구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직업 ‘이발사’. 누군가는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부러워할지 모른다. 마치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시대를 꼬집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만한 노동이 어디 있으랴. 노동의 결을 모두 알 순 없겠지만,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섬세한 사연이 있다.최근에 알게 된 지인들과 좌담하기 위해 파주에 있는 동네 서점인 ‘쩜오책방’에 방문했다.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터라 서점 구경도 할 겸, 그곳에 전시된 책
돈이 있어야 내 삶에 투자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농약이 들어가지 않은 채소를 고를 수 있고, 유기농 우유와 달걀을 고민 없이 사 먹을 수 있다. 어쩌면 삶이 그런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노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번엔 이나임 시인의 작품 속에서 노동의 표정을 찾아봤다.이나임 시인의 브런치(brunch story) 프로필 소개에는 “삶을 삶아서 가지고 왔으니 맛있게 드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자신의 삶을 고백의 형식으로 여과 없이 보여줄 테니 마음껏 구경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이 왠지 모르게 역설적으로 들리는
“원고료가 두둑하면 글이 좋아질 수밖에 없지….” 옛날에 어떤 선배가 웃으면서 했던 말이다. 누군가는 ‘돈’의 부정적인 면을 꼬집지만, 돈이 가진 순기능을 외면할 순 없다. 돈이 없으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다는 건 정말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선택하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버는지 모르겠다.치과에 다녀왔다. 20년 전에 송곳니에 씌운 아말감이 충치로 인해 깨진 탓이다. 아말감과 오랜 시간 함께하는 동안 있는지도 없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텅 비고 나니 왠지 모르게 허전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치료를 위해 씌운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에는/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다 미움을 샀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떤 노동자의 애환쯤으로 해석될 거다. 그런데 아니다. 이원석 시인이 쓴 로봇 연작시의 내용이다. 그는 인간이 아닌 로봇의 노동을 다루면서 인간의 노동을 생각한다. 낮은 노동을 하는 인간의 표정이 아프게 보인다.원고료와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던 때, 인천공항에서 수레(L-Cart) 끄는 일을 하는 이원석 시인에게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개인적으로 머리 쓰는
돌멩이는 어느 곳에나 가고 또 발에 차인다. 구를 수 있을 때까지 굴러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이용훈 시인은 그런 돌멩이의 특성을 빌려 노동자의 삶을 말한다. 매번 달라지는 현장에서 버티고, 일하기 위해 새로 마련한 ‘임시 거처’에서 버티는 삶. 자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한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삶이다.이용훈 시인의 시는 현장 노동자의 각진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물고기가 낚시꾼의 낚싯대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현장의 언어로 독자를 힘껏 끌어당긴다. 그래서 우리는 독특한 그만의 손맛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요령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다. 힘으로만 할 수 있는 노동도 아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어쩌면 노동은 강박이다. 조혜영 시인이 올해 출간한 「그 길이 불편하다」엔 우리가 잘 모르는 급식 노동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현대인의 강박을 급식 노동자의 삶에 빗대 풀어낸 듯하다. 문제는 이런 노동자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 숱하단 거다. 며칠 전에 회의가 있어서 만화영상진흥원에 들렀다. 회의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도착한 터라 몸 둘 곳을 찾았다. 카페에 가볼까, 밥을 먹을까, 고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노동’이다. 예술도, 업무도, 학업도 노동이다. 하지만 우린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는 걸 주저한다. 왜일까. 이데올로기 때문일까 아님 노동이 이미지가 늙고 힘들고 때론 불편해서일까. 우리는 노동할 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질문을 풀기 위해 ‘노동의 표정’이란 새 기획물을 연재한다. 글은 문종필 평론가가 쓴다. 그 첫번째 편, ‘고백’이다. 내게 노동은 무엇일까. 잘 잡히지 않는다.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아 노동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여러 이론서의 도움을 받아 노동의 형태를 진단해야 할까. 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