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텍스트 속 노동의 표정
21편 박상화 시인의 ‘동태’
자리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
정지해 있기에 중심 잡은 존재
독립적 주체로 서기 위한 조건
엄마에 빗대 풀어낸 정적 노동
노점상에게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생존과 다름없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종일 마음을 애태워야 한다, 한눈이라도 팔면 경쟁 노점상에게 자리를 뺏기거나 신고당해 쫓겨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시인 박상화는 이런 노점상의 한을 엄마에 빗대 이야기한다. 이른바 정적 노동의 눈물이다.
자본주의 부조리에 저항한 노동자 시인 박상화의 첫 시집 「동태(2019년·푸른사상)」에는 정지해 있는 이미지들이 자주 출현할 뿐만 아니라 서로 겹친 채, 정적 노동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낸다.
시의 소재로 활용되는 의자라든지, 나무라든지, 얼어버린 동태라든지, 바짝 마른 황태라든지, 한곳에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이라든지, 한곳에만 머물러야 하는 사무직 노동 이미지 등은 모두 한 공간에 멈춰 선 존재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특히,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동태’와 그밖에 ‘엄마 생각’ ‘시간의 문’과 같은 작품은 길가 모퉁이에 수줍게 자리 잡고 힘겹게 생선을 떼다 파는 노점 행상인인 엄마의 노동을 무겁게 그린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엄마의 노동은 만만치 않다. 노점상들에게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생존과 다름없다. 그러니 이들은 자리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마음을 애태워야 한다. 한눈파는 사이 경쟁 노점상에게 자리를 뺏기거나 신고당해 쫓겨나면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점상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거나 한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벽같이 움직인다. 이런 엄마의 노동을 어린 시절부터 곁에서 바라보며 성장해야 했던 시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을 꽤 오랜 시간 자신의 피부에 새겨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경험은 엄마의 짠한 노동만이 아닌 이 계절의 노동자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촉매로 작동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길바닥에 놓여진 어머니의 삶을/ 단속반원이 걷어차는 순간(‘동태’)”의 기억이라든지, “수없이 많은 수직 기둥들 사이/ 그 어느 틈새에/ 드러누운 고등어 갈치 몇 마리 놓고/ 쪼그려 앉은 엄마(‘엄마 생각’)”를 시장에서 찾아갔던 기억이라던지, “아부지 사업 실패하시고 나서/ 셋째를 둘러업고/ 자반고등어 몇 손,/ 다라에 담아 이고 시작한 노점 행상(‘시간의 문’)”을 했던 엄마의 사연은 먹고 살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주변의 많은 존재들을 감싸 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박상화 시인에게 엄마의 노동은 세상을 보는 창구였다.
시집 제목이 ‘동태’인 것과 시집 곳곳에서 ‘생선’의 비린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엄마 곁에서 성장한 시인에게 ‘다라이(たらい)’에 전시된 생선은 삶 속에서 뜨겁게 길어 올려야 했던 언어 자체였다. 이처럼 엄마의 노동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의 노동과 이곳의 부조리한 노동을 응시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정지된 존재들을 마냥 연민의 대상으로 그린 것은 아니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와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의 이미지 역시 무기력하게 서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한곳에 묵묵히 머물러 있을 수 있었기에, 중심을 잡는 존재로 그린다. “중심을 잡는 건, 바닥을 파고 들어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나무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니 한곳에서 오랜 시간 노동한 존재들은 가엽지 않다. 그가 당당히 자신의 이력에 ‘편의점 노동자’라고 적은 것은 이런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중심 잡기는 자본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는 세계를 향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맹목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내면의 자유를 찾으려고 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일어나려는 의지를 움켜쥔다. 타인이 주창한 희망(환상)에 기대기보단 자신이 경험한 믿음을 재생하고, 그 믿음을 완수하기 위해 애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맹목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천국’ ‘법’ ‘정의’ ‘민족’ ‘문학’ ‘역사’와 같은 합리적인 당위성에 의지하기보다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신뢰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젠 믿지 않으리라, 천국을 팔든, 법과 정의를 팔든, 민족, 문학, 역사를 주섬주섬 파는 그 모든 약장수를 믿지 않으리라. 믿음이 병이었으니. 믿지 않으면 아프지 않으리라. 나의 이야기를 쓰고, 나의 방식대로 싸우고, 나의 천국에서 쉬리라(‘약장수’ 부분).”
시인은 당위적인 담론을 거절하는 과정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홀로 서고자 한다. 여기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나의 방식으로 싸운다는 말은 합리적인 정의를 전면으로 부정한다기보다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싸움’의 방식에 소신을 갖고 오래도록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럴 때, 맹목적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는 커다란 담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다. 시인이 이런 깨달음을 언제 터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의 것을 흉내 내는 싸움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싸움을 터득했다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지 그가 홀로 설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노동의 시간을 통과했을까. 무라타 사야카의 오래된 소설 「편의점 인간(2016년·살림)」에는 편의점에서 18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서른여섯살 여성 노동자 후루쿠라(古倉)가 등장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기껏해야 ‘편의점’에서 일하는 가여운 존재로 묘사된다.
지인들의 이런 시선은 한곳에 머무른 채 “세계의 부품이 되어 이 ‘아침’이라는 시간 속에서 계속 회전하고 있다”는 문장에 잘 녹아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부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어리석다고 비웃으며 새로운 일거리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이 말에 주인공은 기괴한 부품의 논리로 자신의 편의점 노동을 정당화한다.
박상화 시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소설 이야기를 한 것은 그 역시 편의점에서 오랜 시간 일했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편의점에서 일하며 어떤 편견에 시달렸을까.
그는 이후에 편의점 일을 그만두고 사무직으로 직장을 옮기지만 그곳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사슬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그 사슬에 내가 먼저 묶여(‘사무직2’)” 자신이 소비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계절에 어느 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을까.
문종필 평론가 | 더스쿠프
ansanssunf@naver.com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