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편집= 한송희
사진 편집= 한송희

● 일시 : 2019년 10월

● 참석자

사회 : 김지윤(시인, 문학평론가)
참석자 : 문종필(문학평론가), 김사이(시인), 신지영(소설가), 하명희(소설가)

참석자 사진 
김지윤
김지윤 문학평론가

 

김지윤: 안녕하세요? 웹진 <문화 다>는 매년 창간 기념일에 맞추어 좌담을 마련해왔는데요. 7주년을 맞은 올해는 <이 시대의 리얼리즘>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올해 웹진 『문화 다』는 ‘이 시대의 리얼리스트’ 특집을 진행 중인데요. 현 시점에서 새롭게 요청되는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를 열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동시대 타자들을 향해 가고 있는 ‘요즘 문학’의 흐름이 현실 공간의 문제를 직시하고 어떤 문학적 응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살펴보려는 특집이구요. 시리즈 인터뷰와 특집 기고 평론 등을 통해 이어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여기 모신 선생님들께서도 이미 인터뷰를 해주신 분도 계시지만.. 보다 심화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좌담회를 열어 보았습니다. 오늘의 사회자인 저는 시인 겸 문학평론가인 김지윤이라고 합니다. 오늘 함께 하실 네 분 선생님, 모두 반갑습니다.

 

문종필: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을 하고 있는 문종필입니다. 

 

하명희: 저는 소설을 쓰고 있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지영: 안녕하세요. 저는 아동청소년 문학을 하는 신지영이라고 합니다.

 

김사이: 시 쓰는 김사이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지윤: 특집 주제와 관련해서 먼저 질문을 던져볼게요. 2019년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일까요? 선생님들께서 생각하시는 현실의 반영, 작품에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부분이 있으셨다면 무엇일지 궁금해요. 글을 쓴다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평론가이신 문종필 선생님께서는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을 조명하실 때 어떤 부분에 주목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신지영 소설가
신지영 소설가

신지영: 처음부터 어려운 질문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리얼리즘은 시의성도 중요하지만 2019년이라는 특정한

시점과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그 사람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들이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 중에서도 소리 없는 사람들, 아니 계속해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소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의 삶들이 그래요. 저는 주로 어린이청소년문학을 하고 있어서인지 특히 어린이청소년의 현실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어린이청소년 역시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잖아요. 하지만 그들의 소리는 아무리 힘들다고 외쳐도 어른들의 귀에 들리지 않아요. 아니 듣지를 않죠. 그저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고 누구나 그랬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주저앉아 미래로 건너가지 못하는 어린이청소년들이 많은데 말이죠. 

 

예전에 썼던 <넌 아직 몰라도 돼>라는 시집도 그런 것 같아요. 우연히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어린이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는 내용을 봤어요. 그 순간 마음 한 구석에 어떤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상처를 입은 사람들 앞에서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그것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거죠. 이 글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 같아요.

김사이 시인
김사이 시인

김사이: 시인이 넘쳐나고 작가가 넘쳐나는 시대에 시로 밥벌이하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굳이 시를 읽지 않아도 대체할 수 있는 거리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한 일이 아니고서는 시를 찾아 읽는 것조차 너무 고단한 삶입니다. 그들에게도 시가 밥이 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아이러니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한편으로는 문학적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현실이 변화무쌍하니 그것에만 집중하게 되어, 이후의 어떤 무엇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 현실은 다양하고 다채롭다고 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패거리 문화가 여전합니다. 다름을 차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차이를 차별하고 있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가 사회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최소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이 살아가는 것, 그 삶의 내용과 방식에 대한 물음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수밖에요.

 

하명희: 리얼리즘은 ‘현실을 읽어내는 눈’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여기서 ‘현실’은 넓게 보면 사회의 현상, 변화, 구조와 같은 ‘날것 그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리얼리즘은 그 날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는 눈, 그러니까 시각, 관점이라고 하고 싶어요.  날것 그대로의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날것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고, 그것을 비틀어서 보여줄 수도 있고, 또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날것에 도달할 수도 있어요. 작가는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취해서 작품을 통해 질문하는 거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본다, 라고. 넓게 보면 그렇지만 문학, 특히 소설은 일단 등장인물이 나오잖아요. 그 인물이 20세기 인물일 수도, 21세기 인물일 수도 있어요. 문학은 20세기 인물을 통해 21세기의 문제를 얘기할 수도 있다는 게 흥미로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2019년이랄지 한국이랄지 하는 것에 구속받지 않고도 그것을 얘기할 수 있는 것 말이죠.

 

   질문하신 “글을 쓴다는 것이 이 사회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작가가 이런 보이지 않는 사회 혹은 세계, 자신 자신과 어떻게 싸우는가가 전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 결과물로 사회에 뭔가 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면 좋은 거겠죠.

 

문종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리얼리즘의 극단에는 모더니즘이 있고, 모더니즘의 극단에는 리얼리즘이 있죠. 이 두 요소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자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 <조커> 감독 토드 필립스의 말처럼 “좋은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론가로서, 저의 경우에는 네 가지 방식으로 작품과 마주하는데요. 바로 ‘죽음’, ‘생명’, ‘자유’, ‘사랑’입니다. 죽음을 응시하는 태도로 작품을 쓰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당당한 작품과 적극적이지 못한 작품을 구분합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도마 위에 파닥거리는 생선의 몸짓처럼 죽을힘을 다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표현했는가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구분합니다. ‘자유’와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개념은 모든 금기에서 발생하는 억압으로부터 틈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정서가 작품에 얼마만큼 녹아져 있는지를 찾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금기’를 뚫는 행위가 윤리적인 영역과 만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네 개념을 통과한 작품들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지금 이곳의 풍경을 잘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방법을 통해 작품을 바라보고 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글쓰기를 이행합니다. 누군가는 저의 이러한 발언이 자의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의 취향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고 걱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자 즐거운 방법입니다. 제가 즐거운 방법이라고 말한 것은 평론가의 자의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특정한 작품을 논하는 입장에서 저의 시선과 일치할 때 글쓰기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에 나의 이야기와 작품 속의 화자가 긴장의 영역에서 줄다리기를 시작합니다. 실패할 때도 있지만 작품 속에 들어가 화자와 함께 어깨를 부딪치려고 노력합니다. 

 

김지윤: 문학이 현재의 여러 사회문제, 특히 불평등과 사회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한다면, 여기서 리얼리즘 문학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문종필 평론가
문종필 평론가

문종필: 문학이 지금 이곳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긍정적인 힘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서른네 살의 경력단절 여성인 주인공 김지영이 맞닥뜨린 사회적 불평등을 독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설득시켰습니다. 이 반응에 대답하듯 최근에는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소비하는 행위는 ‘불평등’이라는 부조리에 공감한다는 말이 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불평등의 문제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조남주 소설뿐만 아니라 최근에 읽은 김봉곤 씨의 「그런 생활」과 「러브 라이프」, 박상영 씨의 「동경 너머 하와이」는 동성애의 편견을 허물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밀어 올렸고, 손미 씨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고(故) 오상룡 씨의 『텅텅 가벼웠던 어떤 꿈 얘기』, 김건영 씨의 『파이』 등은 병든 주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의 이야기를 문제 삼았습니다. 자본주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김학중 씨의 『창세』와 「판」이 있었고, 문보영 씨 또한 점점 줄어드는 원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금 이곳의 풍경을 『배틀그라운드』를 통해 이야기했습니다.

 

  3·1운동을 시작으로 8·15 해방, 4·19혁명을 거쳐 피와 통곡의 바다가 되었던 5·18, 6월 항쟁, 세월호의 아이들과 촛불 혁명까지의 시간을 다룬 권서각 씨의 「광화문 별곡」, 신을 경유해 세월호의 모순을 문제 삼은 천영애 시인의 시집, 노동의 문제를 다룬 최경주 씨의 『사막의 모래바람』, 조혁신의 『무라카미 하루키 음악다방』, 이상실의 「콜트스트링의 겨울」  등의 작품들은 지금, 이곳의 문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지금 최근에 읽은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좋은 작품들은 지금 현재도 무수히 많이 쏟아지고 있고 계속해서 지금 이곳의 문제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궁극에는 ‘나’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공감’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힘이 사회의 부조리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지만 우리들의 영혼에 강력한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흔적이 ‘나’와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문학이 소비되는 형태가 자본의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인데, 냉철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지영: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어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또 사회 문제라는 것이 쾌도난마처럼 단칼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을 풀면 또 다른 곳에 매듭이 생기는 그런 문제들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앞서 말한 듯이 마음이 움직이는 지점에서 쓰고 말하는 형식으로 쓰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운이 좋게 한두 명씩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또 그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이 그것을 읽은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게 시작일 것 같아요. 그리고 문학이 법이나 경제처럼 사회를 가시적으로 유지하고 움직이는 거대 담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법이나 경제가 소외시킴으로써 사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어쩌면 느리지만 더욱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겠죠.

 

김사이: 정치도 난장판인데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산다는 것이 무엇일지요. 어디쯤에 서 있는지 막막합니다. 무엇엔가 홀린 듯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언제고 길은 만들어지거나 길을 찾아내거나 하겠지만 지금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본주의가 잘못됐음을 인지할 것입니다. 아이들도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압니다. 청년실업이나 비정규직 차별 그리고 남녀 임금 격차 등 사회가 불평등하고 부당하다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멀어진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섣부른 낙관도 노골적인 냉소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문학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명희 소설가
하명희 소설가

하명희:  김사이 시인 말처럼 사실 요즘은 너무 암담해요. 저는 사회 문제의 핵심에는 삶의 질을 담보하는 노동이 그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느냐가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는 사람입니다. 최근 20여 년 동안 노동사회의 구조가 변화했잖아요. 안정적인 일자리는 비정규직으로 대체되었고, 저임금 하도급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가고요. 며칠 전에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에서 발표한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2019. 8)를 다운 받아서 살펴봤어요. 이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2018년 산재 사망자 수를 2,142명으로 보고하고 있어요. 그러면 하루에 6명이 산업 현장에서 사망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보세요. 지난해 한국에서 자살한 사람들은 숫자로만 13,670명이래요. 하루에 3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가 한국이라는 말입니다. 수치로만 보면 전 세계에서 산재 1위, 자살 1위국이 한국입니다. 문학 이전에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기란, 절망적이지요. 

  작년에 출간한 제 소설집에 실린 「불편한 온도」에는 타워 크레인 조종사가 나오는데요. 제가 어느 크레인 기사의 사망사고에 붙은 한 문장에 충격을 받고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최근 6년 동안 300여 명이 넘게 크레인 설치와 해체 과정 중 사망했다”는 한 줄이요. 말도 안 돼. 같은 직업군에서 사고가 아니라 사망자가 300명이 넘게 나와도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가망이 없다, 그때 제 생각은 그랬어요.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한 줄 기사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이걸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서 취재해서 소설을 썼어요. 그런데 지금 김용균법이 발의되고 이런 보고서가 나왔는데도 사람들이 무덤덤하잖아요. 이렇게 명확한 수치를 들이대도 어쩌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건 노동 현장의 변화만으로는 안 되는 거구나 싶어요. 현장의 변화도 촉구해야 하지만 그와 함께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 숨 막히는 사회에 대한 전방위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문학은 스스로 이 죽음의 수치들 앞에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제가 느끼는 수치심은 그래요.

 

김지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여기에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사실을 추문으로 만든다.’는 김현의 유명한 말이 선생님 말씀 위에 겹쳐지네요. 배고픈 거지가 있는 현실을 추문으로 만들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 선생님 말씀처럼, 보고서의 수치와 통계만 보아서는 무덤덤했던 사람들도 선생님께서 쓰는 소설 속 살아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접하며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문학의 힘일 것 같습니다. 선생님 표현을 빌리면 ‘수치심’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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