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던 곳엔 흔적이 남는다. 삶, 평범한 일상, 아빠와 엄마, 아이들의 기록이다. 장사하던 곳에도 흔적이 숱하다. 버려진 테이블엔 전화번호부가 적혀 있고, 남은 서랍장엔 낡은 LP판의 잔상이 새겨져 있다. 어디에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 건물의 평범한 기록, 해체공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더스쿠프-천막사진관 컬래버 길걷수다 4편 건물 해체공사의 추억이다. 건물에 누런 천을 둘렀다. 수십년간 한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 거대한 구조물은 이제 며칠 후면 세상에서 사라진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고,
# 매일 아침 ‘드립커피’를 마신다. 맛도, 향도 아메리카노보다 깊은 것 같아 좋다. 한데 어쩔 땐 궁금하기도 하다. 난 언제부터 커피를 내려 마셨을까. # 커피를 처음 마신 건 고등학교 때였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커피를 마신다는 말을 듣고 ‘자판기커피’에 입문했다. 내 성적이 오르는 기적 따윈 벌어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때 커피란 녀석이 내 삶에 들어온 것 같다.# 지금이야 드립커피를 즐기지만 학창 시절 땐 ‘자판기커피’가 최고였다. 동전 몇개만 넣으면 툭 떨어지는 그 커피는 달달하면서 상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런 커피를 뽑
4년 전 창신동 마을 속 한옥 해체공사 현장. 벽에 박제된 듯 박혀있는 ‘커피자판기’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본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 자판기 커피를 잊고 살아온 것 같다. 반가운 마음에 자판기와 그 주변을 살펴본다. 길걷수다, 길에서 만난 커피자판기 첫번째 편이다.길에서 만난 커피자판기. 자판기 하나 들어갈 벽과 벽 사이에 기가 막히게 자리를 잡고 있다. 옆의 문과 대칭돼 하나의 세트인 양 자연스럽다. 한옥의 돌벽, 붉은 벽돌, 목재와 배수홈통, 시멘트 바닥과 자판기까지…. 재료
몇주 동안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더 많은 창살을 찾아 골목을 탐색했다. 창살을 찾는다는 목표를 정하고 골목을 둘러보니,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창살부터 독특한 문양이 있는 창살까지 다양한 종류가 눈에 들어온다. 건축가와 사진작가의 길걷수다 ‘창신동 방범창살’ 두번째 이야기다. 요즘 방범창살 대부분은 감옥의 철창살처럼 단순한 모양이다. 옛 창살들이 다양한 형태와 장식으로 만들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왜일까. 현장답사로 수집한 자료의 분석을 통해 ‘방범창살’을 이론적으로 고찰해보자.■ 재료 고찰=옛 방범창살의 재료는 폭 1
# 박용준은 건축가다. 어릴 때부터 ‘쓱싹쓱싹’ 그리길 좋아했는데, 꿈을 이뤘다. 오상민은 사진작가다.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길 좋아했는데, 꿈을 이뤘다. # 둘은 꼬맹이 때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은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둘의 서로 다른 시선은 때론 교차하고 때론 흐트러진다. # 둘은 건축가와 사진작가로서 평범한 마을을 보기로 했다. 사소한 것들의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조명하자는 게 소소한 목표다. 이른바 ‘길걷수다’ 프로젝트,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깊게 생각해
# 결혼하기 전 부모님과 함께 살 때입니다. 우리집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어릴 땐 에어컨이 귀해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에어컨이 없는 집이 드물어질 때까지 우리집은 선풍기와 부채로 여름을 나곤 했습니다.# 다행히 1인 1선풍기였습니다. 각자 배정받은 선풍기가 있었죠.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형님 선풍기도 기억납니다. ‘창살이 넓으니 손가락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듣곤 했죠. 파란 날개에, 흰색과 검정, 은색이 어우러진 몸체. 피아노 건반처럼 길고 넓은 버튼. 거기에 ‘달달달’ 거리던 그 소리가 아
# 정신없는 출장길. 또 다른 출장길 기차표를 예매합니다. 일정을 마친 저녁, 휴대전화를 켜고 기차표를 확인하는데 이상합니다. ‘나의 티켓’ 페이지에 예매한 기차표가 없습니다. 뒤통수가 싸해집니다. 순간, 몇년 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가족과 다같이 순천을 갔을 때입니다. 갑작스러운 차 고장으로 수리를 맡겼습니다. 연휴라 며칠 뒤에 수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만일을 대비해 기차표를 예매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날, 다행히 차 수리가 끝났습니다. 정비사님께 감사 인사 10번 드리고, 열심히 운전해서 서울로 올라왔죠. # 무사히
# 음식이 다 된 것 같긴 한데, 뭔가 살짝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소금을 살짝 넣으면 맛이 확 살아나곤 하죠. # 풍경 사진을 찍을 때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장면이 좋긴 한데 뭔가 심심하거나 아쉬울 때가 있죠. 그럴 땐 소금 대신 사람을 넣습니다. 초상권을 생각하면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작게 찍거나 실루엣으로 처리하곤 하죠. 소금을 살짝 넣는 것과 비슷한 기법입니다. # 노을빛이 남아있는 하늘,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 멋진 풍경입니다. 하지만 골목길이 휑하니 아쉽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혼자 주문을 외웁니다. ‘누구
# 초록색 보행자 도로 위에 나뭇잎 그림자가 깔립니다. 초여름 나뭇잎은 싱그러운 초록색이지만 그림자는 검은색입니다. 주황색의 자전거 도로 위에도, 회색의 아스팔트 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경색이 바뀌어도 그림자는 여전히 검은색입니다. #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배경을 마주합니다. 출신 ‘배경’이 어디냐, 집안 ‘배경’이 어떻냐. 인간사에서 배경은 꽤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인 듯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이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배경을 바꾸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씁니다. #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경색이 바뀐다고
#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예전엔 친구들과 노래방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노래방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서비스’였습니다. 어느 노래방이 추가 시간을 더 많이 주는지 서로의 정보를 모아 신중히 결정하곤 했죠. 가끔은 추가 시간이 끊기지 않는 전설의 노래방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너의 성대가 찢어질 때까지 시간을 넣어주마. 여기서 득음하렴’이라는 사장님의 깊은 뜻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서울 동작구 한 기관과의 인연으로 수년째 장애인 가족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사진은 모두 좋아하는 편이지만, 특히나 가족사진에 애착
# 다이소는 ‘1000원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국민가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생활용품점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라는 화계장터 대신 다이소를 찾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물건들이 모두 있기 때문이죠.# 우리 가족도 종종 다이소를 찾습니다. 아이들은 인형과 장난감 코너만 가면 신이 납니다. 저는 볼펜이나 전자기기 주변을 어슬렁거립니다. 아내는 청소용품이나 주방도구처럼 집에 필요한 것들을 고릅니다. 그래서일까요? 다이소로 향할 땐 ‘살 것을 정하고’ 가지만 늘 허사입니다. 거기만 가면 계획에
# “렌즈를 닦으세요. 선명한 사진을 얻을 겁니다.” 스마트폰 사진 기초 수업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입니다. 휴대전화는 손에 자주 쥐고 얼굴에 댑니다. 유분(기름)이 카메라 렌즈에 쉽게 묻을 수밖에 없는 구조죠. 그렇게 찍은 사진은 빛이 왜곡돼 뿌옇고 흐릿해집니다. 촬영 전에 렌즈를 닦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 그럼 렌즈를 깔끔하게 닦고 찍은 ‘쨍하고 선명한 사진’은 정답일까요? 아닙니다. 때론 흐릿하고 뿌연 사진이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진이 그렇습니다. # 바람을 쐬러 옥상 정원에 나갔을 때입니다. 건물 뒤로
# 산에 오르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중 하나는 조망권을 만끽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심의 분주함 속에 답답함을 느낄 때면 산에 올라 멀리까지 바라봅니다. 뻥 뚫린 풍경처럼 마음마저 시원해지곤 합니다. # 비 오는 날엔 아쉽게도 그런 조망권이 사라집니다. 비구름과 안개로 눈앞의 나무 한 그루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입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풍경이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신기루처럼 느껴집니다.# 비 때문에 조망권이 사라진 어느 날. 뿌연 풍경 너머로 구호와 함성이 들려옵니다. 보이진 않지만, 광화문 쪽에서 들리는 듯합
# “아빠, 나랑 이거 하자!” 막내가 가져온 건 러시아워 시프트. 첫째 아이부터 했으니 10년 넘은 우리 집 장수 보드게임입니다. 게임판 위에 모형 자동차를 배치하고, 각자의 말(스포츠카)을 옮깁니다. 꽉 막힌 길을 누가 먼저 뚫고 가느냐로 승패가 갈립니다. 단, 막내가 승리하기 전까진 게임이 끝나지 않습니다. # 오랜만에 일찍 집에 가는 날, 현실 세계의 러시아워에 걸렸습니다. 지하철 문이 열립니다. 나갈 수가 없습니다. 서 있는 사람, 나가려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이 뒤엉킵니다. “밀지 맙시다.” “나갈게요.” “잠시만요.”
# 바람에 따라 하늘거리는 풀잎을 찍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짝 엎드려 카메라를 들고 초점을 맞추던 그때, 검은색의 무언가 쓱 나오더니 저를 보고 흠칫 멈춰섭니다.# 검은 고양이는 검정 옷에 검정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저를 보고 살짝 놀란 눈치입니다. 고양이도, 저도 서로 바라본 채 잠시간 대치합니다. 자신의 여유로운 산책길을 방해한 낯선 자에게 보내는 약간의 원망과 경계,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호기심이 섞인 눈빛이 느껴집니다.# ‘너를 찍으려고 기다린 게 아니야. 내가 먼저 와 있었다고….’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딱히 전할 방법이 없습
# 까치가 둥지에서 날아오릅니다. 언뜻 비상, 희망, 날갯짓…,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밥벌이를 하려는 까치 나름의 몸짓인 건 아닐까요? 둥지 속을 보진 못했지만, 알이나 새끼가 있을 거라 상상해 봅니다.# 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집 지을 나뭇가지를 찾으러 떠난 건지, 먹이를 구하러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미인지 아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는 확실해 보입니다. 분명 가족을 위한 비행일 것이란 점입니다. # 묘한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가족을 위한 움직임, 일명 ‘밥벌이’라 불리는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
# 이맘때, 벚꽃 사진은 흔합니다. 벚꽃은 모두가 사랑하는 피사체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많은 사진을 찍습니다. 저도 벚꽃을 찍습니다. 참 이쁘지만 어떻게든 다르게 찍으려고 애를 씁니다.# 사진을 찍다 보면 늘 새로움을 찾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이미지를 만들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놀라움을 줄지 고민합니다. 새로움만 찾기 위해 너무 멀리까지 가버리면 공감과 소통도 멀어집니다. 혼자 동떨어진 곳까지 온 것은 아닌가 살펴봐야 합니다.# 흔하다는 것,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금방 떠오를 정도가 됐다는 건 그만
#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사진은 골랐는데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표현을 이리저리 써보다가 억지로 꾸민 것 같아 지우길 반복합니다. 자판에서 손을 뗍니다. 다시 사진을 찬찬히 봅니다. 찍었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빛, 그래 빛이었습니다. 익숙한 길에서 만난 특별한 빛, 경복궁 담벼락을 밝히던 마냥 신기했던 그 빛이 떠올랐습니다. # 제가 매일 같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유는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스마트폰이든, 똑딱이 카메라든, DSLR 카메라든 상관없습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런 사진을 찍고 나면 몇
# MBTI에서 J는 ‘계획형’, P는 ‘인식형’으로 부릅니다.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J,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P. 인간을 몇가지 형태로 분류하는 게 합당한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혈액형 4가지로 인간형을 나누던 때에 비하면 나름 디테일해진 듯합니다.# “계획하고 찍는 거예요? 찍고 나서 생각하는 거예요?” 종종 받는 질문입니다. 보는 분들 입장에선 ‘철저히 계획하고 찍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음, 진실을 살짝 공개하면 업무적인 촬영은 계획형, 그 외는 즉흥 촬영이 대부분입니다. MBTI에 빗대 설명하면 J 인간
# 철이 바뀌는 환절기엔 옷을 입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꽃샘 추위가 밀려온 요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설 때와 한낮의 온도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아침엔 겨울 잠바를 입었다가 오후엔 들고 다닌 적이 많습니다. 며칠 전엔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녀오다가 외투를 벗어 위에 두곤 그대로 내릴 뻔 했지요. 다행히 잘 챙겨오긴 했습니다. # 모르긴 몰라도 저만 그런 건 아닌가 봅니다. 멀리서 봤을 땐 누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줄 알았습니다. 동네에서 나무에 걸린 패딩 점퍼를 만났습니다. 크기를 봐선 큰아이 것인지 어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