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 9 서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연재]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 9 서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9 - 서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일상곳곳에 서사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근대철학자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나는 범주category 없이는 아무것도 사고 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는 그대로 범주가 근대적 사고의 근간으로 근대인이 개념에 의해 지식으로 분류된 범주를 하나의 지줏점으로 세계를 보았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지식의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게 근대의 형이상학이고 인식론이다. 이 개념범주로 이루어진 근대의 형이상학이자 인식론의 정신구조를 표현해 왔던 양식이 바로 근대 소설이다.  

소설이 주로 현실에 대한 개념적 거리를 지닌 3인칭으로, 과거형으로, 서술형으로 현실을 벗어난 근대 부르주아 개인의 우월한 사고를 반영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서 만난 사람을 제멋대로‘프라이데이’라고 부르고, 플로베르가 보바리를‘시골뜨기’라고 규정 했던 것처럼 귀납적 일반화를 본질로 하는 지식을 근간으로 형성된 익스크루시브한 배타적 세계인식이 바로 근대소설인 것이다. 지식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이라고 했던 쿤데라의 주장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대의 서사시가 영웅중심의 부족tribe의 삶을 반영한 백과사전이고 전체주의의 세계인식을 담아낸 역사적 형식이었고, 근대의 장편소설이 민족nation 중심의 부르주아의‘고립된 자아의식’을 개념화 한 계몽 백과사전이고 개인주의의 세계인식을 담아낸 역사적 형식이라는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고대적‘묘사’와 근대적‘개념’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회현실에 살고 있다. 묘사가 객체에 기울고 개념이 주체에 중심이 있다먼, 오늘 민주화된 사회에서 객체와 주체는 상호주체inter-subject의 차원으로 바뀌었다. 즉 오늘 우리의 다원화된 현실을 규정하는 모럴은‘맹목성’도 아니고‘일방성’도 아니다. 상호주체의 세계는 말 그대로‘상호성’이 모럴이 되어 움직이는 세계다. 이 상호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세계형식을 우리는 서사narrative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범주 없이는 아무것도 사고 할 수 없다던 칸트처럼, 서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너와 나의, 우리들의 이야기인 서사는 다수운 밥이 담긴 밥상이고, 간단치 않은 하루하루의 일상이고, 잠시나마 일상을 조용히 마주잡은 찻잔인가 하먼, 괴물엘리트들의 정치판이고, 시름시름 앓는 경제판이고, 지지고 볶는 미용실이고, 죽고 못 사는 사랑이고, 운명이 오고가는 재판정이고, 매일 미세먼지 소식이 올라오는 뉴스룸이고,‘이것 보세요!’드잡이로 날을 새는 국회의사당이고, 빌어먹을! 여기 좀 봐라 이 미친놈들아 외쳐대는 열악한 노동의 현장이다.  

자, 그렇다먼 우리들의 이야기는 어티케 이루어지는가 서사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여기, 지금 글쓴이가 말하고 있는 게 그대로 서사라먼, 이 시대의 이야기 방식이라먼 믿어지는가. 그렇다. 서사의 세계는 지금, 여기라는 크로노토포스한 주제를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사는 삼인칭이 아닌 이인칭, 너DU의 세계이고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의, 나아가 미래형으로 가는 공감의 세계이고 일방적인 서술형이 아닌 구술형의, 상호설득의 세계형식이다. 서사가 부족서사도 아니고 민족서사도 아닌 대중서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대중서사로서의 이 시대의 이야기는 작고 소소한 우리들의 미시적 일상에 기반해 있다.  

부족의 운명을 다룬 거창한 전쟁 이야기가 고대 영웅서사시의 본류이고, 민족의 이념을 구현하는 거대한 모험 이야기가 근대 시민서사시의 근간이었다먼, 대중들의 들끓는 꿈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오늘의 대중서사시는 범박한 일상을 그 서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1,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2,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어. 

여기, 1의 서술자는 대상을 다만 냉혹하게‘관찰’하고 있다. 이게 바로 저 잔혹한 근대의 죽음의 서사이고, 죽음의 서사인 근대 소설의 문법이다. 즉 죽음의 서사인 근대소설은 그 새끼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대든 말든 냉혹하고 노트럴한 이성의 거리 저편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게 바로 개념 범주라고 하는 소설의 문법이고 근대인의 망탈리테다. 그러나 2의 서술자는 대상을 하나의 회상체로서 지금, 여기의 시공간으로 불러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따스한 인간 본래의‘목소리’가 피어나고 있다. 즉 이야기는 감정, 파토스의 사원이다. 그리하여 오늘 인저스티스한 불의한 일상을 겪으며 터져나오는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투쟁서사가 되고, 마을서사가 되고, 골목서사이자 개인서사를 넘어 모두의 집단서사로서 이 시대의 생명의 서사 물결을 이루고 있다.  

죽단화를 보면 
노란 리본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망자를 추모하는 슬픔이 곱게 피어 있는 것 같다 
만장挽章을 접어 꽃으로 만든, 
...... 

- 채종국,‘노란 리본’부분

여기, 죽단화는 분명 한 송이 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숨길 수 없는 내면의 현실로, 시적 이야기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단화를 통해 노란 리본의 명찰을 단 산-죽음의 슬븐 상장을 대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기, 꽃잎처럼 인양된 슬픔이 있다니...삶은 이렇게 질감이 다른 언어로 구워내는 서사가 있어 세월 속에도 썩지 않고 염도를 지니고 산다니... 

시대의 조류처럼 하나의 이야기로서 서사는 인자 거부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문법이 되었다.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로서 서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야기의 편재성the ubiquity of narrative이 여기에 있다. 

난 그렇게 본다.

 

김상천 문예비평가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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