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송희에디터
사진=한송희에디터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발레리나」부분, 최현우 

[뉴스페이퍼 = 유수진 에디터, 시인] 이 시구를 입에 ‘사탕처럼 물고’(「박하사탕」) 다닐 때가 있었다. 입 속에서 오물거리다가 자꾸 입천장으로 튀어 오르려는 글자들 때문에 한동안 최현우를 앓았다. 그의 첫 시집이 나오길 오래 기다렸다. 2014년 조선일보에 당선한 후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육 년이 걸렸다. 시인의 이십대를 묶었다는 최현우 시인의 첫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문학동네, 2020)의 표지색은 파란 녹색이었다. 파랗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지만 푸르다고 할 수 없는 이십대의 날씨가 고스란히 인쇄되었다. 

코로나19 때문인지 미술 경매가 인터넷 옥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림이란 모름지기 미술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보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입장료를 낸 값만큼은 보고 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있어서 서너 개의 그림 앞에서는 꽤 열심히, 골똘히 서 있곤 했다. 넓고 하얀 미술관 벽에 걸린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던 날들은 기억이 되었다. 미술관의 입구이면서 출구인 곳엔 기념품 가게가 있다. 그 곳은 미술관이란 벽에 달아 놓은 문 같은 곳이다. 기념품 가게에서 프린트 하나쯤 사온 날은 마음을 크게 먹은 날이었다. 돌돌 말린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벽에 걸었다. 그때 벽에 건 기억은 점차 때가 탔고 어느 날엔 벽에서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는 그림 크기만큼의 흔적과 벽 속으로 패인 못 자국이 남았다. 그 앞에서 못 자국과 흔적을 오래 들여다보며 어쩌면 미술관에 낸 입장료처럼 인생에 냈다고 생각하는 입장료 값을 헤아렸던가. 

인터넷의 가상 벽은 크지 않았다. 딱 내 핸드폰만한 크기였고, 그림은 내 핸드폰보다 더 작았다. 그림을 크게 보려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펼치면, 커지면서 흐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벽은 하얗다. 하얀 벽에 걸린 그림마다 작품명, 작가명, 작품 크기, 경매 시작가, 그리고 작은 글씨로 추정가가 쓰여 있다. 경매 사이트에 나온 유화와 판화를 보면서 벽에 어울릴만한 색깔과 크기를 가늠해 본다. 그러다 문득 그 벽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의 벽인지, 작년에 살았던 집의 벽인지, 혹은 내년에 살고 싶은 집의 벽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의 벽이 무슨 색인지 얼굴을 들고 확인해야 했다. 

유목을 멈춘 이후로 벽이 발명되었다 
그때부터 
밟혀서 지워지지 않도록 
사람은 기억을 벽에 옮겨 보존하기 시작했다 

-「회벽」부분, 최현우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벽이다. 벽과 벽으로 설계해 놓은 세상은 문이라고 정해 둔 곳으로만 들어가고 나갈 수 있다. 문을 통해 벽으로부터 나가면 또 다른 벽이 서 있다. 사람만 문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의심도, 심지어 통증도 문으로만 들어오고 문으로만 나갈 수 있는 세상이다. 최현우 시인은 말한다, 유목을 멈춘 세상에서 사람은 기억을 벽에 옮겨 보존하기 시작했다고. ‘벽이 발명된’ 후 많은 것들이 벽에 걸렸다. 벽에 기억을 건다. 벽에 기억을 거는 행위는 먼저 점유했던 이의 기억을 덮어버리는 행위이지만 스스로 걸어둔 기억을 스스로 철거하고 나면 ‘차고 흰 벽에는 못 구멍이 남(「회벽」)’는다. 그 한 점은 또렷하고 깊다. 최현우 시인은 그 한 점으로부터 벽의 내부가 흘러나온다고 상상한다. 벽의 내부에는 내가 걸어둔 기억도 있고, 나 이전의 또 다른 내가 걸어둔 기억도 있으며, 벽이 벽이 아니던 때의 기억도 있다. 철거해도 철거되지 않는 기억들이 벽의 내부에 스며들었다. 밤이면 밤마다 별빛을 펴 바르고 낮에는 햇살을 펴 발라 그 못 자국을 메꿔 보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벽의 내부는 줄줄 흘러내린다. 그렇지만 다음으로 걸어가야 하므로 ‘전람회는 열려야 하기에’ ‘벽은 회복을 시작하고’ ‘밀도 높은 어둠은 근육이 되’(「회벽」)었다. 단단한 근육을 가진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본 벽은 이미 처음의 벽이 아니다. 

매미가 탈피를 할 때 
껍질을 강제로 벗기면 기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잘 벗긴 허물은 선퇴(蟬退)라 하여 약재로 쓰인다 

-「후회」부분, 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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