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의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의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만큼도 나를 알지 못하는

당신들이 내 뒤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에게 내가 하고픈 말이 있다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좀도둑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고
살인자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어

-최영미 시인의 ‘자격’ 중에서.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 김보관 기자]

[뉴스페이퍼 = 송진아 기자] 최근 1인 출판사를 운영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최영미 시인의 개정증보판 시집 “돼지들에게”가 출간됐다. 지난 11일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최영미 시인은 “돼지들에게”에 실린 시작 시 세 편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개정증보판 시집에 실린 신작 시 중 하나인 ‘자격’이라는 시는 2018 미투 국면을 떠올리게 한다. 최영미 시인은 당시를 회상하며 “명예훼손에 가까운 기사도 많았으나 누구든 자신이 목도한 부당함에 관해 폭로하고 용기를 낼 수 있다. 시 ‘자격’에는 이러한 생각과 감상을 담았다”고 전했다. 최영미 시인에게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번 시집 “돼지들에게”에 새로 실린 시 세 편은 직전 시집인 “다시 오지 않는 것들”에서 불가피하게 제외된 시들이다. 고은의 손해배상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때라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시를 삭제했다고 한다. 시집 “돼지들에게”에서 새로 만날 수 있는 최영미 시인의 시는 앞서 언급한 ‘자격’과 ‘치읓’, ‘착한 여자의 역습’이다. 고은은 최근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패소하고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개정증보판 시집 “돼지들에게” 표지

최영미 시인은 표제작 ‘돼지들에게’를 창작하게 된 배경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온갖 낭설과 소문이 떠돌았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시인은 모티프가 된 문화예술계 인사는 있으나 비단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밝혔다. ‘돼지들에게’는 미투 국면이 있기 이전에 발표된 작품이나 문학계 성범죄자들을 고발한다는 측면에서 최근 화제가 된 ‘괴물’이나 신작시 ‘자격’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크게 보았을 때,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이상한 편견이 있는 듯하다.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릇된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며 시 ‘돼지들에게’를 집필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가 부당한 일을 겪고 집에 돌아온 날, 집에 높여있던 성경책 눈에 띄었다. 그중 마태복음 7장 6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시인은 “당시 많은 이들이 나에게 ‘진주’를 기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경 구절이 떠오르자 ‘내가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특정 자리에 나간 자체가 후회되고 시간이 아까웠다.”라는 말을 전했다. 이후 순식간에 시를 써 내려갔다.

최영미 시인은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시를 완성하고 외출을 위해 우산을 켜다 손이 베여 피가 나왔다. 그 아픔을 기억한다. 핏방울을 기억하고 베인 듯한 고통을 기억한다.”며 한편으로는 “탈고한 순간 전에 누리지 못한 창조자의 기쁨”을 느꼈다고 밝혔다. 전까지는 경험에 의존해서 시를 썼다면, 시 ‘돼지들에게’는 “상상력이 경험을 압도하는 순간”을 겪었다는 것이다.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의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의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이상한 쪽으로 쏠리기도 했다. 최영미 시인을 만난 많은 이들은 무례하게 시 ‘돼지들에게’의 모델이 누구인지를 물었으며 터무니없는 소문을 양산해냈다. 이는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돼지들에게”의 초판이 출간된 십여 년 전 기자간담회에서조차 초점은 ‘돼지가 누구냐’와 ‘왜 진주를 주었냐’에 맞춰졌다. 혹자는 최영미 시인과 진주를 동일시하는 해석을 덧입히기도 했다. 

최영미 시인은 “나의 대표작이 될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며 “페미니즘적으로 읽으면 또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큰 맥락에서 시를 읽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더불어 “왜 진주를 주었냐고 묻기 전에, 왜 진주를 달라고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탓해야 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시 ‘돼지들에게’에서 ‘돼지들’은 비단 특정인 한 명이 아니라 문학적 명성을 가지고 성추행을 일삼는 작가, 사회적 지위와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성추행을 가한 교수, ‘대의명분’을 앞세워 성폭행쯤은 당연한 일로 치부한 사람 등을 의미한다. 이는 모두 최영미 시인이 실제 만나온 가해자들이다. ‘돼지들’은 이들을 빗댄 것이자 여전히 존재하는 성범죄 가해자들에 대한 상징이다.

이야기 중인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시 ‘괴물’을 통한 고은 성희롱 폭로와 관련한 질문에는 “더 훌륭한 문인들이 고발하지 않아서 내가 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영미 시인은 최근 이상문학상 사태를 바라보면서 “수많은 미투와 폭로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문단의 허망한 권력, 보이지 않는 권력에 맞서 세상이 조금씩 변하는구나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이어 “문단 체제가 굴러가는 하나의 힘 중에 문학상이 있다. 많은 문학상의 심사위원이 겹치고 소수가 독점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취향이나 눈 밖에 나게 되면 인정받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된다.”라며 “혼자 싸우기엔 거대한 집단 앞에서 불이익을 감수한 젊은 작가들의 용기를 지지한다.”고 했다. 확신에 찬 눈빛의 최영미 시인은 “그러나 한두 번의 시도로는 부조리가 쉬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함께 변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젊은 작가들이 불이익을 겪지 않고 작품으로 생존할 수 있길,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작가 역시 설 자리를 얻을 수 있길 염원한다.”고 덧붙였다.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의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돼지들에게”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현장의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잔치가 끝난 뒤에도 설거지 중인
내게 죄가 있다면
이 세상을 사랑한 죄밖에.

한 번도 제대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비틀거리며 가는
세기말, 제기랄이여.

-최영미 시인의 ‘세기말, 제기랄’ 전문.

본지 기자가 시집 “돼지들에게”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작품에 관해 묻자 환한 미소와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최영미 시인 역시 아끼는 ‘세기말, 제기랄’은 1999년경 청탁 없이 쓰인 시다. 당시 시인은 속초에 생애 처음 전망 좋은 집을 마련하고 면허를 따고, 동생의 아이를 돌봐주는 나날을 보냈다. 자신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과 달리 화려하지 않은 일상적 나날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눈빛은 밝게 빛났다. 

또 다른 기자는 “세 편의 시를 제외하고 모두 기발표작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 현재를 그리고 있는 따끈따끈한 시처럼 읽힌다.”는 감상을 전했다. 최영미 시인은 “내 작품을 빼놓지 않고 모두 읽는 친구 중에서도 ‘이런 시가 있었어?’하고 묻는 이들이 있다.”며 “여기에는 부당함을 오래 기억하고 곱씹는 민감함이 큰 몫을 했다. 원치 않는 접촉과 같이 여러 번 겪어도 불편한 일들에 대한 예민함, 믿고 있던 시대 이데올로기 등이 시에 반영된 듯하다.”고 답했다.

이야기 중인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이야기 중인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그처럼 당연한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했던가

박정희가 유신을 거대하게 포장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논리를 과대포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최영미 시인의 ‘시대의 우울’ 중에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이른바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최영미 시인은 한 미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조직에 있어 본 자만이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을 상기했다. 더불어 “대중들은 어떤 운동에서 앞장선 사람만 본다. 그렇지만 그 흐름이 흘러갈 땐 뒤에서 밀어주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며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한때 함께하던 이들의 변심을 보며 진보 진영의 모순을 느끼기도 했다. 가려져 있었지만, 보이는 사람에겐 보였다.”고 했다.

시인의 소설 “청동정원”에도 등장하듯 운동권 내 성폭력 문제도 적지 않았다. 최영미 시인은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기도 하고 더욱 심각한 일도 빈번했다. 24시간 근무와 합숙이라는 환경, 학생에서 노동자까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모임 속에서 비단 성폭력뿐만 아니라 숱한 문제들이 잠식되어있다가 나중에 드러났다. 

최영미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 같은 정서를 담은 시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다. ‘청산주의자’라는 일각의 비판과는 달리 ‘잔치의 종말’은 ‘새로운 잔치의 시작’이기도 하다. 시인은 “잔치를 끝낸 것은 내가 아니라 변모한 자들이다.”라고 단언했다.

운동권의 심각한 황폐화를 맞이하며 뿔뿔이 흩어진 이들 중에는 끝끝내 노동단체 등에 남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판이 깨진’ 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회의감에 빠졌다. 최영미 시인은 서른 살 무렵 집을 나서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고민을 이어가던 중 시를 쓰고 문학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이야기 중인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이야기 중인 최영미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최근 1인 출판사를 차린 최영미 시인은 “내 맘에 드는 표지와 신간 안내를 직접 제작하고 싶었다.”라는 소박한 욕심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최영미 시인의 이미출판사에서는 신간 시집 “다시 오지 않은 것들”, 개정증보판 “돼지들에게”에 이어 소설 “청동정원”,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다시 발간될 예정이다.

새로 맞이한 일상 속 최영미 시인은 책 주문 알림과 함께 잠을 깬다고 한다. 행복한 소음인 팩스 소리를 새벽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리기도 했다. 시인은 “이젠 잠 좀 깨면 좋겠다. 처음엔 힘든 일도 많았지만, 지금은 세무사 도움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한다.”며 “방어전에 승리해 기쁘고 보람차다. 앞으로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라는 말로 근황을 전했다. 시집 낼 때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는 최영미 시인의 새 경험들이 또 다른 시들이 되어 아름답게 고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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