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이퍼 = 남유연 객원칼럼니스트] ‘책’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여러 도서전, 북 페스티벌들을 다녔지만 ‘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평범한 독자인 필자의 머릿속에서 책은 허구의 이야기를 쓴 것은 소설, 농축된 아름다운 문장들은 시,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은 교양서, 이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2019를 계기로 필자 본인에게, 그리고 나아가 현재 세대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도서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 봤다. 필자가 서울 국제 도서전을 위해 코엑스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반 정도. 토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도서전이 열리는 것을 생각했을 때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은 아니지만 벌써 엄청난 인파가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표 발급 줄도 당연히 많은 이들이 대기 중이었다. 서울 국제 도서전에는 네이버 무료 사전 예약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사람이 몰리지 않았을까 싶다. 고지식한 필자는 ‘아무리 제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고 종이책의 죽음을 우려하는 시대라지만 아직까지 책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다’라며 쾌재를 부르며 입장했다.

비교적 한산했을 때의 전경을 찍은 사진
비교적 한산했을 때의 전경을 찍은 사진

서울 국제 도서전은 코엑스의 A홀과 B홀 모두에서 진행되어 꽤 큰 규모를 자랑한다. ‘국제’ 도서전인만큼 헝가리, 중국, 독일, 프랑스, 태국 등등의 책을 소개하는 주재원 부스나 출판사 부스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국내의 큰 출판사인 김영사, 민음사, 문학동네 등의 부스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은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거대 출판사의 부스들을 도는 것은 종로 교보문고에 가는 것과 볼거리 측면에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거대 부스들에서의 묘미는 유명 작가 사인회. 사람이 워낙 많고 사인회도 많다보니 사람들의 파도에 밀려다니다 보면 의도치 않아도 몇몇 작가님들의 얼굴을 볼 수도 있고, 사인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토요일에 필자가 본 작가만 네 분이었다. 이번 해 5월에 신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발매한 심보선 시인, 7월에 신작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을 발매할 예정인 장강명 소설가, <82년생 김지영>으로 한국의 페미니즘 열풍에 큰 기획을 긋고 신작 <사하맨션>을 5월에 발표한 조남주 소설가, 5월에 신작 <진이, 지니>을 낸 한국 스릴러의 왕 정유정 소설가를 보았다. 서울 국제 도서전은 강연도 열리고 온갖 이벤트도 열리고 사람들도 북적이기 때문에 정신이 없고 계획했던 것도 놓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책 마니아들이 유명 작가들과 만날 기회는 꽤 많은 편이니, 사람들이 왠지 줄 서 있다 싶으면 반드시 그들의 손에 들린 책을 유심히 살펴보시길.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주칠지 모른다. 물론 사인회를 진행하는 작가님들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인파에 휩쓸려 다른 부스로 강제 이동 당할 수 있으니 든든히 먹고 힘을 기른 상태에서 도서전에 들어가자.

인파에 휩쓸려 다니다가 뵙게 된 정유정 작가
인파에 휩쓸려 다니다가 뵙게 된 정유정 작가

사람들에게 쓸려 다니면서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책을 여유롭게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도서전에 참여한 이들은 눈으로 표지를 스르륵 훑으며 빠른 속도로 구경하고 책 관련 모임 가입 권유를 받으며, 책을 SNS에 홍보하면 도서 관련 굿즈를 받는다.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인공이 과연 책과 독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아동의 인구 수도 줄어들고 있음에도 부스들은 아동을 겨냥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B홀은 거의 60% 넘는 부스들이 아동 교육 관련 부스였다. 언제나 따끈한, 아니 뜨거운 한국의 조기 교육열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동 관련 부스들에서는 책을 읽어주는 AI 루카가 가장 흥미로웠다. 루카라는 이름의 부엉이 모양 AI 기계 앞에 그림책을 놓고 루카의 눈에 책을 인식시켜주면 루카가 책을 읽어준다. 책을 넘길 때마다 그 장을 인식하고 읽어준다. 아동의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미리 녹음해 두고 나중에 루카가 엄마 아빠 목소리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아직 대중에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는 보급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테이프나 CD, mp3 파일이 그림책을 읽어줬다면 이제는 AI가 그림책을 읽어준다. 루카에는 1000권 정도의 데이터가 입력되어 있으며 다른 언어로 책을 읽어줄 수도 있다고 한다. 단말기 가격은 40만원 정도로, 비싸지만 한 번 사면 오히려 CD나 mp3보다 가성비가 좋은 편이다.

책을 읽어주는 AI 루카
책을 읽어주는 AI 루카
오디오북 부스는 이 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오디오북 부스는 이 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전자책에 대한 부스도 많았고 오디오북에 대한 부스도 많았다. 대체 책이란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이제 책을 읽지 않고 ‘듣게’ 되는가? 텔레비전을 봐도, 유튜브를 봐도 온갖 오디오북 광고들이 넘쳐난다. 책의 일부를 작가가 읽어주는 낭독회는 예전부터 이어져 왔지만 책의 음원 파일을 통으로 듣는 것은 새로 생긴 추세이다. 책은 이제 활자의 영역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오디오 북의 추세가 반갑지만은 않다. 눈으로 활자를 읽을 때의 능동성 또한 책을 들을 때의 편안함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눈은 철저한 ‘자발성’이 없다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신체기관이다. 눈을 감으면 못 본다. 무언가를 읽으려면 눈을 열심히 굴려서 활자의 의미를 뇌에 박아 넣어야 한다. 반면, 귀는 집중을 안해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다. 잠을 자다가도 알람 소리는 들린다. 물론 무언가를 귀 기울여 들으려면 집중이 필요하지만, 누군가 읽어주는 활자를 듣는 행위는 눈을 이용하여 활자를 읽는 것보다는 덜 능동적이다. 귀로 듣는 책이 과연 눈으로 읽는 책보다 더 깊은 의미, 더 큰 상상력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책을 전혀 안 읽는 것보다는 책을 듣는 것이 나으며 비 오는 날 버스 창을 내다보며 좋은 목소리가 읽어주는 책의 내용을 듣는 것은 충분히 아름다운 경험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을 하나의 선상에, 같은 것으로 둘 수는 없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책을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듯, 자신의 눈으로써 책을 읽을 때만 다가오는 책의 메시지가 있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다양한 경험을 부여하는 새로운 기술은 환영이다. 그러나 책에서 활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점점 떨어져가는 것만 같아 우려된다. 활자는 그저 팬시의 하나가 되어버린 듯도 하다. 출판사들이 기존의 활자에도 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쁘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글씨체, 너무 넓은 자간으로 인해 텅텅 비어 보이는 페이지를 볼 때면 아직까지 활자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슬프고 아쉽다.

타자기 체험 중인 사람들
타자기 체험 중인 사람들

우리 인간은 책과 관련된 최첨단 과학기술, 즉 AI와 전자책, 오디오북을 즐기면서도 과거의 것들을 그리워하는 모순을 가진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있어 호기심에 찾아간 곳에는 타자기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타자기 사용법을 간단하게 배우고 자신이 원하는 구절을 하나 적을 수 있는 체험이었다. 타자기를 두드릴 때에 손에 전해지는 감촉, 컴퓨터 키보드와는 달리 기계가 움직이는 것을 직접 볼 때의 신기함, 찰칵찰칵 울리는 타자기의 소리 등에 매혹된 사람들은 기다리면서도 어떤 구절을 적어볼까 즐거워했다.

​사실 타자기를 제외하고는 아날로그적 감성, 종이책, 전통적인 책과 관련한 것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번 해 서울국제 도서전의 홍보대사 중 한 명이 한강 작가이지 않은가. 한강 작가는 서울 국제 도서전 강연에서 유튜브의 다음은 종이책일 것이라고 말했다.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을 통해서 오감 활용 체험을 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내면을 알 수는 없다. 한강 작가는 인간의 영혼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종이책과 문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종이책이 가진 물리적인 두께 자체가 독자가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려주는 지표라며, 디지털 도서의 경우 이를 알 수 없어 아쉽다고도 말했다. 종이책을 사랑하는 필자는 한강 작가의 강연에 깊이 공감했다. 종이책은 넘기는 손맛이 있다. 종이 특유의 향기도 있다. 도서관에서 나는 냄새는 책을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람을 감성에 젖게 한다. 가볍고 휴대가 편하고 눈도 보호되는 아마존 킨들을 사용하는 필자가 이렇게 디지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이가 없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종이책이 점점 외면 받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서울국제 도서전이 거대 도서전인만큼, 종이책에 대한 특별한 경험들도 많이 해보고 싶었으나 그런 것은 별로 없었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도 중요하지만 종이책도 결코 가벼이 여겨져서는 안 된다.

​서울 국제 도서전의 거의 모든 부스를 돌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해서도 생각했지만, 책의 디자인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책의 커버 디자인이 굉장히 다양하다. 예전에도 특정 책이 잘 팔리면 다음 번 인쇄 때 양장으로 나오면서 책 커버 디자인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최근에는 양장은 물론, 유명 작가의 책일 경우 한 권에도 다른 디자인이 한정판으로 나오기도 한다. 고정 독자층을 향한 상술임이 분명한데도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출판 시장도 분명 시장이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다양한 디자인이 나오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과도하게 이미지에만 신경을 쓴 책들이 쏟아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파스텔 톤, 혹은 뉴트로 디자인의 트렌드에 편승한 예쁜 책 표지들.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도 이런 택들을 무수히 보았지만 많은 경우 이런 표지들은 특색 없이 천편일률적이라 딱히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다. 물론 책 표지가 전달하는 시각적 즐거움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민음사의 해외 문학 전집은 책의 내용과 탁월하게 맞아떨어지는 명화를 책의 표지로 선택했다. 현대 도시인들의 외로운 삶을 그렸던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자동판매식당>이 <위대한 개츠비>의 표지가 되어서 삶의 외로움과 도시의 허영을 한 눈에 표현했다. 또, 한국의 추상 화가 이우환의 그림<선으로부터>가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표지가 되어 허무주의와 죽음, 현실이 아닌 어딘가로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기존 명화들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눈길을 사로잡는 자체 디자인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글의 내용을 잘 드러내는 탁월한 북 커버 디자인보다는 단순히 예쁜 이미지에만 공을 들인 책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글의 내용이 부실하여 오히려 이미지에 치중한 듯한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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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더 나아가 생각해 보았다. 책이란 무엇인가? 몇 백 장의 종이장과 근엄한 내용, 혹은 심각한 메시지를 담은 허구의 이야기, 돌베개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부피감을 가진 것만이 진짜 책인가? 책을 들고 독사진을 찍었을 때 사진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예쁜 표지를 가진 책은 어떤가? 예쁜 소품으로서의 책은 책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는 팜플렛 형태로 인쇄된 얇은 초단편 책을 보기도 했다. 책이라기에도 작고, a4에 옮기자면 세네 페이지 정도일 것이다. 이런 초단편 도서는 책인가?

독립서점 부스에서 만난 초단편 도서. 비닐 팩 안에 팜플렛 형식의 책이 있다
독립서점 부스에서 만난 초단편 도서. 비닐 팩 안에 팜플렛 형식의 책이 있다

책을 책으로 만드는 그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의 책은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어느 정도의 지속 기간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삼일 전 아침에 뭘 먹었는지 정도보단 오래 남는 기억, 생각할 거리를 주는 활자들이 묶인 것이 제대로 된 책이 아닐까 싶다. 두께나 이미지에 집중했느냐 등등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융합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책의 변화와 다양화에 한 몫 한다. 사실 예전부터 융합은 존재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영화는 이미 이미지, 영상, 음악이 합쳐진 융합 예술이며,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은 201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림과 글, 글씨의 세 요소가 모두 어우러져야 한다고 했으며, 시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의도’라는 그림의 형식도 있었다. 책이라고 이미지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불허될 리 없다.

그럼에도 추억의 촉매제, 감정의 증폭, 지식의 확장보다는 팬시 용품이 되어버린 책들이 매대에 너무 많아 현재 트렌드에 대한 반발심이 슬슬 들었다. 이미 트렌드는 개인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걸작이 움트기 마련이다. 이 환경 안에서 단 하나라도 걸작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예를 들어, 유튜브는 수많은 부작용을 낳아 왔으나 유튜브 환경 덕에 극소수의 천재가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지기도 한다. 출판 시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 걸작을 기다려 본다.

드라이플라워를 붙인 책 상자. 선물용으로 좋을 듯하다
드라이플라워를 붙인 책 상자. 선물용으로 좋을 듯하다

해외에도 책 관련 굿즈가 많지만, 국내 도서 관련 굿즈 시장은 그 어느 곳보다 급속도로, 팬시 용품 위주로 폭발한 것처럼 보인다. 책갈피와 책의 구절을 새긴 머그컵에서부터, 책장이 젖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게 하는 책장에 뿌리는 북 퍼퓸 등등. 그리고 어제는 처음으로 드라이플라워를 활용한 책 포장 박스를 보았다. 이건 설령 꽃을 사랑한다해도 의도가 상업적인 것이다. 책 관련 상품으로라도 이윤을 창출하려는 거대 출판사의 모습이 투명하게 보인다.

​‘상업성’이라고 하면 이번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인기가 폭발했던 B홀의 성심당을 빼놓을 수 없다. 성심당의 빵들은 매우 맛있지만 대체 책과는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하지만 B홀에 오기 전에 A홀에서 책과 무관한 많은 것들, 마블 굿즈 샵이나 가죽 공예품 부스 등등도 이미 봤기 때문에 빵집이라고 못 들어올 것은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기도 하고 말이다. 성심당 옆에서는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직접 요리를 선보이는 요리 관련 행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인기 만점 성심당 부스 
인기 만점 성심당 부스 

B홀 성심당 외의 엄청난 수의 부스들은 모두 아동용 그림책들과 교육용 책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교육용 책들이 팔리나 싶었으나, 결국 팔리는 것, 돈이 되는 것은 아동용, 교육용 책이 아닌가 싶다. 15년 전쯤 필자의 동네에는 북카페가 들어섰었다.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책을 공짜로 보고 책을 살 수도 있는 북카페였다. 시간이 갈수록 책은 팔리지 않고 손때를 타서 너덜너덜해졌고, 책을 읽는 사람들 때문에 회전율은 느려졌다. 결국 그 북카페는 참고서, 학습용 도서, 문제집들을 파는 서점으로 바뀌었다. 입시교육과 관련되지 않은 책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듯하다.

​필자는 북 페어에 몰린 사람들을 보며 아직까지 전통적인 ‘책’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책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출판업계는 새로운 기술, 책 주변의 것들에’만’ 신경 쓰고 있는 듯하다. 전통적인 ‘책’을 되살려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는 미흡한 듯하다. 책의 미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홈페이지 갈무리.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홈페이지 갈무리.

​얼마 전 뉴스 기사에서 본 사람들은 책의 미래와 인간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미래 도서관(Future Library)’에 대한 기사였다. 한강 작가는 올해 4월에 노르웨이의 미래 도서관에 의해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2014년에 시작된 미래 도서관은 100년 동안 매해 1명씩의 작가, 총 100명의 작가를 선택해서 2014년으로부터 100년 후에 이들의 책을 종이책으로 발매하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이다. 종이책에 쓰일 종이는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에 위치한 숲에 100년 동안 심어질 천 그루로 만들 것이다. 미래 도서관 행사에서 한강 작가는 종이책을 천에 말아 땅에 묻었다. 2114년까지는 작가 외에는 그 소설의 내용을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 이 기사를 접하고 필자는 슬픔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한강 작가의 책이란 책은 모두 소장한 필자가 엄청난 장수를 누린다해도 4월에 쓰인 한강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가능성은 없기에 슬프고 아쉬웠다. 그러나 동시에 짜릿했다. 미래 도서관의 프로젝트는 한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짧은 것인지 직시하고 현 세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을 이들의 삶을 생각하는 프로젝트이다. 눈 앞의 미래가 아닌,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것은 깊고도 넓은 비범한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강 작가의 소설이 울림을 가져다줬다니 팬으로서 기뻤고 이런 프로젝트 자체가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가 바쁜 통상의 한국인으로서 노르웨이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백 년 후를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는 선진국이기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겠지, 하는 질투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몇몇 질문을 던져보면 책의 미래를, 미래의 독자를 생각하는 이 프로젝트는 경이롭다. 2114년의 독자들은 백 년 전 독자들이 마주하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그 독자들의 삶은 우리의 삶과 얼마나 유사하고 다를까? 우리 세대의 작가가 담아낸 우리의 영혼이 그들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백 년, 이라는 생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느낌이 든다. 역사책을 보면 백 년은 짧디 짧은 시간이지만 한 인간의 평균적인 세계가 존속할 수 있는 시간보다 긴 시간이다. 책의 미래에 대한 한국의 대응책은 현재 너무 모호한 듯하다. 지금 출판 환경이 척박하다고 해서 아무 시도도 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존재해야 미래가 존재할 수 있다.

​서울국제도서전 2019의 테마는 ‘출현’이었으나 사실 무엇이 출현했는지 알기 힘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책이란 것이 무엇인지, 책은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줘야 하는지 고찰할 수 있었다. 금방 읽히고 접근성이 좋은 인스턴트와 같은 책들은, 적어도 책을 읽을 엄두를 내게 해준다. 그리고 잘 팔린다. 인스턴트적인 감성이 잘 팔리면서 먼 미래, 무거운 감정, 심오한 고찰을 담은 책은 조금씩 외면당하고 있다. 당장 읽히지 않는 책들이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가벼운 것이 많은 만큼 무거움이 있어야 균형이 맞다.

​서울국제도서전 2019은 책에 대해서 진지한 것을 기대했던 학구적인 사람들에게는 다소 가벼울 수 있겠다.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책’은 인내심을 가져야 읽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은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책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애쓰고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 2019가 보다 넓은 스펙트럼의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책의 묘미를 전달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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