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4) 여성노동자, 성노동자, 기지촌 문학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한정현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인터뷰]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4) 여성노동자, 성노동자, 기지촌 문학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한정현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일시 : 2019년 7월

참석자 : 김지윤(인터뷰어, 문학평론가, 시인), 한정현(소설가)

에릭 홉스봄은 말했다. 역사가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역사를 소설로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기억을 남겨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히는 것, 그래서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인 것일까. 한정현 소설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기억을 쓰는 사람’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했다.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역사적인 것, 기억,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을 보여 온 한정현 소설가가 올해 초 출간하여 평단의 호평과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책 『줄리아나 도쿄』를 읽고 난 이후라 더욱 그 질문이 깊어졌다. 하지만 한정현 소설가는 어렵고 까다로운 질문들을 기꺼이, 즐거운 표정으로 같이 고민하며 대답해주었다. 

김지윤: 『줄리아나 도쿄』 출간을 뒤늦게 축하드리고 이 책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과 출간 후 몇 달이 지난 지금의 소감 부탁드릴게요. 

한정현: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엔 겁도 없이, 그저 이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빨리 세상에 나오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제가 ‘줄리아나 도쿄’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관련 공부를 하는 친구를 통해서였는데, 지금의 한국 아이돌 군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최근 유투브에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한 오사카의 한 고등학생들의 군무가 그것이라는 정도였어요. 그러다 줄리아나 도쿄의 무대에 오른 여성들의 사진을 봤는데 여성들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보였지요. 여성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궁금했고 결국 미타역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미타역은 과거에 엄청난 공업지대였는데 지금은 너무나 완벽하게 조성된 신도심 같았습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남성들이 몰카로 여성들의 짧은 치마 속을 찍는 바람에, 여성들의 치마길이를 경찰들이 단속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그 줄리아나 도쿄가 공업지대에 있었다는 것이요. 시부야도 아니고 신주쿠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에노 근처도 아닌 이곳에 왜 그런 어마어마한 클럽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사라진 공업지대와 함께 사라져야 했을 그곳의 사람들로 이어졌어요.

저는 여성노동자, 성노동자, 기지촌 문학에 관심이 크고 그 관심사가 앞으로의 공부에 한 방향성이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앞으로 또 다른 방향성이 생길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라진 무대가 그들의 무대였다면, 그 무대를 내가 소설에 다시 만들어주자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누군가의 인생엔 분명 빛나는 한 순간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이 인생의 전체를 견디는 빛이 되기도 한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만약 누군가에게 줄리아나 도쿄가 그런 무대였다면 내가 그 무대를 다시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올라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특히나 그 무대가 소외되고 지연된 존재들을 위한 무대이기도 했다면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또한 개인적으로는, 제가 힘들 때 제게 무한한 호의를 준 제 주변의 사람들 혹은 지금은 제 주변에 없어도 한때의 저를 지탱해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어요. 하지만 쓰면서 힘겨웠던 지점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소설에서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 아니라면,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불행은 절대 인물에게 부여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을 쓰면서 자주 ‘내가 아무리 작가여도 인물에게 이 장면을 부여해도 될까? 이 장면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라는 판단 하에 자신에게 여러 번 되묻고 썼지만 아무래도 유키노의 불행을 다루는 장면에서는 그래도 정말 힘들었어요.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했고 작가로서 갖는 거리감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줄리아나 도쿄>를 생각할 때 어디론가 마음이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을 거두기가 힘들더라고요. 몇 달이 지난 지금은........그래도 이젠 많이 거리감이 생긴 것 같아요. 그다음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는데, 물론 소중하게 느끼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고, 이제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된 정도가 된 것 같아요.

김지윤: 신춘문예 당선 후 기쁘다기보다 무섭다고 하셨었는데요. 이제 몇 년이 지나시며 느끼는 심정은 어떠세요. ‘등단 때의 문제의식’과 ‘현재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같으신지, 아니면 달라지신 점이 있으신지도 궁금합니다.

한정현: 사실 소설을 쓰는 동안은 즐거워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소설을 쓰는 타입이라 쓰는 동안엔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서인지 안정되는 기분인데, 막상 쓰기 전과 쓰고 난 후엔 무섭더라고요. 여전히 무서워요. 특히 발표 되는 순간부터 그렇죠. 사실 저는 등단 후 몇 년 간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어요. 줄리아나 도쿄도 그랬고, 내년에 나올 단편집도 그렇고 여태 발표한 소설도 한 편 빼고는 전부 투고해서 발표한 것이라 문단 생활이랄 것이 없었던 것 같아요. 소설 한 편 발표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등단 때의 문제의식과 현재의 문제의식은 어떤 점에선 같고 그러나 조금 더 확장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데요. 등단 때는 비극적 역사의 상처를 서사화하고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를 무젤만이나 서발턴에 대한 논의처럼 언어를 상실하거나 자신의 언어를 결핍하고 있었던 주체들에게 어떻게 말의 능력을 돌려줄 것인지 혹은 이를 (아감벤 식으로 말한다면) 언어를 보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그 경험과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을 언어의 규칙 안에서 협소하게 이해를 해온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이 자리에서 제가, 또 우리가 언어에 대한 오해와 절대적 신뢰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인데요. 왜냐하면 실제 한국처럼 단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사용 언어만큼이나 다양한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이와 연결 지어 다시 저에 대한 질문의 답변과 연견시킨다면, 등단 때와 달리 최근에 와서는 이렇듯 언어를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어쩌면 단지 주류적인 언어 규칙의 바깥으로 소외된 것이었을 뿐 그들의 일상적 삶, 이를 문화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자기 삶의 방식으로 계속 이야기할 수 있고, 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의 결핍 혹은 상실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의 협소함을 넘어서 삶이 전달되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 소설 속 대중문화를 향한 시선은 아마도 그렇게 넓혀진 시야가 닿은 지점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즉, 최근의 저의 시도는 역사와 그 기원에 접근하는 소설의 시도는 역사가 언어의 규칙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봐도 어느 정도는 무방할 것이고요. 제 소설에서 서사의 틈 사이로 배치된 대중문화사적 기호들은 한편으로는 중심서사의 구심력에서 이탈하는 개개의 서사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보자면 그저 냉전 동아시아와 대중문화사,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알아볼 수 있는 뿌리 깊은 혐오의 연쇄 고리, 라는 저의 지적 기호(嗜好)를 드러내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제가 생각했던 것은, 이를 통해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했던 것 같아요. 이것은 제가 소설이라는 글쓰기를 선택한 이유와도 맥락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발화할 때 그것은 사실상 현상에 대한 즉각적 반응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것이 모두 ‘말하기’로 환원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제발트를 통해서도, 프리모 레비를 통해서도 우리가 모두 분명하게 읽어오고 확인받아온 이야기들입니다. 결국 제 소설에서 제가 겉으로 드러낸 이러한 ‘기호’들, 이른바 상징과 지식들은 언어를 잃은 주체가 목소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말하려는 수단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여러 명의 인물들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상징, 공간을 횡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과거 언어에 국한되었던 시선이 문화사라는 토대 위로 넓어졌다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지윤: 2019년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현실의 반영, 소설에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부분이 있으셨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소설이 이 사회에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한정현: 리얼리즘이란 그저 현실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환상이라는 개념도 리얼리즘과 아주 반대의 개념은 아닙니다. 저는 재현의 방식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가령 사실을, 현실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해서 이것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재현의 폭력성이 갖는 문제도 생각해야할 것이고요. 그러니까, 재현이 아닌 대상화가 되어버리는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고요. 또, 당사자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고요.

저는 <줄리아나도쿄>의 ‘작가의 말’에 “기나긴 현재”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요. 이 문제의식과 관련해 덧붙이자면, 얼마 전 IMO라는 기지촌 구술재현록을 읽었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소수자에 대해 무조건적인 재현을 하는 것도 문제적이지만 재현하길 저어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더욱 소수자로만 남겨지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양쪽 모두를 수렴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무조건 재현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느냐 한다면 그것도 꼭 그렇지 않다고 느껴요. 그래서 이 질문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리얼리즘이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 자체는 제가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내내 생각할 것 같아요.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 이런 차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를 오래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현재는 그저 많은 생각을 많이 하는 중이라고 밖엔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아요. 

그리고 소설이 할 수 있는 것, 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90년대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잖아요. 소설의 기원으로 살펴보면 한국은 그 선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그즈음을 기점으로 한국 소설의 화자들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요. 사실 소설을 어느 하나의 단어로 딱 분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이 조금 망설여집니다만, 그래도 러프하게 말해서 이른바 역사소설로 분류된 소설로만 한정해서 설명을 해보자면, 대문자의 역사에서 소문자의 역사로, 거대 역사 속에 가려진 개인들이 발화하기 시작했던 시점 같고요. 누군가는 소설의 위기다, 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지만 오히려 저는 반대의 생각이에요. 소설‘만’이 할 수 있었던 시기가 지나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이 어떤 절대적인 위치에서 기능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옆자리로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최근에는 ‘개인’이 조금 더 다양성을 띤 개인으로, 지워지고 지연되었던 개인들로까지 확대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 같고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적극 발화되고 있고요. 저는 이렇게 소설이 ‘개인’들의 옆자리로 오면서 많은 독자들도 다시 소설에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82년생 김지영’ 같은 경우처럼요. 

그러니까, 물론 소설이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제도를 만들거나 하진 못하겠지요, 하지만 소설을 통해 제도의 필요성을 느낄 수는 있겠지요, 어떤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순 있겠지요. 저는 조금 더 독자 옆으로, 개인 옆으로 온 한국의 소설들이 최근에 이런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것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소설이 꼭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어쨌거나 소설‘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 중 하나로써, 저는 오히려 현재의 한국 소설들이 과거보다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지윤: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과 관련되지만, 선생님의 소설에서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세상에 그 목소리를 찾아주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문화 차이를 넘어 유대를 쌓는 등 ‘차이를 넘어선 이해와 연대’같은 것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지금까지 작품에서 그리고 싶으셨던, 앞으로 그려내고 싶은 작품 속 인간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줄리아나 도쿄』에서 한주, 유키노, 유키노 엄마 등 인물 사이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내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쌓아 가시는 점이 개인적으로 좋았는데,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면을 주로 관심 있게 살펴보고 싶으신지요?

한정현:  최근에 『줄리아나도쿄』를 다룬 김건형 평론가의 평론을 읽었는데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저의 일부분을 좀더 알게 되었어요. 그 글에서, 한주와 꼬치구이 노인의 일화를 다루면서 한주가 꼬치구이 노인의 말에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 그것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상대에게 마음의 경계를 허무는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돌이켜보니,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더라고요. 누군가의 의외의 면이나 요철처럼 튀어나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약한 모습일수도, 강한 모습일수도, 착한 모습일수도, 나쁜 모습일수도 있겠지요) 흔들리는 거 같아요. 

언제나 인간을 볼 때는, 반전의 지점에서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서유기의 캐릭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최유기>에서도 지적이고 다정하지만 혐오를 묵인하는 것이 인간에게 섞이는 길이라면 그런 인간됨은 포기하고 기꺼이 요괴가 되는 저팔계 캐릭터라든지, 자기주장 선명하고 섹시한 관세음보살이라든지. 전민희 작가의 <태양의 탑>의 인물이나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인물들도 역시나 그렇고요. 그리고 언제나 저는 주인공보다는 조연들을 좋아했어요. 최근에는, 이건 거칠게 쓰는 표현이라 문제점이 있을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만. 이른바 ‘쏟아진 이후의 사람들’에 관심이 있어요. 영화 <아사코>를 보면, 3.11 대지진이 언급 되고 이것이 인물들의 개인사를 바꾸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크게 출렁이고 난 후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고, 결국 무언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이렇듯 ‘그 후’의 모습들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일전에 서지현 검사님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어요. JTBC에 출현하신 이후에 카페에서 친구 분과 케이크를 먹다가 누가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피해자’에 대한 어떤 정해진 모습을 만들어 놓고 그 모습에 맞춰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일은 정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떤 일을 겪은 사람들도 이후의 어떤 시간은 즐겁게, 또 어떤 시간은 힘겹게, 또 어느 날은 행복하게, 다른 날은 슬프게 이렇게 다양하고도 여러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그런 여러 모습, 여러 결을 그리고 싶은 것 같아요.

김지윤: 위에서 이미 대답을 들은 부분도 있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어를 다루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생각되는데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문학 속 언어, 문체 등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한정현: 등단작부터 언어와 관련한 이야기를 써오긴 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언어가 가진 폭력성 쪽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등단 즈음에는, 앞서 답한 것과도 연관 지어 다시 설명 드리면, 무젤만, 아감벤이나 서발턴에 대한 논의처럼 언어의 결핍과 상실을 겪은 주체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되돌려 주고 보증할 것인가, 이것이 주 관심사였는데요, 언어에 관한 관심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라는 책으로부터 구체화되었던 것 같아요. 현재는 여기서 조금 더 확장되어 가고 있는 중이구요. 언어가 갖는 어떤 폭력성에 요즘은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사실 ‘단일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두려운 단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한국이 이른바 단일어를 쓰는 국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 제국이 시행했던 표준어(동경어) 도입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다보니 더 그런 것 같아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일수록 사회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고요. 하지만 언어에 관한 지식과 사유가 굉장히 얕은데다가 단일어 국가에서 언어를 사용해서 글을 쓰는 제가, 언어를 배우는 것에 욕심이 있는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김지윤: 선생님께는 문화연구자이시며 소설가로서 양쪽을 모두 겸비하고 계시면서 문화적 기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경우도 있으신데요.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깊이 파고드셨던 어떤 학문적 영역이나 문화사적 맥락이 있으셨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 특별히 관심 있는 학문 분야, 연구 주제가 있다면 무엇이신지요.

한정현: 사실 아직 연구자라고 하기엔 공부한 시간이 짧아서 민망합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것도 아직까지는 늘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최근에는 정동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소설을 쓸 때 어떤 학문적 영역을 생각하거나 문화사적 맥락을 정해놓고 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제가 보는 시선의 어떤 부분을 생각해보면 저는 확실히 정동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기존의 문학사에서 배제되고 지연된 문학사에 관심을 늘 두고 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아요. 특히 <괴수아키코>나 <줄리아나 도쿄>와 관련해서 본다면요. 기지촌 문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이러한 문학사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석사 논문 쓸 때는 빌렘 플루서의 이론에 심취했던 것 같아요. 그 뒤엔 프리드리히 키틀러와 브뤼노 라투르 읽기에 한참 빠져있었고 이성욱이나 쓰루미 쑨스케, 요시미 순야, 주디스 버틀러.......등등. 물론 이것은 제가 그들의 이론을 이해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웃음)

김지윤: 현재 집필하고 계신 소설 주제나, 앞으로 천착하고 싶은 소설 주제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문학적 포부도 말씀해주세요.

한정현: 가장 최근에는, 이번 가을호에 발표할 소설인데, 조선적 재일이 등장하는 재일과 여성에 대한 소설을 썼습니다. 모던걸과 1960년대 일본의 과학기술, 그것이 현재 촉발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문제점들과의 연관성에 대해 여성, 조선적 재일의 문제의식과 연결 지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말해보았지만, 이번 소설은 연애소설입니다. 사실 저는 <괴수아키코>나 <대만호텔> 모두 다 어떤 면에서는 연애소설이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만, 어쩐지 이번엔 조금 더 신나서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괴수아키코>에서도 나름 형식을 달리 해보자는 생각으로 쓰긴 했는데 이번엔 조금 더 다른 형식을 가져와 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현재 장편소설을 두 편 쓰고 있는데 아직 쓰는 중이라, 동아시아와 여성, 그리고 그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 폭력의 기원, 그 기원이 현재로 이어지는 과정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다뤄질 일상사와 개인사를 좀더 조밀하게 그려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제 소설이 어떤 주제의식을 갖든 인물들의 일상사와 개인사를 조금 더 펼쳐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김지윤: 선생님께서는 오키나와, 기지촌, 위안부 등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으로 그 시야를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보이신 바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단지 한국사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더 확장시켜서 동아시아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조망한다든지, 타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관점의 전환을 꾀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정현: 이것은 제가 연구하려는 분야와 관련이 있기도 한데요, 저는 한국이 독립된 나라이지만 역사적 맥락,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본다면 동아시아 안의 한국이라는 것에서 반드시 생각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제가 궁극적으로 궁금해 하는 혐오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에요, 특히나 뿌리 깊은 여성 혐오는, 이런 동아시아의 관계성 안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동아시아라는 공간, 그곳에서 한국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과거 제국의 경영 방식과 현재 하위제국화 되어 가고 있는 한국의 국가 경영 방식, 이와 같은 것들이 단단히 얽혀서 현재 한국의 어떤 부분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의 출발점 중 큰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때 긴밀한 관계성을 갖는 타국의 시선 또한 기민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고요. 그러므로 타국의 시선에서의 한국, 한국의 시선에서 본 타국 이렇게 다각도의 입장을 궁금해 하고 재현해보려고 애쓰게 되는 것 같아요.

김지윤: 혹시 평소에 어떤 취미 활동을 하시는지, 창작에는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을 쓰실 때 주로 영감을 받으시나, 소설이 잘 쓰일 수 있게 하는 일이나 행동 등이 있으신가요?

한정현: 과거에는 취미탐색자여서 제빵이나 꽃을 배우기도 하고 심지어 물리학을 배우기도 했는데요, 결국 지속적이고 주기적으로 하는 취미라고 한다면 전시, 연극, 뮤지컬, 영화, 서울시향이나 경기필에서 주최하는 음악회 관람, 독서 등이 있고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해준 책이나 영화 드라마 이런 것들을 찾아보고 그 사람들과 함께할 얘깃거리를 떠올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해주는 것, 그때의 표정.......이런 걸 보는 걸 좋아해요. 취미는 그 정도인 것 같아요. 소설을 쓸 때 영감을 받는 것은 논문이에요. 논문들에서 영감을 받는 편이에요. 한국 논문에 한정된 것은 물론 아니고요. 그 외엔 인문학 서적들이나 과학 서적들에서도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다가 떠오른 음악을, 그럴 땐 음악을 듣지 않고 상상하는 것, 이요. 그 음악 안의 이야기들을 혼자 상상해보는 것 같아요. 소설이 안 써지면 그래서 논문이나 관련 서적들을 찾아 읽어요.

김지윤: 쓰던 소설과 헤어졌을 때 “어디론가 마음이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한정현 소설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문자 역사 속에 가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사와 개인사,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과 삶의 여러 결을 속 깊은 눈으로 관찰하고 섬세하게 읽어내며 그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언어로 옮기려 노력하는 그녀의 눈이 머물렀던 자리는 왠지 좀 더 따뜻해졌을 것 같다. “언어를 잃은 주체가 목소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말하려는 수단”으로의 ‘상징과 지식’을 말하고 ‘배제되고 지연된 문학사’에 늘 깊은 관심이 있다는 소설가의 진심이 닿은 자리들의 균열과 상처도 서서히 치유되어 갈 것만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그녀의 가까운 지인들이 부러워지는 인터뷰였다. “기나긴 현재” 속에서 ‘기억을 쓰는’ 소설가 한정현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누군가의 인생엔 분명 빛나는 한 순간이 있다”는 생각으로 강바닥에 깊이 묻힌 사금을 캐내듯 그 빛나는 순간을 건져내려 신중하게 흙모래를 골라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을 기울여 찾아낸 ‘순간들’이 깃들어 있을 그녀의 다음 소설을 기다려본다. 

한정현 소설가 약력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2019년 『줄리아나 도쿄』 출간.

※ 위 인터뷰는 웹진 "문화 다"에서 진행한 것으로, 웹진 문화 다와 뉴스페이퍼가 공동으로 게시하였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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