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버스의 차창은 이산화탄소가 들어간 석회수처럼 불투명했다. 손으로 창을 문지르면 한적한 도로가 논이 보였다.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40분, 버스의 규칙적인 진동에 몸을 맡겨 달려간 곳은 강화도의 전등사였다. 그날은 2월 2일, 오규원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이 되는 날이다.  

<전등사 전경. 사진 = 육준수 기자>

오규원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에 시 “겨울 나그네” 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시 “몇 개의 현상” 으로 추천 완료하며 데뷔한 시인이다. 시집 “분명한 사건”, “순례”,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등을 펴냈으며 유고 시집으로는 “두두” 가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런 오규원 시인은 지난 2007년 2월 2일, 만성폐기종으로 고생하다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학생인 시절이다. 오규원 시인은 의식을 잃기 직전인 1월 21일 즈음, 간병 중이던 제자 이원 시인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마지막 글귀를 남겼다고 한다. 이때 시인이 쓴 글귀는 다음과 같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전등사에서 올려다 본 하늘. 사진 = 육준수 기자>

이 짧은 시의 마지막 글귀처럼, 오규원 시인의 장례는 강화도에 위치한 전등사의 한 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종무소 왼편으로 나가 서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501번 나무가 바로 오규원 시인의 나무이다. 오규원 시인의 제자들은 시인의 기일이 되면 이 나무 앞으로 찾아와 떠나간 시인을 추억하곤 한다. 

내가 이 나무를 보러 강화도까지 온 것은 “어쩌면 나 역시 오규원 시인의 제자”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직접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문예창작과에서 처음 만난 작법서가 오규원 시인의 저서 “현대시작법” 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이가 수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작법서로 내 곁에 살아 있었다.  “오규원” 이라는 세 글자는 나에게 각별하다. 

문인이란 결국 작품으로써 박제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조차도 뛰어넘을 수 있는 글. 항상 책으로만 만나던 그를 직접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집을 멀리 떠나는 자식처럼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전등사 전경. 사진 = 육준수 기자>

요 며칠 연거푸 비나 눈이 내려 전등사의 흙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꾹꾹 눌러 밟으며 비탈진 길을 올라갔다. 신발 밑창과 바짓단을 더럽히는 진흙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필자보다도 몇 해는 먼저 무작정 오규원 시인이 있는 전등사에 찾아와, 홀로 성큼성큼 이 산에 오른 이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처럼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오규원 시인의 글을 읽다가, 
홀리듯 전등사에 찾아온 이가 분명 있었을 테지. 

웃음이 나오면서도 공감이 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과거의 누군가가 밟았던 흙이, 이제는 나에게 들러붙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꽁꽁 언 약수터. 사진 = 육준수 기자>
<전등사 종무소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 사진 = 육준수 기자>

추운 날씨임에도 경내에는 비교적 사람들이 많았다. 현장답사를 온 듯한 초등학생들부터, 금슬 좋아 보이는 노부부, 법복을 입은 스님들도 있었다. 어찌나 날이 추운지 약수터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가 종무소를 지키고 있었다. 고양이의 등이나 엉덩이께를 쓰다듬으며 경내를 훑어본 나는, 종무소 안으로 들어가 오규원 시인 나무로 가는 길을 물었다. 종무소 직원은 지도를 펼쳐 한 점을 짚으며 일러주었다. 

501 나무라고 보이시죠, 여기가 오규원 시인 나무에요. 

<시집 "사랑의 감옥" 이 매여 있는 오규원 나무. 사진 = 육준수 기자>

종무소의 안내를 받아 발견한 오규원 시인의 나무에는 시집 “사랑의 감옥” 이 매여 있었다. “사랑의 감옥” 은 1991년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출간된 오규원 시인의 시집이다. 또한 “사랑의 감옥” 은 당시 상품화된 언어, 물신화라는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시인의 나무 근처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눈밭에는 패턴이 선명하게 보존된 발자국이 남아있어, 이미 선객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오규원 시인의 제자 혹은 친지일 터. “조금만 더 일찍 방문했더라면 그들과 함께 오규원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오규원 시인의 나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었다. 잠든 오규원 시인은 이곳에서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 나는 나무 옆에 서 전등사를 내려다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눈과 앙상한 나뭇가지들 때문인지, 전등사는 온통 고요해보였다.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사찰 장식들이나 절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경내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낮게 피어오르는 연기까지도 말이다. 

<오규원 나무에서 내려다 본 전등사. 사진 = 육준수 기자>

이런 고요함 때문인지 오규원 시인이 남긴 마지막 시 구절이 자꾸 생각났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라니. 이런 고요함이야말로 시인이 원하던 “나무 속” 이 아니었을까. 나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인이 묻혀있는 나무 앞에 꿇어앉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시 구절을 속삭였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어떤 슬픔에 젖어들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 떠나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은 겨울이었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편히 누운 오규원 시인의 귓가에 마지막 시구를 속삭이며, 나는 오규원 시인이 자신 앞에 무수하게 놓인 오후들에게서 벗어나 초목과도 같은 평안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규원 시인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선생께서는 이미, 나무속에 누워 조용한 잠을 청하고 계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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