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제1-2회

 
순신의 나이 십구세가 되어 학문을 많이 이루었으나 더 연구하기 위하여 그 부모에게 허락을 얻어 가지고 홍연해洪漣海 선거이宣居怡 등 동지들과 더불어 강원도 금강산으로 글공부를 갔던 것이다.
몇 달을 머무는 중에 하루는 마음을 풀어 후련하게 하려고 정신과 용기를 북돋워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천봉만학千峯萬壑의 기이한 경치를 완상하더니 문득 발 아래 바위구멍에서 큰 곰 한 마리가 나온다. 동행하였던 홍·선 양인은 깜작 놀랐다.
순신은 그 대들어 덤비는 곰을 그저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손에 창검이 없고 보니 맨손으로 격투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곰과 격투를 벌여 살풍경이 일어났다.
그 곰은 순신의 용력을 당할 수 없었던지 그만 달아난다. 순신은 분을 참을 수 없어서 그 곰을 쫓아 험한 언덕과 절벽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곰의 꼬리를 붙잡으려 하였으나 살 쏘듯 닫는 곰을 비호같은 순신이기로 잡기가 어찌 쉬우리오. 점차로 수십리가 되는 심산절협으로 뛰어 들어갔다.
홍·선 양인은 따르고자 하였으나 기력이 미처 따르지도 못하였던 것이었다.
홀연 그 곰은 간 데가 없어지고 곰이 없어진 자리에 뜻밖에 한 노인이 바위 위에 앉았다. 그 풍채는 신선 같다. 순신은 황연히 그가 신인인줄 깨닫고 앞에 나아가 배례하였다.
그 노인은 몸을 일으켜 답례하고 하는 말이 “아까 곰을 시켜 그대를 맞은 것은 그대는 하괴성20)의 정기를 받은 사람이니 문文을 놓고 무武를 배웠다가 위태로운 조선의 사직을 붙들어 중흥하게 함이라” 하고 책자 한 권을 소매로부터 내어준다.
순신이 두 손으로 받아본즉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하던 병서兵書였다. 순신이 두 번 절하고 그 노인의 존호를 물었다.
노인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나는 중국 진秦나라 때에 후생 노생21)이라 하는 노생이니 조선의 도인 영랑 술랑22)이라 하는 친우들과 다년간 이 산중에 은거하노라”고 답하고 홀연 사라졌다. 순신은 마음이 그윽하여 꿈속인가 하다가 돌아왔다.
순신은 그 이후로는 붓대를 던지고 무예를 배울 뜻을 세웠다. 그러하여 무경칠서23)와 사전자집24)을 더욱 연구 참고하며 활 쏘고 말 달리고 창검 쓰는 법을 열심히 연습하며 십팔기라는 기술로 몸을 단련하였다.
순신의 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방씨尙州方氏였다. 전 평창平昌군수 방홍方弘의 증손녀요, 영동永同현감 방중규方中規의 손녀요, 보성寶城군수 방진方震의 여식이었다. 방진은 무인 출신으로 힘이 보통 사람을 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방진은 누대로 아산 백암리에서 살아와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다. 방씨부인도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숙성하였다. 나이 겨우 12세 되던 때에 어느 날 밤에 화적火賊 강도떼가 팔구명이 작당하여 방진의 집 내정으로 돌입하였다.
▲ 총 4권으로 재구성된 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 영인본
여러 대 수령의 집이니 보물이 많으리라 하는 추측은 강도들의 심리였다. 강도들은 다 손에 흉기를 들었다. 방진이 자다가 놀라 일어나 활을 찾아들고 다락 위에 올라 앉아 살을 당겨 들어오는 적도를 향하고 쏘았다.
화적들은 본래부터 방진이 활 잘 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화살이 다하기까지는 겁이 나서 들어오지를 못하였는데 화적 몇 명은 벌써 그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하고 거꾸러진 모양이었다. 화적들도 사생간 긴장되었던 것이다.
방진의 화살이 밖으로 나오지 아니함에 화적들은 화살이 다 된 줄 알고 뛰어 들어온다.
방진은 화살이 다함에 마음이 정히 당황하여 자기가 거하는 방 안에 남아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시비를 불러 명하였으나 시비들은 그 중에 적에 매수 내응된 자가 있어서 방 안에 있던 화살을 감춰버렸다. 정말 위기일발이었다.
12세 되는 어린 방씨가 그 부친의 부르는 소리를 응하여 곧 대답하기를 “화살이 아직 방 안에 많이 있소” 하고 베틀에 쓰는 잡죽雜竹 한 단을 들고 부친이 앉은 다락에 올려 던지니 그 소리가 화살소리와 같았다.
화적들은 그 잡죽 소리를 듣고 아직도 화살이 많이 남아 있는 줄만 알고 다 도망해버렸다. 12세 되는 소녀로서 조금도 강도를 겁내지 아니하고 찰나지간에 계책을 생각해내어서 일가가 화를 면하고 무사하게 되었다.
방씨의 나이 장성함에 용모와 덕행이며 재예와 학문이 겸비하고 출중하였다. 그 부친 방진은 무남독녀인 방씨를 슬하에 두고 그 배우자가 될 사위를 천하에 널리 구하여 당세영웅을 택하여 자기가 죽은 뒤의 일과 집안의 제사까지 맡기려고 하였다.
 
방진의 친우 중에 혹자는 명령자螟蛉子를들이라고 권하되방진은답하기를 “옛날에는아들과딸이모두 없어야양자를들였다 나는 일녀를 두었으되 남의아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고말하고 봉황의짝을 널리 구하나 적당한 사윗감을 얻지 못 하고 있었다
방진은 사람많은 서울로 올라가 각서숙을 방문하며 수탐하는 중에 자기와 사제지분이 두터운 동고이준경을 찾아 가 보았다
이준경은 방진이 사위를 구하는 사정을 듣고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그독서에 뜻풀이 하던말과 그풍채가 비범하여 장래에 이름이 천하에 떨칠 제후의 상이 라는 말이며 정성과 효도가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말로 방진에게 권하였다
방진은 본래부터 이준경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음을 심복하던 터였다 그래서 방진은 순신을찾아 만나게 되었다 순신의 나이21세가 되던 해였다 순신은 신장팔척이 요범의 머리와 제비의 턱이며 잔나비팔과 곰의 허리5)였다 그힘쓰기는분육6) 의짝이며 활쏘기는 양숙7)과나란하였다
방진이 크게 기뻐하여 순신의 부친과 약혼하고 이해을축 565년8월에 성혼하였다 이로부터 순신은 방진의 아들 겸 사위 겸 되어서 처가인 아산 백암리에서 은행나무 단을 놓고 궁술의 묘기를 그 장인인 방진에게 전수받았다.
▲ 이순신은 스무살이 돼서야 첫 과거 시험을 치렀다. 사진은 KBS '불멸의 이순신' 중 한장면
 
이순신의 나이 이십 여세에 이르러서는 경전의 깊은뜻을 정통할 뿐 아니라 필법이 정묘하여명필의 수완이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무예를 열심히 연습하기 때문에 붓대를 집어 던지고준 마를 달리고 강궁을 당기며 전조선 팔로를 두루 역람하여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바다의 깊고 얕음과 섬들의 크고 작음을 정찰하며 백성의 풍속을 통찰 하였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순신의 나이 이십 칠팔에 이르렀다 그당시에 순신을 흠모하며 교유하는 장안호 걸이며 팔로장사들이 능히 비견할 자가 없어서 다 하풍에 서서 경복할 뿐 이었다 그러나 순신은 벼슬길로 들어서기에는 급급하지 아니하였다.
순신은 성품과 언행이 높고 반듯해서 주위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는 말과 희롱하는 행동은 대어보지도 못 하고 항상 그 기상과 인격을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 시속 사람들의 친구 간에 하는 네니 내니 이자식 저자식 이니 하고 만만하게 구는 사람은 절대로 없었다한다.
임신572년 8월에 훈련원28)에서 무과의 별과 시험이 있어 순신이 비로소 과거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 중에 말을 타고 풍우와 같이 달려 나갈때에 탔던 말이 실족하여 거꾸러지면서 순신이 따라 낙마하여 왼쪽발이 부러져 유혈이 낭자 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다 순신이필시 죽었다 하여 놀라고 애석히 여기지않는 이 가 없었다 그러나순신은 홀연히 한 발로 일어서서 조금도 고통스러워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길가에선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겨가지고 상처를 동여매고 천연히 행보하여 다시 말을 잡아탔다 만장 중에 보던 사람은 그 용감한 거동을 보고 모두 장쾌하다고 박수갈채 하였다 훗날마침내 그 상처가 완치되어 기세가 더욱 분발하여 전 일보다 배가 하였다 그 백절불굴하는 기풍이 이러하다. <다음호에계속>

 
>>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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