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6편 「김용균, 김용균들」
청년 김용균의 죽음 넘어
산재 생존자, 동료 그리고 어머니
연결돼있는 노동 현장의 고통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던 중 목숨을 잃은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씨. 그의 이름을 표제로 삼은 책이 나왔다. 「김용균, 김용균들(오월의 봄2022년)」이다. 주목할 건 ‘들’의 존재다. 이 책은 ‘김용균’을 애도하는 차원을 넘어 ‘김용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권과 안전을 논한다. 

비정규직 김용균씨의 죽음은 한국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사진 | 뉴시스]
비정규직 김용균씨의 죽음은 한국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사진 | 뉴시스]

죽음은 죽음을 부른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잉태한다. 죽음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타인의 죽음을 응시하면서 새로운 삶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죽음 이후를 만질 수 없지만, 죽음 주변으로 모인 새로운 삶들은 죽음을 보면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쳐다본다.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는 죽음을 기록한 문장을 적은 건 최근에 읽은 「김용균, 김용균들(오월의 봄ㆍ2022년)」 때문이다. 

책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텍스트는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던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씨의 삶을 다룬다. ‘김용균’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단순히 애도하는 차원을 넘어 ‘김용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곳과 저곳은 물론,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과 안전을 논한다. 

청년 김용균 곁에서 가까이 있었던 산재 생존자 이인구씨, 발전 비정규직 동료 이태성씨, 마지막으로 유가족이자 김용균의 어머니인 김미숙씨의 목소리를 통해, 김용균을 넘어선 김용균‘들’에게 집중함으로써 전국에 있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연대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이 텍스트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안타까운 존재의 ‘죽음’으로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 이인구, 이태성, 김미숙씨의 사연이다. 풍경으로 따지면 매일 봐왔던 풍경을 서글픈 존재의 죽음 이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어제도 오늘도 매번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지만, 어느 한 사건으로 이제는 예전처럼 동일하게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 그 계기가 바로 아들의, 동료의 죽음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런 경험을 아마도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풍경을 사는 것은 더 좋다(‘장마 풍경’)”고 표현했을지 모른다. 미술가 강요배는 “‘예술은 사회에 꼭 기여해야 한다’라든가 이런 것보다도, 오히려 자기 혼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그걸 제대로 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풍경의 깊이’)”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자신과 연결된 상황과 맥락을 깊이 탐구하는 과정만으로도 사회의 본질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멀리 있는 것에서 진리를 찾거나 어떤 사태나 사건을 응시하기보다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아픔과 직면하는 과정에서 진정성 있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 | 뉴시스]
[사진 | 뉴시스]

하지만 이런 ‘풍경’의 쳐다봄은 화자들의 ‘의도’적인 행위로 이뤄지지 않았다. 의도적인 행위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미안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년 김용균을 보낼 수 없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숙명과 닮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화자인 세명의 인물인 이인구씨와 이태성씨, 김미숙씨의 고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구술 채록의 형식으로 권미정, 림보, 시인 희음의 필터를 거쳐 더욱 정갈하게 표현됐다. 아무래도 활동가나 직업으로 글 쓰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대중들과 소통하는 것이 연대의 과정에서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출판사의 의도가 반영됐으리라. 

그러니까 김용균의 안타까운 삶이 이인구, 이태성, 김미숙의 몸을 통과해 권미정, 림보, 희음의 몸으로 확장되는 것은 물론, 이 책의 의미를 쓰고 있는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이다.

이 여정 자체야말로 비정규직, 민영화로 시작된 효율 중시의 외주화, 산업법 개정, 죽은 존재에 대한 예의, 산재 트라우마, 산재 피해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실무 담당자의 무지 등, 노동 현장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노동의 부조리를 문제 삼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안타까운 고 김용균의 삶을 예술가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예술가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주변의 안타까운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많은 예술가는 동시대의 아픔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발생하는 안타까운 죽음 앞에 그들은 지속해서 대응하고 반응한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부조리한 이곳의 체제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몸부림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연민과 동정에서 비롯된 반응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가들이 아프게 토해냈던 수많은 장면 중, 이영광 시인의 「살 것만 같던 마음(창비ㆍ2024년)」에 수록된 ‘아프다고 생각하며’를 읽어보기로 하자. 그 전에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리듬은 참 독특하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형식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형식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형식을 재건축한다. 

이런 형식을 탐닉하는 것도 이 시집을 읽는 재미일 수 있겠으나, 우리가 앞서 다룬 것처럼 이 작품은 안전장치 없이 일하다 죽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동시대의 노동 현장을, 3자의 입장에서 응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인이 그들의 아픔을 느끼며 힘들어하거나 허탈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어떤 방식이든지 연결돼 있다. 

[사진 | 오월의 봄 제공]
[사진 | 오월의 봄 제공]

이 작품에서는 절룩절룩 다리를 절며 도망치는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다친 강아지가 수술받는 장면도 등장한다. 과거에 시인이 살던 동네에서 돼지를 잡을 때 돼지가 목 놓아 부르는 비명이 시집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죽은 청년은 김용균씨다. 그와 관련해 많은 사람이 연대하는 과정에서 죄를 묻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한다. 그러나 “모두가 무죄”라며 김용균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아낸다. 시인은 이 장면을 보고 “아프다고 생각하며/ 아픈 줄 몰랐는데”를 반복한다.

시인은 지구 가장자리에서 흐느끼고 있는 존재들을 볼 때면 슬프다. “아프다고 생각하며/ 아픈 줄 몰랐는데”라는 의미가 이 작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아마도 이곳의 아픔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니 시인의 몸은 견디기 힘들다. 고통의 소리를 지구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는 시인은 지구에서 “해방(‘지구살이’)”되고 싶다. 해방의 끝은 죽음일 테지만, 죽음을 의도할 수 없기에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의 싸움은, 이곳의 비명은, 언제 멈출까. 이 별이 위험하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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