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67

▲ 권율은 이치전투로 위세를 떨쳤지만, 조정은 권율을 자헌대부 전라감사로 승직한 게 전부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적군이 전라도로 들어올 수 있는 육로를 지키고 있었다. 광주목사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을 선봉으로 삼아 진산珍山의 이치(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와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 남쪽 사면의 배티재)를 지켰다. 이순신에 질린 일본군이 권율이라는 또 다른 명장과 만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금성ㆍ김화金化 양읍을 옮겨 다니며 적을 무찔렀다. 그러다 김화에 유진을 했는데, 모리승신 등이 원호가 잠든 때에 야습을 감행하였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원호는 끝내 전사했다(1592년 6월 19일).

그 무렵, 이정암李廷馣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연안延安성을 지키고 있었다. 일본장수 흑전장정이 황해도에 들어가자마자 연안을 점령하려고 쳐들어온다. 초토사 이정암은 군사들을 향해 “우리는 나라 일에 함께 죽자”고 맹세한 후 화전을 쏘아 방어를 했다. 그러길 3일, 성이 갈수록 위태로워졌다. 이정암은 섶을 쌓고 위에 올라가 누워 군사들에게 불을 질러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동남풍이 일어나 적진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부장 조신옥趙信玉과 백천白川군수 장응기張應祺의 무리가 나뭇단에 불을 질러 성 밖으로 던지는 통에 개미떼같이 붙어서 올라오던 적병은 패퇴하고 말았다.

연안성을 빼앗지 못한 적장 흑전장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해주海州와 평산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를 데리고 와서 5일 동안을 맹렬히 싸웠다. 하지만 백천군수 장응기는 원래 용장이라 많은 적군을 쓰러뜨렸다. 흑전장정이 또다시 불리한 상황에 처한 셈이다. 그때 순신은 적군이 전라도로 들어올 수 있는 육로를 지키고 있었다. 광주목사 권율은 동복현감 황진을 선봉으로 삼아 진산珍山의 이치(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와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 남쪽 사면의 배티재)를 지켰다.

광주목사 권율은 전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며 병조판서 이항복의 장인이다. 당시 문무재라 하여 이순신, 김시민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권율은 풍신수길과 동갑이었고, 이순신보다는 9세가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 나이는 57세였다. 황진은 통신사 황윤길의 조카로 자는 명보明甫다. 신장 8척에 미수염美鬚髥이며 용력이 절륜하고 강개한 선비였다. 일찍 그 숙부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가서 보고 장차 대란이 날줄 알고 일본의 보도 2자루를 사왔으며 용감하고 민첩하기가 나는 새와 같았다.

▲ 권율 장군이 장려하자 장병들이 적군 중으로 돌진해 맹렬하게 싸웠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맹렬히 싸운 군대 위세 떨쳐

전라도를 침범하려던 일본군은 이치를 넘으려고 했다. 수목에 몸을 숨긴 황진의 군사가 종일 교전을 하였다. 적군이 패하여 유혈이 초목을 물들이고 퇴각을 하려 할 때 황진이 철환을 맞고 쓰러졌다.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를 본 적군이 다시 쳐올라왔다. 권율이 장병을 독려하여 맹렬히 싸우던 중 황진이 총 맞은 상처를 싸매고 일어나 장검을 휘두르며 적군에게 돌진했다. 무려 100여급을 베니 그 형세가 질풍신뢰疾風迅雷와 같아 당할 자 없었다. 그러자 조선군이 분기탱천해 적은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권율과 황진의 이치 승첩으로 군대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1592년 7월 8일 이치전투).

하지만 조정은 권율을 자헌대부 전라감사로 승직하고 황진은 절충장군 당상으로 승자(당하관이 당상관의 자급으로 오르던 일)할 뿐이었다. 1592년 12월에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 청병사 정곤수의 호소로 병부시랑 송응창을 경략사經略使로 삼아 압록강을 넘어왔다. 무려 4만 병마였는데, 상세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총대장 요동제독遼東提督 영하후寧夏侯
이여송李如松 수병手兵 500인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관副總管
이여백李如栢 친병親兵 1500인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 친병親兵 1500인
우협대장右協大將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친병親兵 1500인
이상 합계 5000인
통령統領 임자강任自强
선부병宣府兵 1000인
참장參將 박방춘朴芳春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고책高策 마병馬兵 2000인
총령總領 전세정錢世禎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척금戚金 보병步兵 1000인
중영장中營將 주홍모周弘謨 보병 1000인
유격장군 방시휘方時輝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고승高昇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왕문王問 마병馬兵 1000인
이상 9장 마보병 합계 1만인 이여백이 통솔.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마병馬兵 1200인
부총병 왕유정王維貞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이여매李如梅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이여오李如梧 마병馬兵 500인
참장 양소선楊紹先 마병馬兵 1000인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마병馬兵 1000인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마병馬兵 100인
유격장군 갈봉하葛逢夏 마병馬兵 1000인
이상 칠장 마병 합계 7700인 양원이 통솔.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 보병步兵 1000인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남병南兵 1000인
참장 조지목趙之牧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장응충張應祌 마병馬兵 1000인
참장 진방철陳邦哲 보병步兵 1000인
유격장군 곡수谷燧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양심梁心 마병馬兵 1000인
이상 7장 마보병
합계 7000인 장세작이 통솔
유격장군 조문명趙文命 마병馬兵 1000인
유격장군 고철高撤 마병馬兵 1000인
동지同知 이평李平 마병馬兵 800인
유격장군 시조경施朝卿 마병馬兵 1000인
이상 4장 마병 합계 3800인

이여송의 대군이 안주에 이르렀을 때에 유성룡은 접빈사로 면회를 청하였다. 이여송은 유성룡을 영접하여 의자에 마주 앉았다. 이여송은 심유경처럼 오만무례하지는 아니하였다. 유성룡은 원로행역의 노고를 위문한 뒤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 어디로 쳐들어가야 할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이여송이 이렇게 말했다. “염려할 것 없소. 적은 조총을 믿지만 우리는 대포가 있으니 대포로 쏘면 5~6리 밖까지 가니 적이 당하겠소?” 이여송은 유성룡과 작별할 때 부채를 꺼내들고 시 한수를 적어줬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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