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18편 최진 시인의 ‘계엄군’
1980년 군인이었던 아버지
2024년 택배기사가 된 아들
죗값을 치르려는 유전자의 힘
아버지는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억눌렀던 진압군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아들에게 데모할 땐 절대로 앞에 서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되레 피에 젖은 아버지의 ‘월급봉투’에 빚을 지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교직에서도 해직됐다. 그후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택배일을 시작했다. 그의 노동은 참회의 노동이었을까.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다 보면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적인 시간과 사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제법 관계가 친밀해졌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보기 좋게 허물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시집이나 새롭게 발표된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알고 지내던 시인의 낯선 지점을 만나는 순간이 그렇다. 그럴 때는 그에게 ‘이런 면모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삶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최근에 읽은 최진 시인의 ‘계엄군’도 그런 작품이었다. 이 시가 발표된 잡지를 직접 보지 못했으나, 알고 지내던 지인이 인스타그램에 공유해준 덕분에 그가 이 시를 발표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일까. 작품은 2024년 12월 3일에 있었던 윤석열 정부의 ‘계엄’을 다뤘다. 계엄의 부조리와 모순을 적는다. 하지만 내게 이 작품이 놀라웠던 것은 이런 당위성보다도 내가 알고 있던 시인과는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오랜 시간 도시가 아닌 시골 택배 노동자로 살아가야만 했던 구체적인 사연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 문장은 바로 “아버지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택배기사가 되었다가 열여섯 해가 지났다”였다.
이 문장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의 현실이 이상이자 유토피아라는 것을 몰랐던 2009년 무렵의 일이다. 「녹색평론」 잡지 광고란에 실린 어느 한 글귀를 보고 무작정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직접 땀 흘리며 몸과 마음을 다해 마을을 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궁금해 그곳의 절박함과 뜨거움을 보지 못하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이런 마음은 자의식이 발동된 선택이었다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직접 일터를 가꾸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정성도 노력도 여러 가지로 부족했던 어리석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서 짧은 기간에 배운 것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방인인 내게 그곳의 사람들은 방을 내어줬고, 먹을 것을 가져다줬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마음을 함께 공유해줬다. 이 경험으로 인해 이들의 이름과 그때의 시간을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고자 했다.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시인 최진이다.
그런 그가 첫 시집 「배달 일기(한티재ㆍ2016년)」를 출간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작업은 전혀 알지 못했다. SNS를 통해 공유되는 소식을 보며 종종 ‘좋아요’를 누르며 간접적으로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인이 최진 시인의 작품을 인스타에 공유해준 경험은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한국 현대사의 큰 문제 중의 하나인 ‘계엄’을 다루고 있었고 가슴 아픈 1980년 ‘광주’를 통과할 뿐만 아니라, 최진 시인이 무슨 이유로 택배 노동자로 살아가야만 했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그 당시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그의 땀방울에 이런 사연과 다짐이 응어리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곳에서 나는 편한 대로 지냈고 익숙한 대로 방황하며 유토피아를 찾았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계엄군’은 어떤 시일까.
나는 이라크파병을 반대하며 입대를 거부하다 교직에서 해직되었다. 어머니와 이혼 후 헤어졌던 아버지가 새벽에 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찾아왔다. 감옥을 앞둔 나에게 자신이 금남로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그날 처음 들려주었다. 자신의 불행만으로 속죄할 수 없는 세월을 살다 아들은 아버지의 참회록이 되었다.
감옥을 다녀온 뒤 3년, 몸이 아픈 아버지가 어린 남매를 키우는 나를 찾아왔다. 내 어린 날이 피에 젖은 월급봉투에 빚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는 병원 할아버지였고 회화나무 아래 나무 할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택배기사가 되었다가 열여섯 해가 지났다. 그렇게 다시 계엄을 만났다.
- ‘계엄군’ 부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오랜 시간 택배 배달을 하며 “어르신들의 귀한 삶을 받아쓴(‘시인의 말’)” 최진 시인의 첫 시집 「배달일기」에는 아버지와 관련된 시 ‘오래 앓이’가 수록돼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버지’ 이야기라기보다는 시인이 배달하며 만난 어르신이 경운기를 은유‘화’ 해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적은 시다.
그렇다면 이 시집에서는 사실상 아버지에 관한 사연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계엄군’이라는 시가 최진 시인에게는 그만큼 특별하다는 말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광주 금남로에서 5ㆍ18 당시 시민을 억눌렀던 진압군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에게 데모할 때는 절대로 앞에 서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말은 들은 아들은 동의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내 어린 날이 피에 젖은 월급봉투에 빚지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폭력에 오랜 시간 홀로 저항해야 했다.
죗값을 치르기 위한 유전자의 힘은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게 했고, 교직에서 해직당하게 했다. 그는 그 이후로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택배 일을 시작한다. 나는 이 사실을 들었지만, 시를 보기 전까지 귀담아듣지 못했다. 이것이 고백의 힘일까.
최진 시인은 오랜 시간 해온 택배 배달일을 최근에 그만뒀다고 한다. 16년 동안 택배 노동을 하며 자신의 선택을 긍지 있게 밀고 나갔고, 그의 시간은 첫 시집에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 배달 일하며 만났던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사연을 구수한 사투리로 재현한다. 그의 노동은 이런 면에서 참회의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 시간이 가볍지 않다.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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