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73)

심유경과 이여송은 일본군과 화의를 하고, 제멋대로 남삼도를 허락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에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유성룡 등 조선 대관들이 화의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반대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목소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 조선군은 부산과 울산 방면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치려 했지만 이여송의 반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592년 4월 일본군 수륙부 약 15만명이 부산포에 건너온 이래로 1년 동안 일본군은 조선 7도에 가득했다. 병란 탓에 충청·경기·황해 각도에는 양식이 떨어졌다. 백성들도 곤란할뿐더러 한성에 있는 일본군도 군량이 끊어져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한성에 있는 일본군의 숫자는 이랬다.

석전삼성石田三成(이시다 미쓰나리) 1600인
대곡길계大谷吉繼(오타니 요시쓰구) 1500인
증전장성増田長盛(마시다 나가모리) 1700인
이상 삼봉행三奉行의 군사가 합 4800인
가등광태加藤光泰(가토 미쓰야스) 1400인
전야장강前野長康(마에노 나가야스) 700인
이동우병伊東祐兵(이토 스케타카) 600인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7500인
과도직무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7600인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 5000인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6700인
길천광가吉川広家(깃카와 히로이에) 600인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5500인
부전수가浮田秀家(우키다 히데이에) 6000인
이상 총계가 5만1400인

이 5만여의 대군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 군량이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벽제관 싸움이 있던 그날 밤,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가 사대수를 데리고 밤중에 행군해 용산창龍山倉을 적군 모르게 습격, 적의 군량미 10여만석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 이후 일본 명호옥 행영에서 군량을 염려해 보낸 군량선은 경상도 연해에서 이순신이 모조리 탈취, 불살라 버렸다.

낭패를 당한 일본 제장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석전삼성·증전장성의 무리는 “군량이 오지 못하니 부산 방면으로 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고 우겼다. 가등광태는 “한강의 모래를 먹을지언정 한양은 버릴 수 없다”고 주장했고, 가등청정 같은 무장은 “이여송의 군량을 탈취하여 먹자”며 큰소리를 쳤다. 그만큼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식량이 없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농사를 못 지은 경기도 일대의 백성들은 계사년 춘궁기 때 굶어죽기 시작했다. 시체가 길가에 늘어설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군량미 없는 일본, 벼랑 끝으로…

▲ 정문부의 호소로 함경도에 의병이 모이게 됐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기근에 힘겨워하던 백성들은 체찰사 유성룡이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동파로 모여들었다.

유성룡은 한강으로 들어온 전라도 피곡(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 몇천석을 풀어 전 군수 남궁제南宮悌로 하여금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다.

남궁제는 백성들에게 솔잎 가루를 나눠준 후 쌀가루 한 홉에 솔잎 가루 한 되씩 섞어 물에 타서 먹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피난민을 다 먹일 수 없어, 곤란한 정세가 이어졌다.

이렇게 곤란한 지경으로 빠지던 일본군의 앞엔 또다시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화의를 붙인다며 심유경인지 낮도깨비인지 하는 작자가 또다시 한성에 나타난 거였다. 평양으로 물러간 뒤 일본군의 전투세력이 상당히 강한 줄로 착각한 명 제독 이여송이 심유경을 한성에 보내 화의를 종용한 거였다.

심유경은 부전수가와 석전삼성 등을 만나서 “일본이 조선의 두 왕자 이하 여러 신하를 돌려보내고 일본군이 한성에서 물러가면 조선의 남삼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여 주겠다”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군량 떨어진 것이 석연치 않았던 일본 장수들은 두말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군사를 거두어 경상도 연안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결국 심유경의 강화 제안은 군량이 떨어져 낭패를 당한 일본군에게 도움을 준 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심유경과 이여송은 제멋대로 남삼도를 허락하고 조선 정부에는 알리지 아니하였다. 유성룡 이하 조선 대관들이 화의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통에 감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거다.

마침내 이여송과 부전수가의 사이에 화의가 성립돼 1593년 4월 19일 일본군은 남으로 철수하고 20일에는 명군이 한성에 들어왔다. 철수하는 일본군은 부산과 울산 방면으로 내려갔다. 경상도에서 가까운 우도 연해안은 이순신의 세력범위였기 때문이다. 부산만 가도 고국이 가깝다는 생각에 일본군은 난후병(부대후방을 지키는 병사)도 두지를 않고 죽기로 달려 내려갔다.

이런 상황을 눈치 챈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이렇게 권했다. “일본군이 돌아가려는 마음이 바빠서 필연코 후방을 지키는 병사를 두지 아니하였을 겁니다. 급히 진격하면 소서행장과 부전수가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여송은 내심 일본군을 두려워했다. 전술이 무섭기도 하거니와 화의를 주도해 공격을 지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여백을 보냈는데, 그마저도 병이 났다며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대패 이후 기개 잃은 이여송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주산성에서 서울로 입성한 권율은 선거이를 선봉으로 삼아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여송이 이를 방해했다. 유격장군 척금을 한강으로 보내 나룻배가 통행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던 거다. 결국 선거이는 강을 건너지 못했고, 권율과 유성룡의 계책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때에 요동에 있는 경략사 송응창이 일본군이 한성을 떠난 줄 알고 이여송에게 추격하기를 명하였다.

이여송은 앉아서 버틸 수 없어 부득이 출발하여 조령을 넘어갔고 “일본군이 멀리 가서 추급하지 못하였다”고 송응창에게 보고했다. 이후 중국에서 새로 나온 사천성四川省 총병 유정劉綎은 성주, 오유충은 선산, 조승훈 갈봉하는 거창, 낙상지 왕필적은 경주로 보내고, 자신은 서울로 돌아왔다. 벽제관에서 이론에 대패한 이여송은 용감하던 가정을 잃고 풀이 죽어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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