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옥 파츠파츠 디자이너

짙은 아이라이너, 날카로운 눈매, 올블랙 의상을 입은 그는 누가 봐도 화려한 디자이너다. 하지만 그는 위보다 아래를, 결과보다 과정을, 치장보다 실리를 추구한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이유다. “항상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는 게 디자이너의 일이에요. 더우면 시원하게, 추우면 따뜻하게, 치렁하면 슬림하게 옷을 만들죠.” 그래, 임선옥(55)은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 해결사다. 더스쿠프(The SCOOP)가 ‘2017 한국 디자이너 패션 어워즈’에서 최우수 디자이너상을 수상한 임선옥 디자이너를 서울 부암동 파츠파츠(PARTs PARTs) 쇼룸에서 만났다.
▲ 임선옥 디자이너는 한국 패션의 불편한 현주소를 냉정하게 짚어낸다.[사진=천막사진관]

2016년 임선옥 디자이너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디자이너를 디자이너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20년간 매 컬렉션마다 혼신을 다했지만, 정작 디자이너의 목소리는 세상에 ‘울림’을 주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은 화려한 런웨이로 쏠렸다. 모델이 입은 ‘옷’은 디자이너의 철학으로 점철됐지만, 그게 무엇인지 관심갖는 이도 드물었다. “디자이너가 어떤 철학과 생각으로 옷을 만들었는지는 제 귀에 들려오지 않았어요. ‘누가 패션쇼에 왔다더라’ ‘누가 어떤 옷을 입었다더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게 안타까웠죠.” 
 
그사이 패션 트렌드의 주기는 더 빨라졌다. 속도전을 하는 SPA 브랜드가 속도전에 불을 붙였다. 고질적 문제이던 디자인 카피는 일상이 됐다. 카피는 카피를 낳고, 비슷비슷한 옷이 삽시간에 시장에 깔렸다. 반대로 디자인이 뛰어나도 시장에 깔리지 못하는 옷도 수두룩했다.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한 디자이너의 옷은 생명력을 가질 수 없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땅, 그곳이 한국 패션시장이었다. 그렇다고 개성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디자이너들이 한데 모여 해결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까?” 임 디자이너는 혼란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1998년 서울컬렉션에서 데뷔한 중견 디자이너 임선옥. 그는 ‘실험적인 디자인의 선두주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행보는 종종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이름값 때문이 아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흔치 않은 디자이너라서다. 사실 그만큼 한국 패션의 불편한 현주소를 냉정하게 짚는 디자이너도 드물다.  
 
“한국은 글로벌 브랜드가 나오기 힘든 땅입니다. 글로벌 브랜드가 탄생하려면 한사람의 일생을 족히 바칠 만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응축돼야 브랜드의 히스토리가 생기고 힘이 생기죠. 하지만 한국 패션업계는 아직 그럴만한 시간이 쌓이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완성하는데 평생을 바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죠.” 
 
이는 ‘팩폭’이다. 독립디자이너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6개월 동안 모든 걸 쏟아부어도 시즌 컬렉션을 준비하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디자이너들은 가욋일을 참 많이 한다. 디자인에 부어야 할 힘을 판로 개척에 쏟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아무리 옷을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면, 다음 시즌을 기약할 수 없어요. 디자이너의 옷을 바잉(Buying)해주는 시스템이 없어서죠.” 

패션, 결과 아닌 과정
 
패션 선진국으로 꼽히는 유럽 국가의 디자이너들은 언제든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유럽은 물리적인 면에서 유리해요. 여러 국가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죠.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봉제인력을 구할 수 없다면 독일에서, 독일에서도 안 되면 모로코에서 해결할 수 있어요. 컨벤션이 열리면 각국이 참여해 디자이너의 작품을 사가기도 하죠. 디자이너가 작품을 제대로 만들기만 한다면, 얼마든 판로는 확보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척박한 한국 패션시장의 환경은 임 디자이너가 ‘웨어 그레이(Wear Grey)’를 꾸리는 원동력이 됐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웨어 그레이’는 흑백의 극단성을 벗어나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는 장場을 의미한다. 2016년 5월 새롭고 창의적인 주체를 지향하는 디자이너 다섯명이 모였다. 임 디자이너를 필두로 한 경력 10여년의 박소현(POST DECEMBER), 박미선(GEAR3), 감선주(The Kam), 이재림(12 ILI) 디자이너가 그들이다. 
 
“가까이에 쇼룸이 있는 박소현 디자이너에게 동년배 디자이너들을 모아달라고 했어요. 10년차 디자이너들은 아직 브랜드가 뿌리내리지 못했거나 지명도를 확고히 하지 못한 경우가 많죠.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디자이너가 목소리를 내는 환경도 만들고 싶었다. “그동안 디자이너는 쇼가 끝나고 나면 금세 잊히는 존재였어요. 디자이너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들이 몸담은 패션업계는 어떤 곳인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죠.” 
 
실제로 사람들은 패션업계를 화려하게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그림을 스윽 그리면 드레스가 척하고 나오는 가공된 이미지 때문이다.“한벌의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아요. 수백개의 공정과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죠. 독립디자이너는 그 모든 공정을 소수의 인원으로 해내야 해요. 직원 모두가 일당백을 해야 한단 거죠. 치열하죠.” 
 
웨어 그레이가 머리를 맞댄 첫번째 주제가 ‘한국에서 어떻게 디자이너로 살아남을 것인가’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럼을 열고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들의 고민은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웨어 그레이가 비즈니스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하나의 콘셉트로 함께 컬렉션을 진행하고, 쇼룸을 공유하자는 거였어요.”

웨어 그레이는 지난해 3월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재단에서 함께 쇼룸을 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섯 디자이너가 모이니 시너지가 났고, 해외 바이어들과 언론이 주목했다. “첫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봐요. 이제 다른 시도를 해야겠죠. 지속가능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게 웨어 그레이의 목표에요.” 
 
임 디자이너가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브랜드 ‘IMSEONOC’을 ‘파츠파츠(PARTs PARTs)’로 리브랜딩 할 때도 그의 관심은 ‘지속가능한가’였다. “독립 브랜드를 운영한 지 15년쯤 됐을 때였죠. 목표가 불분명한 시기가 찾아왔어요. 앞으로 어떤 어젠다를 가져가야 할지, 디자이너로서 소명은 무엇인지를 고민했어요. 긴 고민 끝에 찾은 답이 지속가능한 패션이었죠.” 
 
▲ 임선옥 디자이너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미래를 보는 디자이너다. 사진은 파츠파츠의 생산송정을 표현한 2016년 소다미술관 ‘디자인 스펙트럼: 패션디자인 by 파츠파츠 임선옥’ 전시. 2017년 FW 서울패션위크 파츠파츠 컬렉션. 2017년 FW 서울패션위크 웨어 그레이 컬렉션에 참여한 임선옥 디자이너.(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 땐 필연적으로 폐원단이 발생한다. 많게는 원단의 20~30%가 버려진다. 옷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면 고스란히 환경에 부담이 된다. “그걸 줄여보기로 했어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선언한 거죠.” 적합한 소재도 찾았다. 잠수복을 만들 때 쓰이는 ‘네오프렌’을 단일 소재로 사용하기로 했다. 네오프렌은 커팅시 올풀림이 없어 따로 봉제할 필요가 없다. 원단을 봉제하지 않고 접착하는 방식으로, 재고가 남아도 추후에 리버서블(Reversible)이 가능하다. 제로 웨이스트에 최적화된 소재인 셈이다. 
 
통설을 깬 7년의 기록  
 
하지만 그의 도전을 많은 이들이 만류했다. ‘한가지 소재만 사용하면 망한다’는 게 패션업계의 통설이었기 때문이다. 임 디자이너는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7년 후, 숱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독특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사람들에게 단번에 각인됐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강해졌다. 
 
“폐원단을 획기적으로 줄었어요. 계절별로 디자인별로 다양한 원단을 사입해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도 덜었죠.” 두마리 토끼를 다잡은 셈이다. 몇해 전엔 컬렉션 콘셉트를 ‘제로 웨이스트’로 정하고, 폐원단 0%에 도전하기도 했다. “물론 불가능했죠. 하지만 파츠파츠의 이런 노력이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임 디자이너는 아름다운 실루엣만 좇는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디자이너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는 디자이너였다. 
 
“디자이너는 해결사예요. 더우면 시원하게, 추우면 따뜻하게, 치렁하면 슬림하게 옷을 만들죠.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게 디자이너의 숙명이에요.” 디자이너가 디자이너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디자이너가 수없이 마주하게될 문제를 해결하려면 긴 시간 익히고 닦아야 한다는 거다. 
 
“패션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을 의미하죠. 그러 면에서 그림만 그리는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라고 부르기 어렵죠. 실이 어떻게 염색되고, 직물이 어떻게 짜이고, 재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모른다면 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패션산업계에는 염색, 직물, 텍스타일, 마케팅, 판매까지 다양한 분야가 있다. 수많은 분야가 합合을 이루는 게 패션이라는 거다. 
 
“각각의 분야가 자생력을 갖고 전문가를 키워내야 합니다. 거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도, 여러 분야가 협업할 수 있을 때 한국 패션이 한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분야별 네트워크가 취약한 현재의 구조에선 디자이너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파츠파츠도 옷을 이루는 각각의 파트(Part)가 유기적으로 모여 조화를 이뤄야 하나의 옷이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패션시장의 축소판인 셈이죠.” 
 
임선옥 디자이너는 요즘 패션의 유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번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소비자가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다. 2018년 10월 부암동에 새로운 공간으로 오픈할 계획이다. “소비자가 찾아와 패션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생각이에요. 소비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디자이너가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UX(User Experience)기반의 플랫폼이죠.” 새로운 유통 생태계를 고민하는 그가 이번엔 어떤 해답을 찾았을까.  
글=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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