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복귀 사태] 작품 절도를 한 작가의 부활 - 백건우(작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신경숙 복귀 사태] 작품 절도를 한 작가의 부활 - 백건우(작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2015년 한국 문학계의 화두였던 표절 사건의 당사자인 신경숙 소설가가 칩거 4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다. 창비는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에 신경숙 소설가의 중편 소설이 수록된다고 밝혔다. 본 칼럼은 이러한 신경숙의 복귀에 따른 칼럼이다. 

'신경숙 표절 사태'란? 2015년 6월 이응준 소설가가 허핑턴포스트에 신경숙 소설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시작됐다. 신경숙 소설가와 창비는 표절을 부인했으나 이는 논란을 키우는 불씨를 제공한다.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은 곧 대형 출판사가 특정 작가를 '스타화'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이나 비판을 모두 무용하게 만든다는 '문단권력 비판'으로 이어졌다.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폐쇄적 공동체, 수직적 구조, 특정 작가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 등이 크게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한국문학장에 대안 작업이나 매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뉴스페이퍼 = 백건우 작가] 가난한 백성인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에 갇혀 노역을 한다. 그가 빈민으로 살며 마땅한 직업도 없이 부랑자로 떠돌아다니면서도 누나와 일곱 명 조카의 생계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그가 빵을 훔친 죄로 잡혔지만, 그 전에 밀렵을 비롯해 몇 가지 경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까지 추가되 무려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법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더 가혹하다. 장발장이 탈옥한 이유도 누나와 일곱 명 조카의 생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탈옥하다 잡혀 무려 19년이나 감옥에 갇혔다 나오니 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부르주아 정부는 빈민의 삶을 파괴한다. 이 이야기는 단지 19세기 프랑스의 경우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훔친 사람은 감옥에 갇힌다. 그는 ‘절도죄’를 저질렀고, 현행법에서 절도는 구속 사유에 해당한다. 사유재산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법해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반면 글을 훔친 경우는 어떨까. 장관 청문회에서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경우라도 그들은 비난을 받을지언정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글을 훔친 정도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부르주아 사법부는 판단하는 것이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학위 논문 표절은 장관, 국회의원, 목사 등 소위 지배계급에 속한 자들이 저지르는 일상적 범죄이기도 하다. 글을 훔치는 행위는 ‘지식 범죄’에 들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따라서 가난한-사람들이 저지를 수 없는 ‘고급한’ 범죄에 해당한다. 돈과 권력, 지식이 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고급한’ 범죄는 적당히 눈감아주고, 죄도 싼값으로 치른다. 

최근 한 작가가 몇 년 전 드러난 작품 절도 행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소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가의 작품 절도 행위에 관해서는 이미 이응준 작가가 구체적으로 밝혔기에(링크) 여기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이응준 작가는 작품 절도를 하는 작가, 특히 ‘베스트셀러 작가'로 널리 알려진 작가와 그 작가를 두둔하는 문학계 권력집단의 태도를 보면서 ‘문학의 타락'이라고 말했다. 작품 절도를 한 작가 자신이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다'다.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문장이 똑같다?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쓴 문장이 다른 작품에서 몰래 가져온 것은 맞다고 인정한다?

이런 태도는 언론 기사에서 자주 보는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아내를 때렸지만 폭행은 아니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갔지만 도둑은 아니다'처럼 눈부시게 화려한 ‘인지부조화'의 자기모순이 폭발하는 주장이다. 한국 문단이 언제부터 이렇게 양아치, 불량배, 범죄자들이 사용하는 말투와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고, 문단의 말석에 이름을 올린 필자를 포함해 소위 ‘문학한다'는 다수의 사람이 갖는 참담하고 비루한 자괴는 이루 말하기 어렵다. 

문학은 글이고, 글은 곧 마음이며, 마음은 곧 양심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창작의 목소리를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톨스토이처럼만 쓸 수는 없다. 애드가 앨런 포처럼 쓸 수도 있고, 러브 크래프트처럼 쓸 수도 있으며, 마광수처럼 쓸 수도 있다. 난도질 영화(Slasher Movie)를 찍는 감독이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처럼, 작품 속 인물이 아무리 악랄하고 잔인해도 작품을 쓰는 작가의 본성이 작품 속 주인공일 수 없는 것이다. 창작하는 사람은 내면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는다. 이 말은,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오로지 자기의 글을 쓰고 있는지-창작을 하고 있는지-아니면 다른 사람의 글을 몰래 가져다 베끼고 있는지 누구보다 바로 자기 자신이 가장 적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을 하겠다고 습작해 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조금이라도 가져와 적당히 윤색해서 아무도 모를 거라고 확신한다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이 한 행위를 이미 비난하고 있고, 스스로 양심이 찔려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읽은 기억은 없지만,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내면의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리하는 행위다. 작가라는 자신과 도둑질을 한 범죄자인 자신이 같은 사람인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 두 가지 모습이 자신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인지부조화 상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표절 작가가 2015년 이후 지금까지 어떤 발언도 하지 않다가, 한국문학의 최고 권위지로 알려진 한 계간지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소설이 아닌 ‘입장문’을 따로 썼는데, 그 내용이 어처구니없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훔친 이 작가는, ‘입장문’에서 ‘자기반성’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지난 4년이 ‘길고 쓰라린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그 시간이 왜 길고 쓰라렸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료 작가와 독자에게 염려를 끼친 것이 ‘제일 마음이 쓰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한 행위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기를 혹여 ‘걱정’해주고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동료’와 ‘독자’를 끌어들여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고 있다.

작가는 ‘내가 다른 사람의 작품 일부를 훔쳐 썼고, 분명하게 잘못했으며,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한다’는 명백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는 ‘누추해진 책상’, ‘소박한 꿈’ 같은 추상적 문장을 쓰면서 자신의 처지가 비루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이 작가가 그동안 쓴 소설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평생 일하지 않고도 부르주아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미 2005년 한 방송에 출연해 그가 쓴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200만 부 팔렸다고 말했는데, 언론에서는 이 인세를 약 20억 원으로 추정했다.(링크)

‘입장문’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이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노동자는 공장에 다니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여자는 ‘연탄값이라도 아낄 겸’ 동거를 하자고 제안하고, 둘은 동거를 하지만, 나중에 남자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려고 공장에 취업한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의 문장에서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는 내용이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 일부를 훔친 이 작가는 자신의 명성과 부를 실컷 누리면서 마치 변두리의 여성노동자처럼-그녀가 오래전 여성노동자로 일한 것과는 상관없이-’누추해진 책상’, ‘소박한 꿈’ 같은 가난을 연상하는 문장을 쓰는 것은 오만함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일까. 정작 ‘누추해진 책상’ 앞에서 ‘소박한 꿈’ 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오늘도 습작에 밤을 새우는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과 무명작가들은 이제 ‘누추해진 책상’이나 ‘소박한 꿈’ 따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이들의 꿈을 박탈하면서까지 이 작가가 그렇게나 ‘누추해진 책상’과 ‘소박한 꿈’을 이루고 싶을 정도로 열악한 창작 활동에 있다고 누가 믿을까. 

다른 작가의 작품 일부를 훔친 작가가 몇 년 시간이 지나서 버젓이 활동을 시작한 데는 출판권력으로 알려진 대형 출판사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15년, 이 작가의 표절이 사회문제로 드러났을 때도 이 출판사 관계자들은 표절한 작가를 두둔하고 나섰다. 

창비와 백낙청(존칭 생략)은 ‘문자적 유사성은 있다고 여겨지지만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창비와 백낙청이 창피스럽다고 글을 쓴 김진석 교수의 글(링크 1, 2)에서 이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김교수는 표절을 한 작가보다는 그 작가의 뒤에 있는 문학권력의 문제에 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출판권력이자 문학권력인 이 출판사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권력의 오만과 태만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김교수의 글에 동의하면서, 지금까지 문학계에서 진보적 태도를 유지하고, 진보적 출판에 크게 기여한 이 출판사가 이제 반동으로 돌아섰다고 판단한다. 그것은 김문수나 이재오처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념을 배신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동화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매국으로 돌아선 자들 가운데 다수가 대개 지식인들이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변절과 매국이 문제되는 것은, 사회의 변화에 평범한 백성보다 영향을 더 끼치기 때문이다.

이 출판사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동으로 돌아서겠다는 ‘의도’는 당연히 없겠지만, 표절 작가를 둘러싼 극명한 시각의 차이가 스스로 반동화하도록 강제하고 있다는 걸 그들만 모르고 있다.

한편으로, 표절 작가를 옹호하고 변호하려는 출판사의 태도는 ‘상업적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표절한 작가가 지금까지 한국 최고,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 여전히 지금도 ‘팔리는’ 작가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표절한 작가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독자들이 잘 모르는 작가였다면 한국 최대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이 출판사가 명백한 표절 사실을 부인하면서까지 작가를 옹호하고 변호했을까 생각해보자. 출판사의 그런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떤 말과 행동의 동기에 ‘경제적 이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추측이다. 속된 말로 ‘돈이 안 되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하물며 한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두고, 그 상품성과 이윤을 따져보지 않았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몇 년의 침묵 끝에 새 작품을 발표한 지면이 자신을 그렇게 옹호, 변호하던 바로 그 출판사의 계간지였는가를 생각하면, 이런 일련의 모습이 우연으로만 볼 수 없다. 표절한 작가가 뼈아픈 반성도 없이 새 작품을 발표하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잡지에 작품을 싣고, 쓰지 않아도 좋을 ‘입장문’까지 싣는 것은, 작가가 분명 ‘표절’에 관해 대중의 여론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반증하고, 그런 의식적 행위는 자신이 떳떳하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증표다. 그럼에도 출판사는 잡지를 통해 작가의 글을 그대로 실었고, 그 자체로 작가를 지지한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건 명백히 독자를 우롱하는 태도다.

출판사는 표절 작가 문제를 진영논리로 왜곡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두고 ‘마치 사람들이 작가나 백낙청을 매장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말하는’ 이상한 결론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 신경숙 표절 사태가 마치 집단이나 세력의 공모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여기는데, 이것도 우스운 음모론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문학권력, 출판권력인 이 출판사가 표절한 작가-물론 표절이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이 작가의 작품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였다-의 작품을 출판해 막대한 이윤을 얻었고, 또 당시 작가가 표절에 관해 확실한 본인의 의견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출판사로써는 우선 작가의 생각과 태도를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응준 작가를 비롯해 신경숙의 작품을 분석해 표절이라고 주장한 여러 작가와 평론가의 객관적 증거가 쌓였음에도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하고, ‘문자적 유사성은 있다고 여겨지지만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같은,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는 식의 인지부조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문학과 출판은 물론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대형 출판사에서 할 말은 아니다. 김교수도 지적했듯이, 이들이 내부적으로 출판사와 백낙청을 보호(?)해야 한다는 방어기제로 인해 터무니없는 논리로 표절 작가를 옹호, 보호하려는 태도는 그 자체로 반동이다. 과거의 행적이 훌륭하다고 해서, 현재의 잘못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삶을 결정하는 것은 태도다.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때로 힘들 수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경숙의 표절 사태와 관련해 창비가 보여주는 태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 묻는다.

 

<백건우 작가 약력> 

1988년 제1회 전태일문학상 공모 당선. 
1997년 문학사상 신인작가 발굴 장편 소설 당선. 

장편소설 "사이버제국의 해커들", 중편소설 "하루", "죽도사설" 펴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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