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9편 만화가 권용득의 화법
그림과 글 함께 작업하는 만화가
“그림값 챙겨주면 안되냐” 말해
발언 후 연재하던 곳에서 잘려
자신의 애환 만화 소재로 다뤄
일상, 유머로 익살스럽게 재현

그림과 글을 함께 작업하는 만화가. 이들에게 글값만 지불하는 건 정당할까. 이런 의문은 노동의 현장 곳곳에서 존재한다. 돈을 주는 사람과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이 다르니, 간극이 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건 이런 간극을 ‘무리 없이’ 풀어갈 수 있느냐댜. 만화가 권용득은 유머로 부조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비판이 정곡을 아프게 찌를 필요는 없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비판이 정곡을 아프게 찌를 필요는 없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만화가 권용득은 특별한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한 건 그가 성공한 사람이라거나, 가진 게 많다거나,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다거나, 그가 속한 만화계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는 오랜 시간 만화계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현역 만화가라는 점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의 곁에는 든든한 가족이 있으니 가진 게 많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가 특별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 만화가라는 직업으로 인해 특별해 보일 순 있어도 그것이 남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만화가 권용득은 왜 특별한가. 그것은 ‘유머’ 때문이다. 유머 역시 많은 작가들이 품고 있는 재능이어서 특별하다고 볼 수 없지만, 권용득은 유머를 통해 만화가(예술가)로 먹고살아가는 일상의 새들한 흔적을 익살스럽게 재현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유머는 인위적이라기보단 자연스러움 속에서 발현되는 재능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억지 노력으로 사랑이 이뤄질 수 없는 것처럼 권용득의 만화는 자연스러운 유머를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물론, 그는 디지털세대가 아니다. 웹툰을 그리며 성장한 만화가가 아니다. 그가 만화가로 활동하던 시대는 칸과 칸이 유기적으로 어울리는 만화책이 기준이 되던 때였다.

그러니 그의 만화를 볼 수 있는 독자들도, 그의 만화를 탐닉할 수 있는 독자들도 일정 부분 동시대적이지 않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시대의 시스템을 외면할 수도 없으니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목소리에 힘을 쏟는다. 마쓰모토 다이요의 「동경일일(2024년)」에 등장하는 진정한 만화가들처럼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유머를 듬뿍 담아 예술가의 삶뿐만 아니라, 소외된 존재와 쓸쓸한 가족을 응시한다. 아마도 이런 인간미가 유머를 장착한 동시대의 많은 작가와 변별되는 차이점일 것이다.

그는 많은 작품을 독자들에게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만화가의 일상을 「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동아시아·2016년)」에 담아내기도 했고, 청년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각색해 「예쁜여자(미메시스·2017년)」에 녹여내기도 했다.

만화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곤란한 상황과 그의 고향 ‘왜관’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화교 이세굉 선생님의 사연을 「지란방만두(삐약삐약북스·2022년)」에 담아낸 적도 있다.

특이한 것은 이 3권의 텍스트를 읽은 독자들은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있는 작품들을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고백하는 주인공이 시기별로 성장하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독자들은 만화가가 나이를 먹는 것과 비슷하게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함께 성장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잔잔하지만 굴곡진 삶을 이야기하는 만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반 독자들의 경우 만화라고 하면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이사야마 하지메의 「진격의 거인」을 떠올릴 수 있고, 누군가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를 떠올릴 수 있다. 이들 만화가는 소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출된 흥미로운 이야기다.

반면에 자신을 고백하는 만화가는 시인과 닮았다. 자기 고백적인 소설도 있을 수 있으나 창작자의 내면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것은 시의 전통이다. 동시대의 시문학은 ‘화자’와 ‘시’가 분리돼 있다는 점에서 온전히 자신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지만, 자기 내면과 적당한 연출이 들어가는 권용득의 만화는 ‘고백’에 충실한 시 같은 만화다.

권용득의 고백은 앞서 서술했듯이 유머를 내장하고 있지만, 그 유머 속에는 만화가로 살아가는 예술가의 고충이 담겨 있다. 가령, 가장 최근 작품인 「지란방만두」의 첫 장면은 자신이 꾸준히 연재하던 신문사에서 연재가 중단되는 ‘불안’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한때 페이스북에 일기나 다름없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글을 올려 인기를 얻었다. 그런 탓에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제의가 들어왔다. 그로 인해 글 쓰면서 먹고살 수도 있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던 찰나에 그는 만화가들에게 ‘만화’와 함께 ‘그림’도 그려달라는 업계의 관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글값 말고 그림값 좀 따로 챙겨주면 안 되겠냐”고 용기 있게 말한 것이다.

이 발언 이후, 그는 자신이 연재하던 곳에서 잘리고, 이 사건은 글을 쓰며 먹고살아가는 만화가(예술가)의 애환과 함께 만화의 소재로 다뤄진다. 아내와의 다툼이 그렇고, 아이 신발을 당당하게 사주지 못하는 사정이 그렇다. 그는 오래전부터 만화를 수준 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장난’에 불과한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화도 엄연히 종합예술”이라고 믿었다.

콘텐츠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문화는 논쟁해 볼 만한 영역이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콘텐츠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문화는 논쟁해 볼 만한 영역이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그래서 만화가들에게 으레 기대되는 글에 포함되는 ‘그림값’은 그에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글과 함께 그림을 딸려 보내야 하는 것이 매체의 관행이다. 그는 이런 동시대의 부조리한 노동을 유쾌한 유머로 고발한다.

풍자보다는 덜 사회비판적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유머가 숨어 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권용득의 화법으로 대화한다면 무리 없이 건강한 방식으로 누구든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유머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만화가 진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예쁜여자」에 수록된 성노동자의 삶도 그렇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해 여러 곳을 떠돌아야 했던 자신의 삶과 비슷한 존재들에게도 귀를 기울이는 시선도 값지다.

독자들도 그의 유머에 취해보는 것이 어떨까. 이 과정에서 유쾌하게 동료에게 말하는 법과 소외된 자들을 응시해보는 것은 어떨까.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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