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광주전남작가회의는 곡성 레저문화센터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젊은작가 2차 심포지엄인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시문학"을 개최하였다. 특별히,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조태일문학축전 20주기 행사가 이어서 진행되는만큼 조태일 시를 통해 통일을 지향하는 의견도 엿보였다. 이 날 행사는 이어지는 조태일문학축전으로 인해 발표자 두 명과 토론자 두 명으로 축소하여 진행되었다.

이번 심포지엄 역시 통일문학 정립과 분단문학에서 통일문학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의 발판을 마련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광주전남작가회의는 분단과 통일에 대한 제반적 문제는 사회적인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남북한의 문학 장르는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와 후세대들의 감성적 연대가 충분히 가능한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는 문학평론가인 조선대학교 이동순 교수가 맡아 진행하였다. 이동순 교수는 시작에 앞서 "조태일문학축전과 더불어 통일을 준비하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에서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시문학'이라는 주제로 이 심포지엄이 열렸고, 두 가지 행사에 의미와 규모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이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광주전남작가회의에서 주관하는 이 심포지엄을 앞으로 통일을 대비하는 문학적인 준비"라고 생각해줄 것을 당부했다.

조선대학교 이동순 교수. [사진 = 윤채영 기자]

첫 번째 발표는 문학평론가인 동의대학교 하상일 교수가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재일조선인 시문학'이라는 주제로 진행하였다. 하상일 교수는 발표의 방향을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재일조선인 시문학에서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지점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던 강순, 김윤, 김시종, 이상 세 명의 시인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분단 구조와 재일의 현실'에 대해 발표했다. "해방 이후 약 200만 명에 달했던 재일조선인 중 60만명은 일본에 잔류했는데, 이들은 조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를 좌우 대립의 격화로 혼란에 휩싸인 조국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귀국 이후 생활의 전망이 불투명했던 경제적 어려움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재일조선인들은 남과 북으로 이원화된 분단 구조와 일본의 차별 정책에 맞서는 재일의 현실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국가의 틈새에서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재일의 생활과 현실에서 비롯된 온갖 상처와 모순 속에서 살아왔다"고 덧붙였다.

재일조선인 문학의 개념과 범주 설정에서부터 남한, 북한, 일본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창작한 주변부 소수자 문학으로, 북한에서는 총련 산하 문예동 출신 문인들이 창작한 우리말 문학으로, 남한에서는 두 가지를 포괄하는 경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하상일 교수는 "이상의 문제의식으로 볼 때,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재일조선인 시문학에 대한 논의는 남북 문학의 대립과 갈등을 그대로 답습하는 대리전 양상이 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이원화와 반통일 세력에 대한 비판'을 담은 강순 시인에 대해 발표했다. 해방 이후 재일 디아스포라 시문학은 허남기, 강순, 남시우를 시작으로 김시종, 김윤, 정화흠, 김학렬, 정화수 등으로 이어져왔는데, 강순 시인은 이제 총련계열, 민단계열에서 모두 존경받는 시인이었다.

하상일 교수는 "강순 시인은 첫 출발을 총련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나중에 총련의 너무 조직화되고, 좌경화된 것에 대해서 반발하여 총련을 떨어져 나와서, 중간 어느 지점, 경계에서 마지막까지 본인의 시세계를 펼치다 목숨을 다 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총련 내부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좌경적인 비판사업에 반발하여 <조선신보사>를 퇴직하고, 이후 어떤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재일조선인들의 실존을 구체화하는 창작 활동과 김지하, 양성우, 신경림, 김수영, 신동엽, 조태일, 이성부 등 남한의 진보적 시인들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 남은 생을 다 바쳤다"고 덧붙였다.

또한, 강순의 시세계는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서인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기조로 하지만, 초기에 발간한 『강순시집』과 총련 탈퇴 이후에 발간한 『강바람』은 그 경향에 있어서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는데, 『강순시집』에는 일본에서 우리 민족이 겪는 시련과 고통을 다루면서도 북한에 대한 찬양이나 남한에 대한 비판 등 총련 일꾼으로서의 강한 정치성을 표방하였다. 반면에, 총련을 탈퇴한 이후 창작한 시를 주로 수록한 『강바람』에는 총련과 민단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적 위치에서 재일조선인의 실존을 성찰하는 작품세계가 두드러지고 있다.

강순 시인은 1967년 <조선신보사>를 퇴직한 이후 어떤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조국 통일을 지향하는 작가적 양심과 신념을 지키며 오로지 창작활동에만 전념하였는데, 재일조선인 사회의 대립과 갈등이 조국의 분단 현실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분명히 자각함으로써, 민족 분단의 극복을 가장 큰 사명으로 하는 재일조선인 시문학의 실천적 태도와 의지를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강바람』을 엮으며 디아스포라적 주체로서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에게 통일은 관념적이고 당위적인 목표가 아닌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는데, 시인은 재일조선인 시문학이 이데올로기적 관념을 넘어 재일조선인의 실존을 구체화하는 실천적 방향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강순 시인은 재일조선인의 실존은 남북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박한 동포들의 정직한 심정과 속임 없는 내실의 형상'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각인시키고자 했던 것이며, 마지막까지 그 중심에서 어떻게 양자를 극복할 것인가 하는 그런 근절의식으로 시를 썼다.

세 번째로, '근원적 고향 의식과 분단 조국의 통일을 향한 열망'을 담은 김윤 시인에 대해 발표했다. 김윤 시인은 1950년대 전쟁 중에 부산에 모여 있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신작품』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51년 한국전쟁 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 중앙본부 선전국장 및 기관지 『한국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현대문학』의 일본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하상일 교수는 김윤 시인은 총련 소속이 아니면서도 우리말로 시를 썼는데, 이러한 그의 특이한 이력은 북한문학의 노선을 충실히 반영한 총련의 시문학과도 다르고, 일본어 글쓰기를 통해 재일의 독자성을 드러낸 민단 소속의 재일조선인 시문학과도 다르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 시문학의 독특한 지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처럼 재일조선인 시문학을 언어의식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김윤 시인의 시는 상당히 특수한 위치에 있으며, 민단 소속이었기에 총련의 강령에 종속된 이념적 태도와도 무관했으므로, 그의 우리말 시 쓰기는 조직의 강령에 구속된 강요된 선택도 아니었다. 그는 재일조선인 시인 가운데 우리말을 가장 자유롭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상당히 자유로운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김윤의 시에서 근원적 고향의식은 '어머니'라는 형상을 통해 구체화되었고, 분단 조국의 통일을 향한 열망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상황과 이데올로기적 구속과는 달리 재일조선인의 내면은 어떠한 경계나 구분 없이 오로지 민족의 화합과 단결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김윤 시인은 재일조선인 스스로가 남북의 이념적 대리전의 선봉장 역할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오로지 통일을 향한 과제에 헌신해야함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재일'이라는 '틈새'와 '재일'이라는 '통일''을 담은 김시종 시인에 대해 발표했다. 김시종 시인은 1949년 8월에 일본공산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으로 재일조선인 조직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우리말로 시를 써야한다는 언어적 문제와 제약적인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총련과 갈등을 빚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 시인 가운데 가장 활발한 시작 활동을 펼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재일조선인의 시대정신을 가장 문제적으로 담아낸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동의대학교 하상일 교수. [사진 = 윤채영 기자]

'내가 나일 때' 라는 작품 속에서 재일조선인은 언제나 '가엾은 외발'의 상태로 아슬아슬한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걸어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경계를 허물거나 넘어선다는 것은 곧 배반의 행동이 되었으므로 한민족으로서의 공동체성을 기대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시종 시인은 시를 통해 이러한 민족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재일의 특수성으로 공동체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자리를 마련, 즉 '내가 나일 때'라는 재일의 독자성으로 민족 공동체의 열린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재일'은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오히려 그 틈새를 파고드는 독자적인 장소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본국을 흉내내서 '조선'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이룰 수 없는 조선을 살아 '조선'이어야 할 자기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서울 불암중학교 권진희 교사. [사진 = 윤채영 기자]

두 번째 발표는 문학박사인 충남 아산고등학교 이동순 교사가 '조태일 시의 통일담론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진행하였다. 이동순 교사는 "조태일 시에 대한 통일담론적 고찰을 통해 그의 시적 세계의 지향이 '통일'이라는 과제와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가를 도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본론에 앞서 이동순 교사는 "분단과 통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이 무엇인가? 분단은 왜, 누구에 의해 된 것인지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서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8월에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으로 보완·발전됐으며,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2000년 6월 13일~15일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서로 합의해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조태일 시에 나타나는 통일지향성은 바로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고, 생명이 숨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조태일은 바로 강대국의 이념 대립이 불러운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분단의 고착화에 기여한 것들을 제거하고, 우리에게 주입된 분단 의식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열망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날의 통일담론의 방향성과 함께 조태일 시세계의 통일지향성의 문제를 통해서 조태일 시가 가지는 통일 인문학적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동순 교사는 첫 번째로, ''국토'의 정신과 통일 지향성'에 대해 발표했다. 조태일 시인의 시 「국토서시」는 국토와 민초에 대한 시인의 담대한 여정의 깃발이고, 지극한 애정과 민족적 서러움이 함께 얽혀있는 시편이다. '우리'를 통해 민중적 연대로서 주체적 자아를 제시하여 국토의 다양한 유형, 무형의 대상과 소통하며 묵묵히 '발바닥'과 '숨결'로 밀고 나아가야하는 숙명적 자세와 의지를 환기하고 있다고 본다.

이동순 교사는 이를 "1970년대의 폭압적인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보면 이 시는 참여시이며 민중적 정서를 발현하고 있는 민중시이며, '국토'를 중심으로 조태일의 시세계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관점,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당대의 현실과 일시적 현상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아닌 어떤 핍박의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꺼지지 않는 혼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조태일을 '국토'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도 그가 보여준 '국토' 연작시가 분단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통일의 염원을 불태우는 노래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조태일은 국토에 대한 애정을 삶의 터전을 상기하는 방식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과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 「흰 뼈로 國土 7」에 등장하는 민중의 대명사 '갑순이'는 순수한 민중의 마음을 표상하며 이념과 사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사랑으로 뭉친 한민족의 핏줄과 공존의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헤겔의 『논리학』 '존재론'에 나오는 '타자' 개념을 통해 남북한의 분단을 지양하고, 현실의 통일로 나아가는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달리 말해 타자의 존재는 나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북한의 존재를 나와 다른 타자로 본다고 가정할 때, 그는 나와 동일한 존재론적 기반을 공유하는 것이다. 같지만 다른 존재, 즉 나의 완전한 존재는 나와 타자와의 통일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 회로가 작동할 때, 비로소 북한과의 진정한 교류와 소통, 대화가 가능한데, 이러한 전제 조건을 통해 통일 담론이 마련될 때 문학이 가져야 할 자세와 취해야 할 입장도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평화사상과 통일 지향성'에 대해 발표했다. 조태일의 시는 평화의 세상을 꿈꾸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그런 세상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조태일 시인은 시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에서 보여주는 통일의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며, '꼬불꼬불한 오솔길'일지라도 우리는 신명나게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신명은 민중이 함께 어울려 가는 평화의 행진이 되어야 한다. 평화는 마음의 불안 상태가 없는 내면적 고요와 평상심에서 오고, 불안에 기생하는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민중 개개인이 하나의 자족적 존재로 만나서 서로 어울려 장단 맞추며 춤추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평화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문화 속에서 강한 연대감을 가지며, 그 연대 속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생명사상과 통일 지향성'에 대해 발표했다. 이동순 교사는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이 통일의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서 이런 공동체적인 연대감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에 "통일에 대한 어떤 것과 생명사상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조태일 시인의 작품 「꿈속에서」, 「짝지어주기」에서 아름다운 삶의 지향점, 통일에 대한 지향점을 잘 보여주고 있고,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를 통해 조태일 시인의 중심적인 생명사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슬처럼」이라는 작품을 통해 아주 여리고 작은 것일지라도 큰 힘으로 다가오고, 세상을 끌어안는 강한 우주적 힘을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순수함에 있고, 그 안에 작은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사상이 있고, 민중적인 이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을 밝혔다.

충남 아산고등학교 이동순 교사. [사진 = 윤채영 기자]

이동순 교사는 모든 발표를 마치고 "한반도가 분단된 지 70년이 흘렀지만, 통일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나 반대 여론은 늘고 있는데, 특히 젊은 세대들 가운데 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에 "통일 문학이 앞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한 앞으로의 우리의 진지한 고민은 보다 넓은 인식의 어떤 확장과 근원적인 사상으로부터 출발해야하며, 그런 것들을 조태일 시에서 저희는 충분히 찾아볼 수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주 효문여자중학교 이정관 교사. [사진 = 윤채영 기자]

이 날, 젊은작가 심포지엄에는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들과 전국국어교사모임 회원들이 함께 했다. 

심포지엄을 경청하는 광주전남작가회의와 전국국어교사모임. [사진 = 윤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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