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뉴스페이퍼 = 김상천 에디터, 문예비평가] “바람의 붓에 적셔” 시를 쓴다고 했다. 시인은...‘시인의 말’에서...아크, 이 을매나 멋진 수사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은 전통적인 영감론을 표상하고 있지 않은가. 즉 그의 시는 사실에, 풍경에, 객체에 사로잡혀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아”, “내면의 그 울음을 꺼내” 시를 쓴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가 음풍농월 일색의 전통 시조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과 연대하고 있는 이 시대의 시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자, ‘시인의 말’을 지도 삼아 우리는 비로소 그의 시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니, 모두를 장식하는 표제시 ‘밤 군산항.1’을 보자.

밤 군산항 장례식장 불빛 또한 침침하다
찢어진 책장처럼 항구는 나풀대고
문상 온 노동자 몇몇 달빛을 묶어 둔다

높새바람 뜸한 사이 부두 전집 창쪽 앉아
여름 끝물 하늘에 둥실 뜬 보름달을
가만히 술잔 담으면 휘청거린 가장 보인다

고철 같은 조선소, 문 닫은 자동차 공장
안주로 오르내린 허망한 추억들이
히로쓰* 샤미센** 가락에 흰 물꽃을 피운다

*적산가옥
**일본의 현악기

이것은 한국현대시조가 낳은 경이로운 장면이다. 나는 이 가편佳篇을 해설하기 위해 전에 없던 ‘시적 서사poetic narrative’란 용어를 쓰고자 한다. 시에도 서사의 기둥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 ‘밤 군산항.1’에는 ‘시적’이라고 야그되고 있는 미적 형식으로서의 언어의 물맛과 ‘서사’라고 일컬어지는 리얼리즘적 내용으로서의 생의 실상이 하나의 날줄, 씨줄처럼 얽어져 하나의 텍스트를, 빛나는 빗살무늬를 이루며, ‘흰 물꽃’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해서 하는 말이다.

여기, ‘밤 군산항.1’에 지배적으로 흐르고 있는 시적 정조로서의 강물은 쓸쓸하다는 것이지만, 의식은 존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처럼, 꼭 그처럼 화자에게 이 쓸쓸한 정조를 유발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아니 견디지 모하고 무너져 내린 밤의 시간적 연대이자 기억이다.

이 밤의 시간을 지탱하고 있는 군산항의 기억과 연대를 통해 독자를 시적 서사의 세계에 빠뜨리고 마는 것은 바로 저 일제의 수탈을 상징하는 ‘히로쓰’이고 ‘샤미센’이다. 또한 고철로 변해머린 조선소와 끝내 문이 닫히고 만 자동차 공장이다. 그러나 우리를 기억과 연대의 추억 속에 빠뜨리게 되는 현재적 서사의 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장례식장 노동자라는데 이 시가 건드리고 있는 서사적 기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시는 평면적이지 않고 중층적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현이 잠든 기억을 일깨우듯 우리는 ‘밤 군산항’이라는 시적 현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너와 내가 계기적으로 맞물리는 흔치 않은 시의 두께를 마주하면서 시란 무엇인지, 시의 공리적 요소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즉 시는 사회 전체의 조화를 일깨우는데 기여한다.  

이 시가 새로운 것은 무엇보다 시라는, 더구나 시조의 기본 율조를 이어받은 형식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 형식의 제약을 넘어서 매우 자연스럽게 시적 정조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요, 더욱 새로운 것은 단순한 물경의 세계를 넘어, 그러니까 ‘자연’을 읊조리던 전통적인 모방적 어법을 넘어 거기, 리얼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존의 음풍농월을 일삼던 귀족들의 정형시조와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탁월하게 수행한 이병기의 시조 혁신에서도 볼 수 없던 부분이다. 즉 우리는 ‘시조時調’하면 역시 전통의 음풍농월을 일삼던 사대부들의 지배적 형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고, 또한 가람 이병기가 새로운 운동을 통해 시조의 현대화를 창도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주저주저하고 있던 것이다. 그 또한 ‘언제나 시적 대상에서 떨어져서 초연한 상태로(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있는 엘리트 양반의 고적古蹟한 풍격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머리 넘어든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개 소리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병기, <가람문선> 중에서

그러나 이 시는 과연 어떠한가. 여기, 박현덕의 <밤 군산항.1>은 이 한편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할 정도로 우리는 새삼 그의 명편에 주목하고, 두 눈을 다시 비벼보게 되는 것이다. 

And yet,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에서 어떤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 시(조)가 남다른 격조와 리얼리즘적 성취를 이루었음을 느끼먼서도 마음 한 구석에 일말의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그것이 이 시의 지배적인 정조로 흐르고 있는 쓸쓸함 때문인가 아니먼 무엇인가.

어줍은 평론가가 보기에 이 시(조)는 매우 뛰어난 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시적 형식을 깨부수는 진정한 형식 실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시인의 의식을 쥐고 흔드는 주체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언어의 주인이 되지 모하고 다만 언어는 대상을 물적으로 반영하는 도구로서 객관적 실재objectivity에 사로잡혀 있다. 다시 말해 화자는 대상을 전혀 대상화시켜내지 모하고 다만 대상에 고정적으로 이끌려 있을 뿐이다. 고철 같은 조선소가 되고 말았다는, 공장이 문을 닫고 말았다는, 밤 군산항에, 그것도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노동자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시의 포로가 되어 있을 뿐이다. ‘침침하다’, ‘둔다’, ‘보인다’, ‘피운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서사가 아닌 묘사로 시의 이미지화에, '모방적인 시화imitative poetizing'에 충실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방 시학의 원조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의 제일성이 ‘모방mimesis’이고, 이를 통한 ‘카타르시스catharsis’임을 볼 때, 이 모방과 카타르시스를 통해 시민들을 체제에 순응시키고자 한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지 않은 관점에서 볼 때, 이 시의 장점과 한계는 분명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저녁이 오는 시간’ 연작(1~20)은 다수의 시편에도 불구하고 ‘밤 군산항.1’의 사족에 불과하다.

물론 전통시조의 단형적 형식과 음풍농월 정조를 넘어서 이양과 변양을 거듭하먼서 새로운 형식 실험(‘겨울숲’, ‘구운몽’ 등)과 현실에 대한 지향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발군拔群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특히, ‘저녁이 오는 시간1-겨울 운주사’가 보여준 시적 경개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오촉 전구 같은, 눈 내린다 산지 절집

대웅전 추녀의 끝 금탁도 흐물흐물

길 잃은 바람을 불러 목울대를 세운다

골짜기로 흩어진 천 개의 바람 소리

꾀죄죄한 불상들 몸뚱이 피가 돌게

적막 깬 소리 사이를 흰 새가 날고 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이는 참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형식도 내용도 아니라는 데 있다. 시는 이미지이지 설명이 아니라지만, 인과가, 시간이, 범주화된 개념의 세계가 아니라지만 그 공리적인 기준에서 볼 때에 있어서도 사회적 각성이 없고, 거리가 없고, 비판이 없고 다만 모방에 터한 쓸쓸하고 무기력한 정적인 인식이, 허망한 미적 취향이 담긴 시조시를 우리가 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시인은 답해야 한다. 미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호는 항상 그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난 그렇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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