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앤이라고 부르시겠다면 끝에 ‘E’가 붙는 앤으로 불러 주세요.”

“끝에 E가 붙고 안 붙고가 무슨 차이가 있는데?” 마릴라가 또 한 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오,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걸요. 훨씬 근사해 보이잖아요. 어떤 이름이 발음될 때는 프린트한 것처럼 머릿속에 글자가 떠오르지 않나요? 전 그래요. ANN은 그저 그런 이름이지만, ANNE는 뭔가 차별화돼 보이잖아요. E가 붙은 앤으로 불러 주신다면 코딜리어라고 부르지 않으셔도 제가 참아 볼게요.”

- "빨간머리앤" 중 일부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에 E를 붙여 불러 달라고 요청하고, E가 붙은 앤으로 부른다면 ‘참아보겠다’고 말하는 당돌하고 독특한 소녀. 소설 “빨강머리 앤” 속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장면이다. “빨강머리 앤”은 소녀 앤이 커스버트 남매의 집에 입양되어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로,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 집필한 이후 무수히 많은 독자에게 읽히며 사랑받아왔다.

빨강머리 앤 표지
빨강머리 앤 표지

풍부한 상상력을 갖춘 수다쟁이 앤이 오디오북으로 생명력을 뽐내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지난 해 11월 연극배우의 음성으로 낭독된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 - 초록지붕집 이야기"를 종이책과 함께 내놓았다. 원고지로 1700매를 넘는 책을 14시간 분량으로 낭독한 대작업으로, 이지혜 연극배우가 주인공 앤과 등장인물을 연기했다. 이지혜 배우는 정확한 전달력을 지닌 발음과 리듬으로 “빨강머리 앤”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2권인 "에이번리 이야기"가 올해 3월 31일 출간되며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커뮤니케이션북스는 다양한 이론서를 내는 출판사로, 미디어나 문화콘텐츠를 전공한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나온 책을 교재로 공부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론서 이외에도 다양하고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2014년부터는 적극적으로 오디오북 제작에 뛰어들며 다양한 명작을 오디오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엄진섭 본부장 [사진 = 뉴스페이퍼]
엄진섭 본부장 [사진 = 뉴스페이퍼]

뉴스페이퍼에서는 오디오북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커뮤니케이션북스 엄진섭 독자사업본부 본부장을 만나 오디오북 시장과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오디오북에 대해 들어보았다.

- “오디오북은 독서 경험의 확대” 책 한 권을 온전히 담는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오디오북

그동안 국내의 오디오북 시장은 규모가 크지 않아 미미한 것처럼 여겨졌고 제대로 된 통계 조사도 이뤄진 일이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성장을 해왔던 오디오북 시장은 2018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대형플랫폼인 네이버가 18년 8월 오디오 플랫폼인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유료 오디오북 판매를 시작했으며, 여러 플랫폼에서 오디오북 서비스를 게시한 것이다. 또한 AI스피커의 보급과 함께 청각 콘텐츠의 수요가 증가하며 오디오북 시장은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엄진섭 본부장은 오디오북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기존의 시각 중심 커뮤니케이션에서, 들으면서 동시에 다른 것이 가능한 청각 중심의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디오북 레코딩 현장 사진을 벽면에 모아놨다 [사진 = 뉴스페이퍼]
오디오북 레코딩 현장 사진을 벽면에 모아놨다 [사진 = 뉴스페이퍼]

커뮤니케이션북스가 본격적으로 오디오북을 제작한 것은 2014년부터다. 2014년 이후 꾸준히 오디오북을 만들어 보유하고 있는 종수만 1,300종을 넘으며, 성북구에 위치한 커뮤니케이션북스 사옥 지하에는 스튜디오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다. 커뮤니케이션북스 사옥의 나선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오디오북 제작에 참여한 배우와 성우들의 사인과 기념사진으로 꾸며져 있다.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사옥 지하 스튜디오 [사진 = 뉴스페이퍼]
커뮤니케이션북스의 사옥 지하 스튜디오 [사진 = 뉴스페이퍼]

엄진섭 본부장은 오디오북을 듣는 것은 “독서경험의 확대”이며 또 다른 형태의 독서라고 강조했다. 텍스트에 있는 정보를 낭독자의 목소리 톤, 느낌과 감정을 통해 책에 더욱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엄진섭 본부장은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와닿지 않아서”이며, 낭독자의 목소리를 통해 이 간격을 매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텍스트의 글자와 독자 사이의 간격을 오디오북이 줄여주며 일종의 징검다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엄진섭 본부장은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제가 좋아하는 나레이터 중 강신일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에서 낭독한 책을 듣다 보면 나도 독립운동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솟아오른다. 그런데 만약 그 작품을 텍스트로 읽으라고 했다면 읽었을까. 아마 안 읽었을 것 같다.”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오디오북은 독서경험을 온전히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하기에,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책 전체를 읽어주는 오디오북을 제작한다. 오디오북 시장에는 책의 내용을 요약해 만든 요약본이 많지만, 독자들이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은 경험을 제공하고자 압축이나 요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0인의 배우 우리문학을 읽다 홍보물
100인의 배우 우리문학을 읽다 홍보물

또한 독자에게 오디오북을 듣는 체험을 온전히 전달하고자 낭독자를 선정하는데에도 독자를 고려하여 진행하고 있다.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에는 최민식, 문소리, 정진영, 예지원 등 유명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는 문학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을 낭독자로 모신 것이다.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는 배우의 이미지와 목소리에 맞는 작품을 편집자가 매칭해 작업을 진행했다.

“커뮤니케이션 이해 총서”는 뉴미디어, 미디어 콘텐츠, 언론, 마케팅 등에 대한 이론서로,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지식을 전달하고자 국내 전문가 필진들이 대거 참여한 시리즈다.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이해 총서를 전문가들의 목소리로 된 오디오북으로 제작하여, 학생이나 연구자, 실무자들이 마치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기획했다. 엄진섭 본부장은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작품과 어울리는 분들과 작업을 하고 있으며, 오디오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좋은 결과를 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새로이 내놓는 오디오북으로는 “세계환상문학걸작선”이 있다. “세계환상문학걸작선”은 팟빵을 통해 서비스하고 있는데 오스카 와일드, 프란츠 카프카, 애드가 앨런 포, 너새니얼 호손 등의 작품을 대학로의 베테랑 배우들이 대거 참여하여 낭독했다. 환상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해 대학로 배우들이 마치 드라마처럼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며 독자에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밖에 “100인의 배우, 세계 문학을 읽다”가 녹음을 진행 중이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런칭 준비 중이다. “100인의 배우, 세계 문학을 읽다”는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로, 명품 배우들의 낭독과 연기를 통해 독서경험을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중견 배우들이 대거 참여하여 정통 셰익스피어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려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엄진섭 본부장은 오디오북의 독서경험이 퍼지고 있으며 청독회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직 오디오북 시장 초기이기 때문에 많은 분이 오디오북을 경험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더 많은 분들이 오디오북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세계환상문학걸작선은 15~30분으로 구성되어 짧게 듣고 이야기하는 데 적합하다. 새로운 독서경험을 해보시길 권한다.”라고 전했다.

- 커뮤니케이션북스, 독창성과 전문성, 소통성으로 접근

커뮤니케이션북스는 미디어, 언론, 콘텐츠 분야에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책을 출간해온 중견 출판사다. 2019년 5월 현재 6천 5백 종을 넘는 책을 출판했으며, 브랜드로는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전문의 커뮤니케이션북스(컴북스), 고전과 한국문학 전문의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 평생교육 전문의 학이시습, 일반교양과 자서전 전문의 지식공작소 등이 있다.

인터뷰 중인 엄진섭 본부장 [사진 = 뉴스페이퍼]
인터뷰 중인 엄진섭 본부장 [사진 = 뉴스페이퍼]

엄진섭 본부장은 커뮤니케이션북스가 시장성이나 상업성이 아니라 독창성과 전문성, 소통성을 출간 기준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이 기준에만 적합하다면 시장과는 상관 없이 책을 내고, 한번 펴낸 책은 판매량이 적더라도 절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진섭 본부장은 “각각의 브랜드가 자기 분야를 갖추고, 다품종 소량판매를 하고 있다. 이것이 출판사의 사명이라 생각해서 가능한 한 많은 책을 내려고 노력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커뮤니케이션북스는 다양한 포맷에 대한 실험과 시도를 해왔고, 그 중 하나가 오디오북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북스는 리딩패킷 서비스, 큰글씨책 발간, 반값교재 서비스 등 일반적으로 잘 하지 않는 시도를 하며 독자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2009년부터 실시한 리딩패킷 서비스는 강단에 선 교육자를 위한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한 권의 책을 온전히 교재로 사용하기보다 여러 책의 일정 부분만을 교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리딩패킷 서비스를 통해 각각의 책의 챕터를 하나로 조합하여 또 다른 교재를 만들 수 있다. 2013년부터는 저시력자를 위한 큰글씨책을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이밖에도 대학생을 위한 저렴한 보급판 도서를 만드는 ‘반값교재’ 서비스 등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엄진섭 본부장은 “종이책은 굉장히 효과적이고 강력하고 효율적인 미디어지만, 기술 환경과 미디어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바뀌고 있다. 지식을 전달하는 출판사의 책무를 생각해봤을 때 당연히 다양한 채널이나 미디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렇기에 오디오북을 비롯한 여러 포맷을 시도하고 또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려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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