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1960년대 문학계에서는 이른바 '순수참여논쟁'이 벌어졌다. 작가들 간에 문학이 순수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된 것이다. 논쟁은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문학이 오롯한 순수성을 확보해야 하는가, 정치참여를 지향해야 하는가는 아직도 문인들의 논쟁거리다. 

이런 와중에 시인이자 평론가,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맹문재 평론가가 푸른사상 출판사에서 정치시 평론집 “시와 정치”를 펴냈다. 맹문재 평론가는 60년대 순수참여논쟁에서 어느 하나가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문학은 순수성이 없다.’는 부정적 시선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맹문재 평론가는 “순수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시와 정치”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시인은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시 평론집 "시와 정치". 사진 = 육준수 기자
정치시 평론집 "시와 정치". 사진 = 육준수 기자

시에서의 ‘정치’란 무엇일까? 맹문재 평론가는 그동안 시에서 ‘정치’란 말은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 회복의 의미로 통용됐다고 설명했다. 87년 항쟁과 2016~17년의 촛불혁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지향해야만 정치적 시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맹문재 평론가는 신념이나 목적을 가지고 쓴 시가 바로 정치적인 시라고 말한다. 노동자의 권리 신장과 친일청산 등의 역사의식, 통일을 외치는 모든 시가 정치시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와 정치”는 우리 사회 속 모순을 담은 문학 작품들을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시’가 더욱 더 정치적이고 사회참여적 성격을 띠어야한다고 강조한다. 1부에서는 지난 정권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퇴보’를 지적하며 한국사회에서 정치시가 필요한 이유를 말한다. 2부에서는 김남주의 ‘학살’ 연작시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확인하며, 친일문인기념문학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등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말한다. 3부에서는 노동자 시인들이 쓴 시를 통해 노동자의 삶에 주목하고 디지털 시대의 환경 변화 속 노동시가 가야 할 길을 말한다. 4부에서는 매카시즘의 원인을 남북 분단에 두고 통일과 반전 의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 공감과 연대의 힘, 노동자를 위한 노동시가 필요한 이유 

정치적 시의 주요한 갈래로 ‘노동시’를 언급하며, 맹문재 평론가는 “노동시는 도시 노동자의 수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기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박노해’라는 시인이 등장하며 쓰인 말”이라고 설명했다. 박노해 시인의 등장 이전까지 시인으로 데뷔하는 것은 유명 시인의 제자로 들어가 추천을 받아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노해 시인의 등장 이후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맹문재 시인은 노동시의 등장이 시를 통해 수용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알게 했으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인식해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맹문재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맹문재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자유를 옹호하는 체제이고, 공산주의는 극단적인 평등을 옹호하는 체제”라며 맹문재 평론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이 유리한 정책을 펼친다고 이야기했다. 이때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맹문재 평론가는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적 측면이 갖지 못한 자들의 박탈감을 해소시켜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현 사회를 진단했다. 때문에 과거에 비교해 전체적인 민주주의의 수준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약한 자, 가지지 못한 자들이 느끼는 ‘자유의 질’은 미흡한 듯 보인다고 맹문재 평론가는 이야기했다. 큰 관점에서 세상이 나아졌다 생각할 수 있지만 어려움을 느끼는 노동자 개개인의 삶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더해 노동환경까지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공장 형태의 노동이 주를 이루던 박노해 시절과 달리 현재에는 노동의 형태가 다양하다.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업종의 점주들 등 영세한 사업자들은 자본가라고 해야 할지, 노동자라고 해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다. 맹문재 평론가는 이를 “적과 아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며 직업분포가 다양화, 전문화, 복잡화되었기 때문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맹문재 평론가는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정치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며, 노동 운동 역시 전혀 다른 양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의 노동자들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하여 많은 정보와 지식, 기술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맹문재 평론가는 자본가에게 우리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앞으로는 ‘노동자들이 명령만 받아서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 창의성을 갖고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가 직접 생산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 연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를 쓰는 이들의 태도 역시 바뀌어 더욱 더 적극적으로 목적의식을 부각해야 한다고 맹문재 평론가는 강조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노동시’가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의사전달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맹문재 평론가는 구체적 사례에 대한 시를 쓰면 직접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 더 깊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한 시인이 어느 회사가 임금을 체불한 사건을 시로 써서 이슈화가 된다면 노동자가 월급을 받을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넓게 볼 때 그 노동자가 임금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과연 사장 개인이 악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 맹문재 평론가는 임금 체불 등의 현상을 불러오는 것은 개개인의 타락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시인들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 올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한 때... 분단 해소로 매카시즘 극복하고 친일문인기념문학상 폐지 달성해야 

맹문재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맹문재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맹문재 평론가는 현 시대의 큰 문제로 분단 문제와 친일문인기념문학상을 꼽으며 올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역사의식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반석을 밟고 서 있는지 알게 해주며, 삶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먼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상위 명령 하달식 군대 문화를 못 벗어나고 있다.”며 맹문재 평론가는 이것이 분단에서 기인한 문제라고 해석했다. 사상이나 언론, 집회 등이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사용자와 노동자 간에 의사충돌이 일어났을 때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다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아직도 “빨갱이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가 터져 나오며, 놀랍게도 이 비논리가 가장 실효성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맹문재 평론가는 우리 사회 모든 모순의 근본을 ‘분단’으로 본다며 “우리가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민족적 차원, 영토회복의 차원도 있겠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우리가 좀 더 비판할 수 있고 사회 연혁을 다양화할 수 있고 민주적 절차를 할 수 있는 미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분단을 꼭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맹문재 평론가는 “분단 극복, 통일을 원치 않는 것은 기득권층”이며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계층적인 이익을 손해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일문인기념문학상 또한 기득권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니까 친일에 대한 상을 받는 것”은 현 상황에 대한 “극복의 의지가 없는 것”으이기 때문이다. 맹문재 평론가는 친일문인기념문학상의 폐지는 우리 사회가 더욱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갖고 사유하여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에서 목적의식만이 부각된다면 프로파간다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목적의식이 명확한 시라고 해서 전부 선전의 도구인 것은 아니다. 맹문재 평론가는 시인이 정치의식이나 목적의식을 가진다면 어떤 문제의 표면 뿐 아니라 본질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되며, 이는 곧 세계를 넓게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또한 세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비유를 할 때에도 시인의 철학을 만드는 표현을 불러와 더 깊고 형상화된 비유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얕을 때 미학의 형식도 감각에 머문다는 것이다.  

맹문재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맹문재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인터뷰를 마치며 맹문재 평론가는 시인이 사회나 노동자와 연대하고 정치성을 갖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생각의 범주를 넓혀나가는 일”이고 정의했다. 이것은 시가 일부 정치 세력을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가 정치적이되 정치세력을 위해 쓰여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게 맹문재 평론가의 생각이다. 세계에 대해 뚜렷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맹문재 평론가가 지향하는 ‘정치시’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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