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쓰고 싶은 걸 쓰라는 청탁. 특정한 작품론/작가론을 쓰라는 것보다 어렵다. 자유는 원래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허용된 글쓰기의 자유를 활용해 창작과 비평에 대해 삐딱한 한 비평가가 느끼는 주관적 단상을 적는다.

1. 순문학과 기타 문학

얼마 전에 한국문학 작품번역의 범주를 다시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했었다. 놀랐던 사실. 여전히 문학의 범주를 순문학/본격소설과 기타문학/장르 소설로 나눈다는 것. 한국문학사에서 언제부터 소위 ‘순문학’ 혹은 ‘본격문학’과 기타 문학을 날카롭게 구분했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런 구분은 납득하기 힘들다. 굳이 구분하자면 ‘좋은’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이 있을 뿐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문학의 ‘정전’(正典 canon)을 정하는가. 그런 질문에 대한 논쟁만이 가능하다. 예컨대 정유정, 김탁환의 소설들, 일본문학의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 미국문학의 스티븐 킹은 어디에 속하는가. 종종 ‘순문학’을 대표하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어떤가. 그는 종종 자신의 문학적 원류로 F.S.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챈들러를 동시에 꼽는다. 무라카미의 작품은 기존의 범주구분을 무너뜨린 ‘하이브리드’ 소설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려면 이런 하이브리드적 속성을 고려해야 한다.

한 사회의 문학이 풍부해지려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의 작품이 축적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장르문학 작가로 ‘폄하’되는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서사나 인물 형상화는 웬만한 ‘순문학’ 작품보다 뛰어나다. 혹시 은연중에 자기는 ‘순문학’ 작가니까 기타 ‘장르문학’ 작가보다 우월하다는 근거 없는 생각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SF 문학을 대상으로 한 평론집인 『SF는 공상하지 않는다』(복도훈) 같은 작업은 뜻깊다. 비평도 ‘좋은’ 비평과 그렇지 않은 비평이 있을 뿐이다.

2. 픽션과 논픽션

“조선시대 행장(죽은 이의 언행을 기록한 문장)의 전통까지 겹쳐져서일까. 번듯하게 한자리 차지했으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고,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이며, 그런 자리 하나 못 차지해본 사람은 바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방식으로 내면적 깊이를 제거해버리고 나니, 우리 사회엔 제대로 된 자서전, 평전, 구술 문화가 없다.”(한국일보) 이 구절을 읽고 든 질문. “내면적 깊이”를 표현하는 “자서전, 평전, 구술”은 문학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예컨대 미국의 큰 서점에 가면 문학 서적은 픽션(fiction)과 논픽션(non-fiction)으로 나뉜다. 픽션 서가에는 ‘고전’ 작품과 함께 방금 출간된 다양한 서브장르 소설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논픽션 서가에는 다양한 “내면적 깊이”를 표현한 책들이 독자를 기다린다. 물론 각 나라의 문화상황이나 독서 시장이 다르기에 단순 비교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한국문학의 서가에는 근대문학의 케케묵은 분류의 결과물인 소설, 시, 극(드라마)의 작품들만 전시되어야 하는가. 여기에는 “내면적 깊이”를 가능케 하는 개인주의 전통과 사유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문화의 어떤 결핍이 배경으로 작용하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근대문학의 적자라고 하는 (장편)소설도 적어도 유럽문학의 경우에는 시민계급의 생활과 “내면”의 표현이었기에 위에서 언급한 문제는 단지 픽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가상공간, 특히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내적 표현의 글들에 주목한다. 문학 범주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재구성된다. 어떤 글쓰기가 문학에 포함되느냐는 문제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소설도 글쓰기의 혼종 과정이 낳은 결과물이다. ‘순소설’은 없다.

3. 해설과 비평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지금 한국비평계에는 두 가지 이해할 수 없는 통념이 작용한다. 첫째, 해설과 비평을 동일시하는 것. 둘째, 작품분석만을 비평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작품물신주의. 결론을 당겨 말하면 둘 모두 비평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든다. 작품 '해설'은 비평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다시 영미문학을 예로 들자면 영미문학출판계에서 고전적인 장편소설의 경우든 중단편 소설집이든 그 작품을 현재적 시각에서 다시 평가하거나 소개가 필요한 경우는 ‘해설’을 단다. 현대독자와 고전의 시공간적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 작품의 경우 작품 해설은 없다. 종종 해설로 오해하는 '실제비평'(practical criticism)은 좁은 의미의 작품 '해설'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비평과 이론비평(theoretical criticism)은 칼로 무 자르듯이 나뉘지 않는다. 모든 실제비평은 비평가가 그것을 의식하든 않든 이론비평을 전제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실제비평은 작품 앞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작품의 논리와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이해'만 하려는 내재주의 비평이 아니다. 오해 없기를. 내재주의 비평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비평의 전부는 아니란 뜻이다. 이와 관련해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조언을 인용해둘 만하다. “한 개별 작가만에 대한 전문적 연구는—아무리 능숙하게 추구된다 하더라도— 바로 그 구조상 왜곡을 나을 수밖에 없는데, 즉 실제로는 인위적으로 고립시킨 것에 불과한 것을 전체로 투사하는 총체성의 환각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평은 모든 형태의 “총체성의 환각”에 거침없는 “불평”을 퍼붓는다. “이 시대의 영웅은 스탈린도 김일성도 아니고 가장 불평을 잘 하는 사람이다”(김수영). 이 시대 비평에는 “불평”이 너무 적다.  

4. 비평과 작품물신주의

작품(텍스트)과 작품 밖(컨텍스트)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작품'만이 비평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작품물신주의'(테리 이글턴)이다. 작품물신주의는 문학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비평은 작품물신주의가 아니다. 역시 오해 없기를. 작품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히 작품은 비평의 핵심대상이다. 다만, 작품만이 비평의 대상이라고 보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문학비평에는 “총체성의 환각”의 결과물인, 작품만이 비평의 대상이고 작품 밖의 것들은 비평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최근에 ‘작품비평집’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지역문학의 여러 쟁점을 천착하면서 중앙-지방으로 위계화된 한국 비평장이 지닌 문제들을 꼼꼼하게 천착하는 평론집인 『로컬리티라는 환영』(박형준)을 흥미롭게 읽었다. 작품물신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은 작품에 대한 ‘내재적’(sic!) 비평이 별로 없기에 ‘본격’ 비평집이 못될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생산하듯이, 비평은 작품을 매개로한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고유한 인식을 생산한다. 비평은 창작의 종속변수, 혹은 창작의 노예가 아니다. 창작의 노예가 되는 걸 비평의 겸허함이라고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작가나 비평가는 다른 방식으로 미지의 것을 향한 “사유의 모험”(D.H. 로런스)을 감행하는, 긴장된 관계의 동반자다. 그 동반의 여정에 선험적으로 우월한 존재는 없다. 작품 앞에 ‘내재적’으로 머리를 조아린다고 겸허한 비평이 되는 게 아니다. 창작이든 비평이든 겸허함은 자기가 표현하는 인식의 한계에 대한 성찰에서만 가능하다. 비평은 작품에 대한 정서적 감화나 동조가 아니다. 비평은 새로운 감각과 지성의 표현인 작품에 맞서고 대화한다. 지성이 없거나 부족한 창작이 좋은 작품이 못 되듯이, 비판적 지성이 빠진 비평은 하나마나한 해설에 그치기 십상이다.

비평이 작품 앞에 겸허하라는 말뜻은 무조건 작품을 찬양하라는 뜻이 아니다. 작품이 하는 말을, 작품이 표현하는 고유한 감각과 인식을 찬찬히 새겨듣고, 그 의미와 한계를 사유하고, 그에 대한 비평가 자신의 견해와 인식을 밝히라는 뜻이다. 작품과 지성적 대화를 나누라는 뜻이다. 내가 이해하는 '공감의 비평'이다. '공감의 비평'이라는 말뜻도 정서적 친화감의 표현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강하게 말하면 새로운 인식, 그만의 지성적 사유를 표현하지 못하는 비평은 작품 '해설'일 수는 있어도 비평은 아니다. 이런 나의 주관적 “불평”은 비평적 공론 장에서 논의되고 그 타당성이 검증되어야 한다. 다만, ‘읽기의 엄정함’ 운운하는 듣기 좋은 말로 비평이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인식의 생산과 문학적 지성의 표현이라는 과제를 덮어서는 곤란하다.

 

오길영
문학평론가.
충남대학교 영문과 교수. 주요 저서로는 평론집 『힘의 포획』(2015), 연구서 『포스트미메시스 문학이론』(2018), 『세계문학공간의 조이스와 한국문학』(2013),『이론과 이론기계』(2008) 등이 있다. ogyjoyce@empas.com

※ 위 평론은 웹진 "문화 다"에서 청탁한 작품으로, 웹진 문화 다와 공동으로 게시하였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vilage&ps_boid=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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