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애니 ‘시계마을 티키톡’ 돌풍예감

▲ 퍼니플럭스 정길훈 대표는 최고 경영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꿈은 영원한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2010년 5월 뉴욕 브로드웨이. 적막이 흐르는 프레젠테이션 현장. 미국 어린이 채널에서 월트디즈니보다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는 니켈로디언 미디어그룹(이하 니켈로디언)의 관계자들이 한 애니메이션 업체가 만든 예고편 영상을 보고 있다.

상영시간이 3분에 불과한 짧은 영상이었다. 지금까지 니켈로디언이 예고편만 보고 ‘투자’를 결정한 사례는 없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는 “(니켈로디언이) 예고편을 보고 자리를 뜨겠지”라며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예고편만 보고 선(先)구입 결정

예고편이 끝난 직후 니켈로디언 관계자가 이 애니메이션 업체의 CEO에게 파격 제안을 했다. “280만달러(약 30억원)에 애니메이션을 구입하겠다.” 참석자들은 깜짝 놀랐다. 한 참석자는 “마치 할리우드 제작사 파라마운트가 국내 제작사의 영화를 전속계약한 후 전 세계에 동시 개봉을 약속한 것과 다를 바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니켈로디언이 러브콜을 보낸 애니메이션 업체는 업력이 5년에 불과한 국내 기업 ‘퍼니플럭스’다. 이 회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시계마을 티키톡’. 11분짜리 에피소드가 52회 분량으로 구성돼 있다.

올 7월 초 52회 제작이 모두 완료되고, 9월부터는 미국을 시작으로 200여 개국에서 방영된다 (영국ㆍ캐나다에서는 올 4월 23일 제작이 완료된 편부터 방영을 하고 있다). 국내 애니메이션의 간판 ‘뽀롱뽀롱 뽀로로’가 10년 동안 세운 ‘세계 130여 개국 방송기록’을 단번에 갈아 치웠다. 특히 국내 애니메이션이 미국 시청자의 안방에 방영되는 건 시계마을 티키톡이 처음이다. 아시아에서도 최초다.

더욱 놀라운 건 시계마을 티키톡의 방영 채널이 니켈로디언이라는 점이다. 니켈로디언은 MTV·파라마운트·드림웍스를 소유한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다. 시청 가구는 4억6000만에 이른다. 유명 애니메이션을 직접 기획해 제작·보급한다. 세계적으로 빅히트를 친 쿵푸팬더·스폰지밥의 제작사가 니켈로디언이다.

니켈로디언이 외부 제작사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계약·방영하는 건 1년에 많아야 1~2건 뿐이다. 이 때문에 니켈로디언에게 선택을 받으려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한 해 수백 개에 달한다. 이 좁은 문을 국내 신생기업 퍼니플럭스가 단숨에 뚫은 것이다. 비결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정길훈 대표의 뼈를 깎는 노력이 숨어 있다.

정 대표는 3D 애니메이션 전문가다. 퍼니플럭스를 창업하기 전 SBS 창작 애니메이션 ‘지스쿼드(2006)’를 제작했다. 지스쿼드는 세 소녀의 모험을 다룬 3D 어드벤처물이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오아시스(2002)’의 컴퓨터 그래픽(CG) 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정길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정작 그는 불만이 많았다. 무엇보다 투자자의 입김에 따라 애니메이션의 콘셉트가 수시로 바뀌는 현실이 못마땅했다. 애니메이션 창작자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도 마뜩치 않았다.

그는 살길, 아니 ‘희망’을 찾아야 했다.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창작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 대표는 2007년 6월 사재 1억원을 툴툴 털어 퍼니플럭스를 세웠다. 사람들은 ‘무모한 도전’이라며 핀잔을 줬다.

▲ 시계마을 티키토의 캐릭터 토미와 틸리.
그 역시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해외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걱정 때문에 밤을 새운 날이 부지기수였어요. 최소한 뽀로로보다 인기가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일단 저질러놓고 뒤를 계산하지 않은 거죠.(웃음)”

정 대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작정 발품을 팔았다. 어린이 캐릭터 제품을 파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던 중 어린이 상품 가운데 나무 제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순간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아! 나무 장난감에 생명을 넣으면 좋은 캐릭터가 될 수 있겠구나.”

세계 최초 나무 소재 애니메이션 시계마을 티키톡, 나무 소재 캐릭터 ‘토미’ ‘틸리’가 고안되는 순간이었다. 정 대표는 여기에 스토리를 얹었다. 취학 전 어린이가 시간의 반복성·규칙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계’라는 공간을 무대로 삼았다.

“시계마을 티키톡의 주인공인 토미와 틸리는 오래된 시계 상점에 걸린 시계 안에서 삽니다. 이 속에서 재미있는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죠. 무슨 일이 일어나도 토미와 틸리는 정각을 알려주러 시계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뻐꾸기시계의 뻐꾸기처럼 말입니다. 아이들은 스토리에 빠져있다가도 토미와 틸리를 보며 시간 개념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됩니다.”

캐릭터와 시나리오는 완성했다. 이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제작 비용이 많지 않았다. 지인에게 투자를 요청하면 “‘예고편’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랬다. 예고편으로 투자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정 대표는 전략적으로 짧으면서도 임팩트가 강한 예고편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뛰어난 애니메이터를 영입해 제작을 맡겼다. 2010년 미국 카네기멜런대의 VFX(시각효과) 과정을 이수한 김종현 퍼니플럭스 제작실장이 참여했다. 독일인 프로그래머 번트 피터워스도 제작을 도왔다.

예고편의 반응은 뜨거웠다. 2008년 여름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실시한 ‘글로벌 프로젝트’ 심사에서 1등을 차지해 7억원을 지원받았다. 반가운 소식은 또 있었다. 시계마을 티키톡의 경쟁력을 확인한 글로벌 프로젝트의 심사위원 스테판 굴드(포키즈 엔터테인먼트 PD)는 세계적인 TV 영상 콘텐츠 배급사인 영국 조디악에 작품을 소개했다.

조디악의 관계자들 역시 이 애니메이션을 본 후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이젤 조디악 이사는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작품을 기획했나”라며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2009년 3월 300만달러(약 35억원)를 투자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를 뒤흔든 낭보였다. 정 대표는 “조디악과 니켈로디언의 평가만으로도 시계마을 티키톡의 경쟁력이 입증된 것”이라며 “이때부터 성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CEO 최고경영자 아니다”

▲ 정길훈 대표는 "미국 월마트와 캐릭터 상품 개발건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제작사와 배급사가 참여한 덕분인지 시계마을 티키톡의 시청률은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올해 4월 23일 영국과 캐나다에서 방영된 지 2주 만인 5월 초 7.6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2005년 이후 동시간대에 방영된 모든 프로그램을 통틀어 최고 시청률이다.

올해 2월에는 미국 미디어 그룹 리버스타즈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인 스타즈와 글로벌 DVD 판권 판매계약을 맺었다. 스타즈는 소니픽처스와 월트 디즈니의 온라인ㆍ유료 방송 권리를 관리하는 그룹이다. 글로벌 완구 기업인 골든베어, 출판사 시몬 앤 셔스터와도 계약을 앞두고 있다. 정 대표는 “미국 월마트, 영국 테스코와도 캐릭터 상품 개발건으로 활발하게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발돋움한 퍼니플럭스. 하지만 회사 분위기는 여전히 긴박했다. 축배를 들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게 정 대표의 생각인 듯하다. 그는 아직도 사내에서 대표가 아닌 감독으로 불린다. “습관처럼 대표라고 부르는 직원들에게 ‘감독이 더 좋다’고 말하곤 합니다. 애니메이션 회사의 CEO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캐릭터를 만드는 총감독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같은 천진함이 눈가에 묻어나는 정 대표는 경영인이 아닌 토미와 틸리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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