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아킬레스의 분노Achilles's Wrath

4장 1편 보기

[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보겠거니와 부족의 운명을 대표하는 아킬레스라는 서사적 영웅-루카치의 말대로 서사적 영웅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이 아닙니다. Lukacs says that "The epic hero is, strictly speaking, never an individual"-은 자신을 죽이고 부족의 운명을 걸고 적과 그야말로 운명적인 결투를 벌이게 되어있는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과연 고대영웅서사시의 전형적이고 영웅적인 서사형 모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헥토르여, 잊지 못할 자여! 내게 합의에 관해 말하지 마라/ 마치 사자와 사람 사이에 맹약이 있을 수 없고/늑대와 새끼 양이 한마음 한뜻이 되지 못하고/시종일관 서로 적의를 품듯이, 꼭 그처럼/나와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우리 사이에/ 맹약이란 있을 수 없다 둘 중에 한 사람이 쓰러져/자신의 피로 불굴의 전사 아레스를 배부르게 하기 전에는/그러니 그대는 온갖 무용을 생각하라! 지금이야말로/그대는 창수가 되고 대담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더 이상 피할 길은 없다 팔라스 아테네가 내 창으로 곧 그대를/ 제압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이제 그대가 미쳐 날뛰며 창으로/죽인 내 전우들의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보상하게 되리라"(제22권) 
  
이런 고대적 인물의 행동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도록 하는데 기여한, 다시 말해 시(인)의 교육자로서의 정치적 기능을 주목한 고대 그리스의 문예사상가이자 철학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새끼사자인 알렉산더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모방의 대상을 자연(신)으로, 인간의 행동으로, 비극으로, (극)시로 한정하고 이런 모방을 통해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특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려했다([시학] 13장)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해 보게 됩니다.  

자,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한데... 

왜 그는 비극과 극시라는 형식에 머무르고자 했으며, 왜 그는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특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려 했을까 하고 의문의 메스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그 마약과도 같은 ‘예술의 마취기능’입니다.  

잘 알다시피, 간접효과를 통해 얻은 예술의 힘으로 삶의 이치를 깨우치게 됨으로써 인간은 심미적으로 거듭나게 되고 분별력을 지닌 각성된 인간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특히 시에 있어서의 비유의 사용능력은 그도 적절하게 말했듯이, 남에게 배울 수 없는 천재의 표징입니다. 왜냐하면 ‘은유metaphor’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예술관에 딴지를 걸게 되는 것은 그가 모방하는 인간을 통해, 두려움과 연민에 젖은 인간을 위한 예술을 옹호하는 저의가 대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예술은 그 순기능 못지않게 역기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그가 사람들을 모방에 뛰어놀게 하고, 두려움에 떨며 연민의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 예술적 양식(비극, 극시)에 줄을 대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자, 그렇다면 그는 왜 ‘희극’이 아니고 ‘비극’에, ‘소설’이 아니고 ‘시’라는 양식에 매달리고 있나 검토해 보것습니다. ‘한국사람 나빠요’하고 재미있게 비틀어대는 ‘개그콘서트’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희극을 기피한 것은 희극은 기본적으로 우월의식에서 나오는 양식인 데다 대개 소수약자들이 즐기는 놀음이고, 중요한 것은 이게 풍자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 강자들은 이것을 못마땅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희극을 기피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시에 비해 소설은 대상에 일정한 거리를 지닌 양식으로 이야기는 반성적 성찰의 성격을 지니먼서 진이 빠지도록 시시콜콜 따지는 잘난 사람들의 정서와 통하는 면이 있는 근대적 양식인 것이니, 이 또한 강자들로서는 기휘의 대상일 수밖에 없던 것이고, 이것을 웅변하고 있는 역사적 사례가 바로 소크라테스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예술적 양식이라는 게 현실과 어떤 조응관계를 갖고 있는가, 즉 그는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라는 예술과 현실의 대응문제를 말하라는 주문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비극의 경우를 보것습니다... 

오이디푸스Oedipus, 그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의 주인공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 자주 인용되고 있는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아폴론 신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납니다. 그는 코린토스 왕 폴뤼보스와 왕비 메로페가 자신의 양친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네에게 채찍질을 당하자 격분하여 노인을 때려죽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습니다. 그 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 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 공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고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라이오스가 살해될 때 도망쳐온 라이오스의 시종은 테바이의 신왕이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임을 알고 테바이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실부를 죽이고 생모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까지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코린토스에서 한 사자가 와서 폴뤼보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코린토스 시민들이 오이디푸스를 새 왕으로 모시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오이디푸스는 아폴론 신의 예언 가운데 전반부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후반부는 실현이 가능하다면서 두려움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사자는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폴뤼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가 그의 친부모가 아님을 밝힙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모든 진상이 밝혀짐으로써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맹인이 되어 유랑의 길을 떠나고 이오카스테는 목매어 죽습니다. 이처럼 비극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일으켜 병주고 약주고, 어르고 달래는 통치술의 일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킬레스도 오이디푸스처럼 신이 정해준 운명을 빗겨가지 못하도록 이미 각본이 짜여져 있는 대로 자신의 길을 갑니다. 즉 모든 것은 하나의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운명적으로 그리스왕 아마가멤논과 싸우다 접고 다시 그리스의 적인 트로이의 용장 헥토르와 싸워 그리스의 영광을 드높이고는 파리스에게 죽게 되어 있는 것이고, 바로 이점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그리스 통치자에게 있어 아킬레스를 기려야 하는 정치적 목적과 닿는 것이고, 이런 두려움과 공포감은 무용을 통해 치유하도록 시인은 찬사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아킬레스의 죽음 대목에서, 특히 트로이의 적장 헥토르의 죽음과 관련하여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헥토르의 시신이 놓인 막사에 찾아와 아킬레스와 어린애처럼 ‘엉엉’ 눈물을 흘리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모든 그리스족clan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모두들 동정과 위로의 눈물을 쏟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도의 장치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지 결코 트로이 장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웃기는 짬뽕이라고 이건 말이 되는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전우인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적장을 죽여 놓고 엉엉 울고 있다는 설정은 너무도 어설프고 모순된 설정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렇게 ‘극적 형식’을 선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이는 서사적 형식과 대비하면 그 차이가 분명합니다. 근대의 ‘서사극’ 이론을 주도한 브레히트의 연극론과 비교해 보것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통해 알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모방, 흉내내기를 통해 가능하게 됩니다. 즉 배우가 아킬레스를 모방하고, 관객이 다시 그 배우를 모방하여 주인공의 체험을 관객의 것으로 할 수 있도록 온갖 암시력과 연기력을 발휘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감정이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극적 몰입에 있습니다. 배우가 스스로 ‘극적’ 몰입 상태에 빠지면 관객 또한 극적 몰입상태에 휘말립니다. 이것은 배우가 거리를 두지 않은 데서 생기는 효과입니다.  

몰입을 통한 감정이입이 갖는 효과는 실로 대단합니다. 나는 오래 전 연극의 천재라 일컬어졌던 명배우 추송웅의 연기를 눈앞에서 지켜 본 바가 있습니다. 그때의 그 열정과 몰입감이라니...그러나 대단한 그만큼 마취성 또한 컷던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몰입의 한가운데서는 도대체가 정신이 얼떨떨할 정도로 다른 감정의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거리두기, 브레히트 식의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이유가, 서사극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령, 관객의 경우를 다시 보것습니다. 이것을 ‘낯설게 하기’를 통해 연기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배우는 자신이 악한을 연기하면서 “자, 그러먼 제가 악한을 한번 연기해 볼랑게요, 이보시오...” 이렇게 자신은 악한이 아님을 전제하고 연기를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연기 그 자체에 몰입하지 않고 그 상황을 낯설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배우의 악한 연기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굴절효과를 갖게 되면서 반성하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상황을 객화시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또 그대로 관객과 공유됩니다.  

감정이입과 낯설게 하기, 이는 무비판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감정이입은 동화同化의, 동일성의, 전체주의의 세계이지만 낯설게 하기는 이화異化의, 차이의, 개인주의의 세계입니다.  

그러고 보니, 서사시와 이를 극화한 비극은 ‘동화同化’ 이데올로기라는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고대의 교육제도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희극과 이야기가 왜 배제되었는지...푸코는 [담론의 질서]에서 ‘어느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존재한다’고 했거니와 배제는 권력의 작동방식임을 염두에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니다. 에릭 A. 해블록([플라톤 서설])이 고대의 서사시가 부족의 백과사전이라는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 인자 정리해 보것습니다.  

오늘, 민주주의가 일상화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모럴이 프라이오리티하게 중시되는 현실에서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의 가치를 우선하는 고대의 시의 양식이, 호메로스의 고전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고전은 다만 경계로 삼아야 할 하나의 교훈적인 이야기a cautionary tale일 뿐이라는 것을 호메로스가 넌지시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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