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욱 시인. 사진 제공 = 박선욱 시인
박선욱 시인. 사진 제공 = 박선욱 시인

[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16년 10월부터 17년 초까지 광화문 일대에서는 ‘촛불집회’가 지속적으로 열렸다. 국정농단 사태를 일으킨 박근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기 위함이다. 집회는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각자의 영역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나라를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거리로 나와 촛불을 높이 치켜든 것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촛불집회는 5.18의 정신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해 7월 도서출판B에서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를 출간한 박선욱 시인도 촛불집회가 5.18을 계승한다고 말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박선욱 시인은 1959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 광주에서 5.18을 체험했다. 광주 5월에 대해 쓴 시 ‘누이야’로 1982년 제1회 실천문학 신인 공모에 당선되어 작가로 데뷔했다.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에는 5.18 민주화 운동부터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회색빛”으로 총칭할 수 있는 우리 역사에 서린 안개에 대한 고발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뉴스페이퍼는 박선욱 시인과 인터뷰를 진행하여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를 쓴 마음가짐을 자세히 들어보았다. 인터뷰에서 박선욱 시인은 불의에 맞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는 우리의 ‘의병정신’이 5.18에서 빛났으며 촛불집회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5.18 민주화 운동은 4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이때의 정신은 아직까지 남아 우리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선욱 시인은 ‘광주항쟁의 정신’으로 우리 역사에 서려있는 회색빛을 베어 넘기겠다는 마음을 담아 시를 썼다고 밝혔다.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 사진 = 육준수 기자
시집 "회색빛 베어지다". 사진 = 육준수 기자

Q. 작가님께서는 82년에 실천문학 제1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 항쟁을 직접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80년대 광주에서 어떤 체험을 하셨는지, 그때의 체험이 어떻게 시로 승화됐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A. 1980년 20대 초반의 문청이었던 저는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때였습니다. 그때 만난 5.18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우리나라의 군대가 무고한 시민을 백주에 무참히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와 공포감을 가장 먼저 느꼈습니다. 동시에, 학살의 재앙을 겪은 광주 시민이 어떻게 저토록 의연하게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찬탄과 자부심을 느꼈습니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항쟁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범법 행위도 없었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교전 현장에는 무서워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못 나가게 말린 까닭도 있었지요. 이튿날 금남로에 나가 보면 도로 한복판에서 타이어가 불타고 있거나 가드 화분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요. 총탄 자국이 나 있는 거리 곳곳을 다니면서 울분을 느꼈습니다.

아마 5월 21일쯤으로 기억됩니다만, 도청 앞의 상무관에는 계엄군의 총에 쓰러진 시신들을 거두어 태극기로 덮은 관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요. 도청 분수대 옆에는 분향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고,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국화 한 송이씩 들고 상무관에 마련된 빈소를 향해 걸어가 관 앞에서 묵념을 올렸지요. 광주항쟁 기간 동안에는 제가 살던 임동에서 도청까지, 충장로와 금남로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때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걸어다녔지요.
걸어다니면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요. 가끔 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임동까지 시민군들이 오기도 했는데(시민군들은 광주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지요), 그때에는 집집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주먹밥이나 김밥, 김치, 쌀, 라면, 빵, 우유 등 온갖 먹을 것들을 시민군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총과 밥과 빵이 한데 어울리는 기묘한 광경이었지요.

항쟁 기간 동안, 시외버스 터미널 공사장(그때는 공사가 덜 끝난 상태였는데) 부근을 지나다가 갑자기 총 소리가 들려서 시민들과 함께 터미널 지하도로 도망갔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심장이 떨렸지요.

한번은 전일빌딩 앞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동해 바다에 미 7함대가 떴다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자보를 읽던 누군가가 “미국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고 말하자, 거기 모여 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뒤, 미 7함대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를 지지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허탈함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지요.

도청 앞 분수대는 광주 시민들의 외침을 토해내는 광장이 되었는데, 그 장면 자체가 경이로웠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무렵에 내가 걷던 거리, 눈으로 바라보던 거리와 골목, 말을 건네던 사람들의 모습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내 시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총알이 빗발치는 밤하늘로 빨간 예광탄이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면서, 불 꺼진 캄캄한 방(계엄군의 표적이 될지도 모르니 초저녁만 되면 불을 꺼야 했습니다)에서 베개가 다 젖도록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어느 먼 곳에서 죄 없는 시민군들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던 것이지요.

중학교 때부터 꼬박꼬박 일기를 쓰던 습관이 있어서, 항쟁 기간에도 날마다 일기를 썼습니다. 금남로에 쓰러져 있던 가드 화분에 대해 썼고, 전날 콩 볶는 듯하던 총탄의 끔찍함에 대해서도 썼고, 그 지옥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나절 찬란하게 부서지던 햇살의 이율배반적인 눈부심에 대해서도 썼고, 대낮의 햇살 아래 부러져 있던 가로수들에 대해서도 썼지요. 그리고, 한동네에 살던 재수생 하나가 항쟁 기간 동안 시민군이 되어 총을 들고 싸우다가 피 흘리며 죽어간 일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생각하며 괴로워했고, 일기를 쓰다가 시를 끄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록해 놓은 시는 뒷날 노트에 옮겨 적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것이 시로 발전해 갔고, 쓰고 또 고치는 과정을 거쳐 데뷔작인 시 <누이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Q. 광주 항쟁이 작가가 되는 데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가요? 처음 글을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A. 광주항쟁이 저와 같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한 촉매제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전부터 이미 시를 쓰고 있었지만, 광주항쟁은 시를 쓰게 한 더욱 명확한 명분을 주었습니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을 황폐화시키는 어떤 권위 혹은 폭력과 싸워야 한다는, 시를 통해서 저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었습니다. 광주항쟁은 저에게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혹은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당위성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광주항쟁 이전부터 글을 써왔다고 밝혔습니다만, 제 기억으로는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시를 쓴 일이 최초가 아닌가 합니다. 그 이후로 꾸준히 일기를 써왔고, 일기 속에 시 비슷한 것을 끄적이면서 습작 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또, 고등학교 때는 문예부에 속해서 정기적으로 시 합평회나 시화전을 하는 등 문예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문예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 여섯 명과 의기투합해 ‘6인 사화집’ 형태의 문집(앤솔로지)을 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쓴 시가 활자화된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겪은 이후부터는 그 전까지의 느슨한 문예 취미 활동을 버림으로써 본격적이고 치열한 글쓰기에 돌입했습니다. 오랜 습작 활동 끝에 1982년 《실천문학》 제1회 신인 공모에 당선,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Q. 조진태, 이승철 시인 등과 함께 1980년대에 문학운동 ‘젊은 벗들’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젊은 벗들은 어떤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는지, 그때의 활동을 통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1982년에 제가 《실천문학》지로 등단하자, 친구인 조진태가 “박선욱이 등단한 것을 계기로, 우리도 시낭송 그룹을 만들자”라고 제안했고, 이승철과 제가 동의하여 정삼수, 장주섭, 박정열, 정봉희 등이 멤버로 참여한 가운데 ‘광주젊은벗들’이 출범했고, 그해 겨울 제1회 시낭송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광주젊은벗들’은 광주항쟁의 진실과 시대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출범한 그룹입니다. 애초부터 이 그룹은 기존의 동인지를 기반으로 하는 동인 활동과는 구별되는, 시낭송 기획실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우리는 동인지 발간을 하지 않는 대신, 활발한 시낭송 및 시화전을 개최함으로써 대중들과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당시 5공 정권은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뒤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즉,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젊은벗들’은 질식할 것 같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많은 논의 끝에 충장로의 YWCA나 YMCA를 대관하여 시낭송 행사를 개최했고, 대중들과의 긴밀한 연대와 소통을 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금남로의 가톨릭센터에서 시화전을 개최함으로써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고 나누는 데 진력했습니다. 시화전에는 홍성담, 김경주 등의 뛰어난 화가들이 참여하여 시와 그림 혹은 판화의 조화로운 만남을 통해 역동성을 부여했습니다.

‘광주젊은벗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인지 형식의 진지전이 아닌, 시낭송 기획실 체제의 게릴라전의 양상을 띠며 수시로 대중들과의 만남과 소통을 다져나가며 시의 신비화와 절대화를 배격하는 대신, 누구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시를 쓰고, 나누는 보편성의 영역을 넓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저는 그때, 글자 그대로 광주의 젊은 벗들과 시낭송 및 시화전을 기획하고 행사를 개최하는 주축 멤버로서 “시를 통해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Q. 83년 이후 광주를 떠나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한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 소설가와 어떤 인연을 맺고 계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A.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1982년 《실천문학》지로 등단한 뒤 ‘광주젊은벗들’ 시낭송 그룹을 이끌면서 문학의 신비화를 타파하는 한편, 시를 통해 광주항쟁의 진실을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시인 박몽구 형의 소개로 태창문화사라는 서울 마포 소재의 출판사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광주시 궁동 소재의 한 맥주집에서 소설가 황석영 선생, 장만철(훗날의 영화감독 장선우) 형 등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서울의 출판사에 취직되어 곧 떠난다는 얘기를 했더니 황 선생이 대뜸 “너, 출세하러 서울로 가는 거냐?”며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는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광주의 문화운동권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분이 생각하기로는 이제 갓 등단한 제가 광주 문화운동권의 말석이라도 지키며 활동가로 일해야 하지 않느냐는 선의를 가지고 선배로서 꾸지람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저는 출세하러 가는 것이 아닌, 호구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울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진심을 몰라주고 덮어놓고 호통부터 치고 보는 태도에 야속함을 느낀 억울함 비슷한 감정으로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 무렵의 황 선생은 광주 문화운동권의 거의 모든 이들과 형님, 아우, 하면서 폭넓고 깊은 교유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분의 질타는 운동의 대의를 향한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광주 항쟁은 매 시대마다 호명되곤 해왔습니다. 지금 시대에 광주항쟁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A. 광주항쟁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억누르는 폭압, 민주화를 짓밟는 독재정권에 맞선 민중의 저항정신임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광주항쟁의 피 흘림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1987년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으며, 2016년~2017년 촛불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광주항쟁은 한국 현대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5.18 정신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5.18 정신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이 땅의 시민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5.18은 1979년의 부마항쟁, 이승만 독재에 항거했던 4.19혁명과 같은 맥락을 지닌 청년학생과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그 원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좀 더 멀리 살펴보자면, 역사의 고비마다 의병 형태로 나타난 민중의 저항정신이 그 원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94년의 동학혁명은 민중의 저항정신이 집대성된 하나의 원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연원에 의거해서 말하자면, 우리 겨레는 민족 내부 모순의 부당한 압력 및 폭압적인 상황에 대항해서, 혹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 상황에 맞서 대항해서 맥맥히 싸워온 저항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5.18은 어느 날 갑자기 평지돌출한 사태가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의 고귀한 가치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워온 투쟁의 유전자가 새겨진 저항정신의 상징으로 현대사를 장식한 것입니다.

10.26으로 유신독재의 원흉인 박정희가 제거된 뒤,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며 군 내부에서 파벌을 형성해온 ‘하나회’ 출신 군인들인 전두환, 노태우 등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12.12사태를 촉발시켜 군권을 장악하고 정권을 찬탈한 뒤 신군부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5.17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던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국회를 해산하고 김대중, 김영삼 등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정치인들을 구금, 가택연금시키는 등 초헌법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 10만여 명은 서울역 광장에 모여 민주 회복을 외치다가 자진 해산했지만, 광주에서는 전남대 학생들의 주도 하에 도청 앞에서 평화로운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운명의 날인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도열한 무장한 계엄군들이 등교하는 학생들을 붙잡아 곤봉으로 내려치면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무력 진압의 서막이 시작되었습니다. 계엄군들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기어이 맨손뿐인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면서 광주학살이 시작되었고,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사망이 늘어나면서 시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지키고자 인근 파출소와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해 무장을 갖춰 시민군이 형성되었습니다.

시민군에 의한 해방구가 된 광주는 평온함과 일상을 회복했고, 모든 것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범죄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물이 일본을 거쳐 독일에 방송됨으로써 유럽 전역과 미국을 비롯, 세계 곳곳에 널리 퍼졌으며, 외신들은 광주 시민들의 도덕성과 저항 정신을 높게 평가하며 칭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월 27일, 물러났던 계엄군들이 더욱 막강한 화력과 지원병력을 갖추고 시민군들이 마지막까지 사수했던 광주 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10일 밤 10일 낮의 항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짐승만도 못한 야만의 폭거를 자행한 신군부는 그 이후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묘사하며 야유하고 질타했지만, 김영삼 정권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주역들은 내란수괴 및 학살의 주범으로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신군부가 작성한 비밀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그들 자신이 정권 찬탈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얼마나 공들여 자신들의 행적을 미화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꼭 맞는 대목이라서 오히려 놀랄 정도입니다.

Q. 5.18 외에도 많은 국가적 상처들을 시로 다루셨습니다. 한국전쟁과 세월호 참사 등인데요. 작가님께서는 세월호 참사 시국선언과 촛불혁명 현장에도 참여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적 상처, 혹은 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5.18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시는지요.

A.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많은 국가적 참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동족 간에 벌어진 가장 비극적인 참사이며, 이 전쟁 동안(혹은 그 이후)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그것이 북측에 의한 것이건 남측에 의한 것이건 모두 씻을 수 없는 참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를 비탄에 떨게 했던 비극이었습니다. 세월호 속에 갇혀 있던 수많은 학생들과 민간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박근혜를 비롯한 국정농단의 주역들은 그저 수수방관만 하다 기어이 죄 없는 수백 명의 목숨을 수장시키고야 말았습니다.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이 일이 있고 나서 분연히 시국선언을 했고, 저 또한 그 일원이 되어 동참했습니다. 또한,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광화문에서 진행된 거대한 촛불의 대열에도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동참했습니다.

이와 같은 국가적 참사는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정권과 위정자들은 반드시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광화문의 촛불혁명은 우리나라의 유구한 민초들의 의병정신이 맥맥하게 이어진 결과로 나타난 아름다운 저항정신의 표상입니다. 그것은 1894년 동학혁명으로 분출된 백성들의 분노가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오늘에 다시 나타난 것이며, 가까운 현대사에서는 4.19혁명과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거룩한 분노로 표출된 것으로서 촛불혁명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문학이 사회참여와 어떻게 이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A. 우리는 모두 이 땅을 딛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의 꿈과 일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문학은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문학 속에서 노래하는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인 공중에 붕 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실 사회는 우리의 상상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만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문학에서도 자연스럽게 사회참여의 목소리가 그 속에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당대 사회의 현상과 그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을 회피하고 어떤 추상적인 세계나 몽환적인 현상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작가의 실존과 의식이 투영되게 마련입니다. 저는 문학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비극이 발생하는 데도 그것을 외면하는 태도는 참된 문학인의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타자와의 공감의 폭이 넓을 때 그 문학의 가치는 더 커지고 그 지평은 더 넓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사회참여는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념적 당위성만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관심, 사회라는 토대 위에서 함께 숨 쉬는 이웃이자 친구인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요컨대, 보편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사회 구조적 모순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자세가 문학인에게 절실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Q.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하여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A.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에 대해서는 분노보다는 허탈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지금이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신독재 시절이나 5공 정부 시절도 아닌 21세기에 아직도 블랙리스트와 같은 뻔한 수법으로 문학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몰상식이 백주에 벌어지고 있어서 그저 입맛이 썼습니다. 이런 추태는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Q. 현재 작가님께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를 쓰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A. 낮고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비록 힘든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망정 목표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미래를 다져나가는 삶을, 그러한 표상을 시 속에서 그려나가고자 합니다.

Q. 시집의 대표작이라 생각하는 시 한 편 추천해주시면 합니다. 간략한 설명을 곁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대표작일지는 모르겠지만, 시집 속에서 딱 한 편만 꼽아 본다면 시 〈회색빛 베어지다〉를 내놓겠습니다. 이 시에는 두 가지 대립적 요소가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으로 표상되는 ‘회색빛’, 그리고 그 어둠의 세력을 베어내는 초록 잎사귀입니다. 지난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봄에 우리가 함께 동참했던 촛불혁명을 보더라도, 개개인은 약하지만 그 개개인이 한데 뭉쳐 연대하고 어깨를 겯게 될 때 생각지도 못할 파급력이 발생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초록 잎사귀는 단 한 번만으로 어둠의 세력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센 추위와 눈바람 속에서 꾸준히 뭉치고 연대하고 입을 모아 노래를 함으로써 서서히 어둠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는 약하나 둘이 모이면 희망이 생기고 셋이 모이면 힘이 생기는 이치를 자연에서 배웁니다. 비록 연약하게 생긴 초록 잎새일지라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릴 때마다 단결해 어둠을 베어내는 놀라운 일, 연약한 것들의 연대와 역동성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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