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언젠가 환자였고 언젠가는 또다시 환자가 됩니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저자 하정아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저자 하정아

보름달이 휘영청 중천에 떴어요. 사람들의 구릿빛 피부에 달빛이 내려와 부서지고 있는데요. 황금빛으로 반짝였어요. 낮에는 연노랑빛이었던 치아가 시리도록 희게 보여요. 달빛은 사람을 신비하게 변화시켜주지요. 무릇 사랑하는 사람들은 달빛 아래에서 만날 일이에요.

-‘바하 힐링 미션’,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중에서.

[뉴스페이퍼 = 송진아 기자] 어느덧 코끝이 시린 겨울이 찾아왔다. 모두 옷깃을 여미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한때, 난롯가에서 읽기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인류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이 묻어나오는 에세이집 “그레이스 피어리어드(Grace Period)”다.

도서출판 바람꽃에서 출간한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저자 하정아 작가는 현재 LA에서 간호사로 재직 중이다.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편집기자로 일하다 간호대에 입학해 공부를 마친 후 줄곧 간호사의 삶을 살아냄과 동시에 미주 문단과 한국 문단을 아우르는 꾸준한 작품 창작 활동 역시 이어가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곳곳에는 한 자 한 자 눌러쓴 듯한 잔잔한 마음이 가득했다. 뉴스페이퍼는 부쩍 쌀쌀해진 날씨를 맞아 “살아있는 동안에,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다독여주자.”고 말하는 하정아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표지 [사진 = 김보관 기자]

Q1. 미국에서 사신지 어언 삼십여 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간 타국에 적응해 사시는 데에는 녹록지만은 않은 시간이 함께 했을 텐데요. 미국에 정착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1986년 3월, 조국과 가족을 떠나 미국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유학이나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결혼으로 인한 떠남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환경 속에서 정체성 혼란과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울하고 불행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귀와 입이 트이면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점차 이 땅에 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에 교포문단에 발을 들인 후 일간지에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편집과 번역 일을 하던 중 대학에 들어가 간호학을 공부하고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공부하고 일하는 동안, 한국과 미주 교포문단에서 활동하면서 멈추지 않고 글을 썼습니다. 이제 고국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이민의 시간이 더 깁니다. 낯선 이 땅이 마음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끼는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연륜 때문이 아니라 내 아이들의 고향인 이 땅에 묻혀야 한다는 자아교육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자세를 갖도록 합니다. 지금은 주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제 안에서 타협한 인식을 통해 우러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민 초기에 느꼈던 외로움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독이 깊어지지만 제 문학의 산실이자 토대임을 알기에 동행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저자 하정아

Q2. 작가소개를 통해 현재 재미수필문학가협회와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남가주한인간호사협회 평생회원이자 이사, 재외한인간호사협회 평생회원이라고 밝혀주셨습니다. 미국 내에서 창작과 삶을 이어가시면서 특별히 인상 깊은 사건이나 감상이 있으실까요?

제 이민의 삶은 수필문학과 간호사라는 직업과 여행을 통한 자연과의 교류, 세 가지로 꼴 지을 수 있습니다. 웅대한 자연을 접하고 병원에서 다양한 민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상 자체가 제 글쓰기에 자양분을 제공합니다. 

자연 속에서 영혼의 쉼을 얻곤 합니다. 대자연 앞에 살 때마다 벅찬 감정에 압도당하곤 합니다. 미국의 건국 역사는 짧지만, 이곳에 살았던 토착 원주민들의 역사는 길고 깊습니다. 이들의 삶의 흔적이 제게 커다란 영감을 줍니다. 미국은 어느 곳에 가든지 수천 년 전 옛사람의 숨결과 옛 자연의 정취를 고스란히 감촉할 수 있습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다양한 문화 체험은 삶에 풍요로운 감각을 제공해줍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죽음과 주검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자세입니다. 이들은 주검 앞에 서면 자기감정에 빠져서 수선스럽게 울거나 크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경건하고 엄숙하게 망자를 지켜봅니다. 얼굴 전면은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흥건한데 닦거나 흐느끼지 않습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그들의 눈물이 제게 큰 감동을 줍니다.   

수필은 제 인생에 베스트 프렌드입니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힘들고 외로울 때, 기쁘고 행복할 때, 변함없이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수필을 쓰면서 세상 상처를 치유 받고 위로받습니다. 수필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곡진한 이민의 삶을 견딜 수 있었을지 상상이 안 됩니다. 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함께 해준 제 글들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어 책을 출간합니다. 홈레스처럼 흩어져 춥고 어두운 길거리를 헤매는 글 나부랭이들에게 소박하지만 따뜻한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묶습니다. 여행 단상과 간호 경험을 테마 수필로 표현하는 기쁨이 큽니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일부 [사진 = 김보관 기자]

Q3. 작가로서의 활동 못지않게 간호 현장에서 ‘우수 간호사’로서 뛰어난 임무를 수행해내시며 많은 생명과 함께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가지 형태의 삶이 서로에게 주는 영향도 있을 듯합니다. 간호 수필을 쓰시는 것 외에 어떤 식의 교류나 영향이 있으셨나요?

간호 현장은 제 인격과 품성을 함양시켜주는 클래스룸입니다. 환자들은 제 인생의 멘토로서 간호사가 되지 않았다면 결코 얻지 못할 가치들을 가르쳐줍니다. 육신의 질고를 통해 얻은 성찰과 지혜로 가득 찬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합니다. 환자를 돌볼 때마다 그들의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보다는 그 안에 갇혀있는 내면의 외로움과 고통이 먼저 보입니다. 인간적인 연민과 공감 의식이 샘솟아 병동 일이 즐겁습니다. 

병동의 세 가지 키워드는 조화와 협력과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동료들과의 관계나 환자 간호에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컨셉입니다. 병동에서 접하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제게 늘 경이와 도전을 줍니다. 세상의 구조 안에 머물되 세상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환자들이나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눈 진실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일상을 서사로 만들고 감정을 서정으로 만드는 글쓰기는 창조에 버금가는 일입니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 표지 [사진 = 김보관 기자]

Q4. 책 “그레이스 피어리어드(Grace Period)”는 작가님이 LA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은 동시에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전달하는 에세이집입니다. 많은 표현과 목차 중에서도 특히 유예기간, 은혜의 기간을 뜻하는 ‘그레이스 피어리어드(Grace Period)’를 책의 제목으로 삼으신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는 제가 일하는 병원에서 직원들에게 주는 출퇴근 유예 시간인데 6분입니다. 인생도 6분, 6시간, 6일, 60일, 6년 단위로 살면 좀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삶의 시간을 대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제목을 발음할 때마다 저 자신이 이해받고 용서받는 느낌이 듭니다. 가까운 사람들도 ‘그레이스 피어리어드’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하더군요.  

현대인들은 여러 각도로 지구멸망과 인류 종말을 예고합니다. 그러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삽니다. 지구 차원의 거대 담론보다는 자기 자신의 종말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소한 순간을 돌보아야 합니다. 1년보다는 365일을 사는 것이 더 풍요롭고 365일보다는 8,760시간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의 시간이 내 몫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하루, 한 달, 일주일, 일 년을 빌린 것으로 생각하면 삶의 태도가 진지해지지 않을까요?

Q5. 이번 에세이집 “그레이스 피어리어드(Grace Period)”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것 한 가지만은 꼭 전하고 싶다!’라고 손꼽는다면 무엇이신가요?
 
에필로그에도 썼지만 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환자였고 언젠가는 또다시 환자가 됩니다. 간호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픈 나를 돌보아줄 간호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원할까요. 나 자신조차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내면의 상처와 갈망을 읽어내어 주는 심안을 가진 사람 아닐까요. 내가 아프고 외로운 만큼 내 이웃도 아프고 외롭습니다. 우리가 간호사 정신을 발휘하여 서로를 감싸고 보듬어 준다면 우리가 머무는 이 공간이 좀 더 따뜻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힘든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보다 더 최악의 상태와 비교해보고 스스로 위로받고 힘을 내야 합니다. Live well, Laugh often, Love much! 건강하게 살고, 자주 웃고,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저자 하정아
“그레이스 피어리어드”의 저자 하정아

Q6.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파블로 네루다를 생각합니다. 그는 연인과 헤어진 날 밤,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시를 씁니다. 그러니까 어느 아픈 상황이라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결코 손해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인가요. 글을 쓰는 동안 어지럽던 생각이 정돈되고 힐링을 경험합니다. 

글을 쓸 수 없을 때는 독서합니다. 독서의 힘은 큽니다. 삶의 해석과 변화를 향한 의지를 발휘하는 힘을 주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를 줍니다. 오감으로 아는 시공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맛봅니다. 세상 시름이 접히고, 어느새 내면의 힘이 강화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이 그랬고 27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넬슨 만델라가 그랬습니다. 1시간 독서하면 아무리 큰 슬픔도 시든다고 몽떼스끼외는 말했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구도하듯 치열한 독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도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가정주부, 직장인, 수필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에 있다 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살든 무엇을 하든 물리적인 요소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인식하고 성찰하는 만큼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저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만큼 나 자신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실수를 용서해주자. 삶 자체를 즐기는 마음으로, 가꾸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맞이하자. 그렇게 맘먹으니 매사가 평안합니다. 내면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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