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장미의 이름 ❼

▲ 윌리엄 신부는 잘생긴 데다 흰색에 가까운 수도사 복장을 해 호르헤 신부와 외관상으로도 대비된다.
호르헤 신부는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 원작소설에서 고뇌 끝에 얻은 믿음과 신념에 투철한 지성인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는 용모부터 악마에 가깝다. 만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마귀처럼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불길한 모습이다. 난데없이 눈의 흰자위만 드러낼 때도 있다.

그를 추종하는 도서관 사서 역시 칙칙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다. 둘 다 한마디로 기분 나쁘게 생겼다. 반면 윌리엄 신부는 잘생긴 배우 숀 코너리가 연기한 데다 흰색에 가까운 수도사 복장을 했다. 그래서 호르헤 신부와 외관상으로도 극적으로 대비된다. 선악의 흑백구도로 몰아가는 듯하다. 비주얼의 시대는 이래서 불온하다. 단순하고 명확한 선악구도는 대중예술매체에서 가장 호소력 있는 설정이다.

윌리엄 신부는 빛과 정의의 인물, 호르헤 신부는 어둠과 악의 화신처럼 보인다. 두 신부의 이미지는 그들이 인간의 이성과 지식, 진리의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투쟁할 때 관객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친다. 양측의 주장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잘생긴 윌리엄 신부의 말에 더 솔깃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호르헤 신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건 원작자인 에코의 진의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에코는 두 의견이 모두 틀렸다거나 혹은 둘 다 옳다거나 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어쩌면 심정적으로 윌리엄 신부보다 호르헤 신부를 변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 앗소의 독백을 봐도 그렇다. 앗소는 악마 같은 호르헤 신부를 단 한번도 부정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 독백에서 앗소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윌리엄 신부의 죄를 말한다.

▲ ‘장미의 이름’ 영화 포스터.
그는 “윌리엄 신부가 지적 자만심에 빠져 저지른 죄도 이제는 용서하기로 했다”며 담담하게 회상한다. 앗소가 말하는 윌리엄 신부의 죄는 과연 무엇일까. 외적으로도 분명히 대립되는 윌리엄과 호르헤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은 도서관에 있는 방대한 정보를 공개하느냐의 문제다. 영화 속 수도원의 도서관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책을 보유하고 있다. 기독교는 물론 아랍, 유태교, 이교도와 이단세력의 저술까지 수많은 문헌과 정보가 망라돼 있다.

그 많은 지식정보가 과연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인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이 유익하고 어느 것이 위험한 정보인지, 또한 유익한 정보라면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공개하는 것이 좋을지, 영화 ‘장미의 이름’은 지식정보화 시대의 관객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베네딕트파를 대표하는 호르헤 신부는 오직 신만이 세상과 우주의 진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능력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그는 모든 인간에게 정보를 공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반면 영국 실증주의 철학을 대변하는 윌리엄 신부는 인간 이성으로도 능히 실체적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의 입장에서 ‘지식정보를 공개했을 때 그것이 유용한가’라는 문제는 인간의 이성과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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