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우동 프랜차이즈‘용우동’

15년을 우동 하나로 버틴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있다. 전국적으로 200개에 육박하는 가맹점을 가진 ‘용우동’이다.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를 넘어 세계 우동시장의 ‘드래곤(용)’을 꿈꾼다는 이영찬 대표를 만났다.

1970~80년대, 기차는 대중교통의 중요 수단이었다. 이때 유명했던 것이 대전역 가락우동이다. 3~5분 정차시간 중 급하게, 그러면서도 맛있게 먹던 기억. 용우동은 이런 추억을 밑바탕으로 탄생했다. “경북 의령 출신인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어요. 상경하던 중 대전역에서 가락우동을 맛있게 먹던 기억이 너무도 강했죠.”

▲ 용우동은 차별화된 메뉴개발을 통해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내밀겠다는 계획이다.
이영찬 대표의 시작은 작았다. 의류업에 종사하다 크게 실패한 뒤, 1997년 인천 인하대 후문 쪽에 조그만 매장을 열었다. 메뉴는 8가지. 우동, 떡볶이, 김밥, 쫄면, 야채비빔밥 등 자신 있는 요리로만 준비했다. 1년도 안 돼 대박을 쳤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대학생 뿐 아니라 주부, 직장인까지 몰렸다. 비결은 우동의 육수였다.

“한국의 우동육수는 일본과는 달리 멸치, 다시마, 양파 등을 중심으로 깊게 우려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재료의 비율, 끓이는 시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육수를 우려냈죠.”

맛을 보고 버리기를 수 십번, 인고의 노력 끝에 명품 육수가 탄생했다. 

1998년이 지나면서 프랜차이즈 매장을 오픈하고 싶다는 창업자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수창업 형태였다. 당시에는 분식전문점의 프랜차이즈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육수를 만드는 법 등을 전수하며 12개 매장을 추가로 오픈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똑같은 레시피를 전수했지만, 만드는 점주마다 맛에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교육하고, 화도 내고, 당부도 했지만 점주들이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 대표는 지금과 같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도입했다. “소스 체계로 전환을 결정했죠. 일괄적으로 소스를 만들어 매장에 공급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일부 점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점주 한명이 용우동의 레시피를 이용해 또 다른 우동 프랜차이즈를 시도한 것이다.

“전수창업으로 우동 레시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주가 욕심이 생긴 것 같아요.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3년간의 법적 소송으로 이어졌죠. 결국 승소했지만 마음고생이 컸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용우동은 2001년 수도권에만 100개 매장을 돌파했다. 대표 우동 분식 프랜차이즈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2003년 또 한번 시련이 닥쳤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개발붐이 불면서 상권이 변한 것이다. 일부 매장의 매출이 감소하면서 가맹점 개설에 대한 활로 모색이 필요했다.

수도권을 벗어날 필요성도 이때 나왔다. 이때부터 이 대표는 매장 인테리어와 상호를 과감하게 리뉴얼했다. 위기를 전국 브랜드화로 돌파하려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용우동은 현재 전국적으로 170여개 매장이 성업 중이다. 대부분의 매장이 오픈한지 4~5년 이상 된 경력점포다. 그만큼 매출이 안정적이다. 그로 인해 브랜드와 본사 신뢰도가 높아졌다.  

이 대표는 올해도 용우동 리뉴얼을 고민 중이다. 메뉴를 15개 정도로 대폭 줄여 우동의 전문성을 강화할 생각이다. 이를 토대로 용우동의 브랜드를 굳건히 한다는 계획이다. 세계 우동시장의 ‘드래곤(용)’이 되겠다는 이 대표의 용트림이 시작됐다.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