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무중력의 상태, 변화하는 시 세계와 함께

[뉴스페이퍼 = 이민우 기자] 세월호 참사 이후 5년이 지났다. 당시 정우영 시인을 비롯한 이시영, 황현산 등 문인 754명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박근혜 정부의 대응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우리는 이런 권력에 국가개조를 맡기지 않았다’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시국선언에 동참한 문인들을 포함한 예술인 9,473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문화예술계 정치검열이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의 출간 소식과 함께 만난 정우영 시인은 혼란한 정세 속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일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는 국가라는 체제가 명백하게 작동하지 않은 것”이라며 “박근혜 시대에 첨예하게 싸운 기억들이 현재의 문학적 인식으로 이어졌다.”고 되짚었다.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의 정우영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

“당시는 한국작가회의가 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개인적으로 작품 창작 활동에 공백이 생겼다.”라는 말로 운을 뗀 정우영 시인은 최근 2, 3년 동안은 읽고 쓰는 일에 매진해왔음을 전했다. ‘그간 못했던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이어 “‘문학’하는 자는 결국 글로써 말해야 한다. 문학인이라면 문학작품을 토대로 다음 행보를 이어 나가야 한다.”며 “그런 생각에서 작년에 시집 “활에 기대다”를, 올해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를 발간하게 됐다.”고 밝혔다.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 [사진 = 김보관 기자]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 [사진 = 김보관 기자]

이번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는 그간 정우영 시인이 꾸준히 집필해온 것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크게 4부로 나누어지는 “시에 기대다”는 정우영 시인이 저술한 작품론들을 엮은 제1부 ‘다감한 것들의 기척’, 시집 촌평을 묶은 제2부 ‘시의 첫 마음’, 시인론을 담은 제3부 ‘좌절과 성찰의 시’와 더불어 융합적 리얼리즘을 다룬 제4부 ‘무중력과 중력 사이’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제4부 ‘무중력과 중력 사이’라는 이름의 ‘융합적 리얼리즘론’이다. 해당 목차명과 관련해 정우영 시인은 “우리는 누구나 중력 상태다. 그러나 최근의 시나 소설에서는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중력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관찰된다.”라고 설명했다. 

“현실에 버티고 있다가는 목숨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한 몸부림을 치다가 ‘벗어난 이들’이 있다는 해석이다. 정우영 시인은 “그들의 문학은 중력이 없다. 시공간조차 해체된다.”라며 “이러한 경향들은 문학적 계파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체계나 세계관의 측면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최근 시의 한 흐름으로써 ‘융합적 리얼리즘’을 규정하고 예시가 되는 시인들을 찾아 그 작품을 살펴보았다. 정우영 시인이 왜 이를 ‘융합적 리얼리즘’이라 칭하는지 시를 예로 들어 세심하게 분석하고 밝히는 식이다.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의 정우영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의 정우영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

정우영 시인은 “문예지나 시집들을 읽고 있으니 세월호 전후가 굉장히 달라져 보였다.”라며 “특히 리얼리즘 시를 썼던 이들이 아닌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변화가 포착됐다.”라고 했다. 그 와중에 ‘이게 뭐지?’ 하는 문제의식은 조금씩 자라났다.

그러던 중 최종천 시인의 작품에서 정우영 시인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혼재를 읽어냈다. 정우영 시인은 이를 “원래 모더니즘 시 쓰던 사람이 노동현장에서 리얼리스트로 바뀌었다. 힘든 삶 속에서 모더니티는 리얼리티로 변모했다.”라고 표현했다. 

바다는 사월의 날씨를 집결한다
해파리가 뜨겁다 가오리가 가깝다
열대어는 차갑다
심해어는 내 방을 엿본다
-김소연, ‘열대어는 차갑다’ 중에서.

정우영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 무렵 비슷한 흐름이 동시에 나타났다. 특히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뚜렷이 관찰됐다. 정우영 시인은 ‘융합적 리얼리스트’의 매개자로 김소연 시인을 손꼽았다.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은 2013년 11월 출간된 책으로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표됐다. 그러나 ‘열대어는 차갑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등에서 김소연의 위기의식은 세월호와 예감적으로 연결된다.

(중략) 세월호 대참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그러므로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다. 도착된 현실과 전도된 언어로 망가질 만큼 망가진 사회에서 부패한 인간들이 빚어낸 대재앙인 것이다.
나는 김소연이 이와 같은 당대 현실의 처참한 불안에 떨며 그도 모를 어떤 징후를 포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시인의 직감은 때로 과학적인 상식과 시공간을 벗어나 어떤 기억들을 미리 감촉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우영, “시에 기대다” 중에서.

정우영 시인은 “우리가 딛고 있는 삶이 전체를 흔들었다. 그럴 때 문학이 언어와 이미지만 쫓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라며 “국가가 주는 막대한 고통과 개인의 아픔이 결합해 또 다른 경향성이 나타났는데 뭐라고 호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했다.

그는 “문학이 가진 속성 중 하나는 무의식과의 스파크다.”라는 말과 함께 인터뷰를 이어갔다. 정우영 시인은 “융합적 리얼리즘은 무의식과의 스파크에 닿아 있다.”며 “일상적 삶을 기본 토대로 삼되,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 삶과 무의식이 마찰하며 발생하는 섬광을 문학작품으로 나타내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러할 때, 당신에겐 어떤 생각이 스치는가. 우리 시의 미래가 암울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희연과 신철규에서 보듯, 무중력과 중력을 오가면서도 시의 개방성은 커지고 시인의 성찰은 깊어진다. 이렇게 자각된 이들의 정체성은 다시, 현실과의 분투와 교감 속에서 이 세계를 뒤흔들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게 융합적 리얼리즘의 열린 확장성이라고 본다.
-정우영, “시에 기대다” 중에서.

해당 대목에서 정우영 시인의 문학관 또한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문학이나 예술은 세상에 없는 단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창작’이라 함은 남들도 다하는 무엇이 아닌 ‘그 사람만의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다.”라고 설파했다. 자신만의 시선과 세계관을 갖고 세상과 만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시인은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건 창작이라고 할 수 없다.”라며 “새로운 창작물 하나가 등대가 되어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예술이 창조해낸 덩어리가 문화다. 그러므로 문화는 창달되는 게 아니다. 예술적 행위가 모여 이뤄지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문학에서 예술, 문화까지 아우르는 자신의 신념을 전했다.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의 정우영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

인터뷰 말미 신간 “시에 기대다”를 ‘시평에세이’로 규정한 이유도 밝혔다. 정우영 시인은 “최근의 평론이나 시론집들을 보면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렵다. ‘당대의 문학론이나 철학을 알지 못하면 현재의 시조차도 알 수 없단 말인가.’하고 자탄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전문적인 용어들을 그대로 전달하면 독해가 힘들어진다. 누군가 들뢰즈 식으로 내 시를 읽으면 시를 읽기 전에 들뢰즈부터 알아야 하는 식이다.”라고 꼬집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낀 정우영 시인은 시집에 해설, 발문을 쓰거나 소개할 때 인용을 최대한 경계했다. 설사 필요한 내용이 있더라도 시인 자신만의 언어로 녹여서 실었다는 후일담이다. 그렇기에 그는 ‘시평’이 아니고 시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에세이’를 썼다.

정우영 시인은 “작업에 몰두하다가 어려운 말이 나오면 스스로 멈춘다. 가급적이면 부드럽고 문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려 했다.”는 말로 ‘시의 느낌’을 기술하는 순간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시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주는 느낌을 받아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에 시인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며 멋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우영 시인이 제기한 ‘융합적 리얼리즘’은 세월호 전후 암울한 시대적 현실과 시인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스파크의 산물이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정우영 시인의 시적 사유와 감각이 담긴 시평에세이 “시에 기대다”는 뚜렷한 방향을 찾기 힘든 현대 시단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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