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문학관 <사진 = 김상훈 기자>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기형도문학관이 3월 10일 기형도문학관 강당에서 기형도 시인의 29주기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추모행사에는 기형도 시인의 후배였던 나희덕 시인을 비롯 기형도 시인의 지인들과 유가족, 지역 시민 등이 참여했으며, 문학대담, 시 낭송, 오케스트라 연주 등이 준비됐다. 

행사의 사회를 맡은 유희경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이 자리에 참석하며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형도 시인의 팬이자 애독자였기에 기형도 행사의 사회를 맡게 된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유희경 시인은 “광명을 지나가면 기형도가 떠오르곤 한다. 그가 시에 녹여낸 광명의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며 “오늘 행사가 새롭게 발견된 기형도를 알아가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부 첫 행사로는 운산고의 ‘기형도 연구 프로젝트’ 수상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진행됐다. 광명에 위치한 운산고등학교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기형도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이 기형도 시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제작하도록 하고 있다. ‘질투는 나의 힘’을 애니메이션, 기형도 ‘빈집’을 영상 등으로 선보였으며, 수상작품 상영 이후에는 학생들과의 짧은 대담도 마련됐다. 

이어 나희덕 시인과 유성호 평론가의 문학대담도 꾸려졌다. 기형도 시인의 후배이기도 한 두 작가는 이 자리에서 기형도 시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시인과 얽힌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기형도의 문학세계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유희경 시인의 사회로 나희덕 시인과 유성호 평론가가 대담을 진행 중이다 <사진 = 김상훈 기자>

기형도 시인의 후배이자 연세문학회에서 활동했던 나희덕 시인은 기형도 시인과 만났던 일화를 떠올리며 “기형도 시인이 걸어간 발자국을 뒤늦게 걸어갔다.”고 표현했다. 연세대학교 내에는 시를 쓰는 이라면 모두가 받고 싶어 하는 윤동주 문학상이 있는데, 83년 수상작이었던 기형도 시인의 ‘식목제’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으며, 85년 자신도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이어 기형도 시인이 일하고 있었던 중앙일보에 입사하며 기형도 시인을 만났던 일화를 이야기했다. 

나희덕 시인은 당시에 대해 “좁은 복도에 자판기가 있었고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 같은 게 흘렀는데, 기형도 시인이 블라인드 너머로 시내를 바라보던 시선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도 건강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약이 한줌 씩 주머니에서 나오기도 했고, 두통도 있는지 미간을 찌푸리거나 피로한 기색이 묻어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때는 서운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두고두고 인생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어떤 점에서 시인의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주는 자리가 아니었나 깨닫게 됐다. 바로 석 달도 안 돼서 세상을 떠났고, 비극적인 고인의 죽음이 시리게 느껴졌다.”며 “살아서 기형도 선배와 살뜩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추모제를 안 빠지고 다니며 무덤을 찾아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고 고인을 회상하고 기형도 시인의 시 ‘대학 시절’을 낭송했다. 

기형도 시인의 묘 <사진 = 김상훈 기자>

유성호 평론가는 기형도 시인의 작품인 ‘빈 집’과 ‘그 집 앞’을 한쌍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빈 집’에 대해 “대중성과 기형도스러움, 완결성에서 압도적인 작품이 아닌가 싶다.”고 소개한 유 평론가는 “‘그집 앞’과 ‘빈집’은 두 편히 나란히 발표됐으며, 두 편을 동시에 읽어야 ‘빈집’을 제대로 읽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유성호 평론가는 “사랑을 잃는 과정이 ‘그 집 앞’에 나오고, 사랑을 잃고 나서의 자의식이 ‘빈 집’에 나온다.”며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를 통해 쓴다는 자의식이 생성되고 뒤이어 나오는 종이와 촛불 등은 쓴다는 자의식의 도구들이다. 자신의 모든 쓰기 행위가 완결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빈 집’의 여러 의의를 밝힌 유 평론가는 “기형도의 작품 중 비평적으로나 독자로서나 ‘빈집’을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이밖에도 황인숙, 나희덕, 박준 시인이 참여하는 시 낭독회가 열려 기형도의 시를 참여 시인들이 육성으로 낭독했으며, 이종융 테너와 민덕홍 바리톤의 성악곡, 광명심포니오케스트라 현악 4중주의 연주도 진행됐다. 기형도 29주기 추모행사는 100여 명이 훌쩍 넘는 광명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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