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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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한국 문단의 노벨상’이라 자처한다는 (오창은, 문학평론가,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세미나 자료) 동인문학상(조선일보 주관) 수상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가타부타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가령, 제 아무리 교육적 의도가 좋다 하더라도 12살 어린이에게 성인영상물을 틀어주는 것이 적절할 수 없는 것처럼, 꼭 그처럼 반민족친일부역행위가 명백한 문인의 행적과 작품을 기리는 행위가 신뢰성과 정당성을 지닌 것인지 간단없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 어떤 행위가 적절한가의 문제는 무엇이 정확하고 옳은 것인가라는 도덕적 판단의 문제다. 그렇다면 작금의 동인문학상의 존치maintenance는 과연 적절한 도덕적 행위인가? 

자, 나는 보잘 것 없는 한국의 일개 문예비평가로서 ‘어려운’ 판관의 위치에 서 있거니와, 왜냐하면 판관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 작가와 그의 작품의 논란에 대한 비평가의 비평 행위가 일종의 심판 행위로서 그 내용이 공정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결정 또한 가차假借-사정을 보아줌-없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적 논란에 대해 공정하고 가차 없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친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일부 문인들과 그들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이 아무런 자각이 없는 관습적 행위에 대해 심한 자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거니와,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마치 중풍이 든 환자처럼 마비된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1세기가 지나가는데도 우리는 아직 저 근대라는 정신의 독립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성이 나의 흐린 눈을 따갑게 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에 문학뉴스 전문 ‘뉴스페이퍼’의 청탁으로 일제에 부역하고 독재(자)를 찬양한 미당 서정주-다행히 뜻있는 많은 시민들의 노력으로 현재 미당문학상은 폐지되었다-의 노예적 삶으로 일관한 불미한 시인의 행적(<미당 신화>, 2019, 사실과가치)에 대해 그야말로 가차 없는 비평의 칼을 휘둘렀거니와, 즉 그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학 운운했다지만 사실은 순수를 가장하여 정치적 시녀 노릇을 자임하고 민족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데 급급했던 가장 야비한 기회주의자였음을 좀 신랄하게 논파한 바 있다.

자, 그렇다면 ‘소설가’ 김동인은 어떤가.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는 그동안 한국문학사에서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비록 우파 계열의 김동리(‘자연주의의 구경’, <문학과 인간>)에게 “신을 잃은 인간은 동물의 그것에 불과하다며, 왜 그의 자연주의가 탐미주의와 악마주의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지” 라며 혹평을 받고는 있지만, 좌파 계열의 수장 임화조차 “조선 현대소설은 진정하게는 김동인에게서 시작한다”(‘소설문학의 20년’, <문학사>)라며 고평을 받았던 그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문인과 그를 기리는 상에 대해 이견異見이 멈추지 않고 있는가. 이런 사실은 앞의 얘기대로 문학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문인과 그를 기리는 상에 대해 이견이 있다면,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하나의 사실관계matter of fact로서 더욱 철저하게 검증되어야 함을 문제제기한다. 

가, 그는 과연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였나

나, 그는 과연 전범이 될 만한 ‘모범적인’ 작가였나

그리하여 만약 ‘가’, ‘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논란의 의미가 없을 테고, 또 만약 ‘가’, ‘나’가 사실이 아니라고 드러날 경우 한국문학사는 다시 써야 하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잘못된 평가에 기초해서 상을 주고 기리는 것은 사회적 신뢰성과 논리적 정당성에 반하는 것으로 적의한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김현, 김윤식(<한국문학사>, 제4장 4절)이라는 거인들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만약 그의 예술적 행위가 반민족친일부역행위를 넘어 ‘쾌락주의적 인생관’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identity을 흔드는, 이른바 국기國基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일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기초질서와 삶의 근본윤리를 훼손하는 매우 몰가치하고 반사회적인 처사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인자부터 본격적으로 검증에 들어가 보자.

 

2. 그는 과연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였나

본격적인 검증에 들어가기에 앞서 검증 대상에 대한 예비지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는 김윤식처럼 실증주의적 문예 연구자가 아니므로 연구 대상에 대한 시시콜콜한 개별적 사실들과 시시한 자전적 년대기를 죽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나는 김동인이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닌 이야기 같은 빤스 끈 붙잡고 늘어지는 신변잡기나 노변정담 식 일화 또는 김현처럼 특정 문인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인 찬사나 늘어놓고 회고적인 정취를 즐기는 예의 대학 문예 강좌 식의 먹물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문단에서 적지 않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문제적 소설가가 보여준 인생 역정의 적절성 여부를 논하고자 하는데 있어 그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간단한 소개는 필수적이라 여겨진다. 인생과 작품이 같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김동인은 천애의 고아로 자란 이광수와 달리 최남선, 홍명희처럼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평양 대부호의 아들이었다. 이점이 그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그는 1900년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리에서 전주김씨 대윤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 김대윤은 8대를 거쳐 평양에서 살아온 명문의 후손으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수천 평의 농토와 재산으로 대금업을 하는 한편으로 대동서점을 경영한 개화기 유지이자 기독교 장로로서 ‘부호富豪’라는 칭호를 받은 자였다. 가령, 부친은 당대의 민족지사인 안창호, 이승훈-‘안창호’는 조선의 계몽 지식인으로 이광수 등 수많은 젊은이를 일깨운 정신적 지도자였고, ‘이승훈’은 민족학교인 정주의 오산학교를 설립한 민족지도자다-등을 초청하여 집안에서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이는 과연 부호가 아니면 어려운 풍속의 일면이다.

그러니까 김동인이 한국문학사 초기에 일본 유학 중에 '가장 야심만만히 근대적인 문학운동을 일으킨'(김병익, <한국문단사>)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자비로 창간하는 등 두드러진 문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든든한 물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동인, 박승희 같은 이들처럼 사재를 털어놓고/문화에 헌신”했다는 김수영의 시(‘이 한국문학사’)처럼, 김동인은 사실 사재를 털어 한국문화에 헌신했던 문학의 순교자였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창조>(후에 <영대>)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모여 문단이 형성되고 문학권력이 조성되는 등 근대문학 형성기에 한국문단사의 중심에 그가 우뚝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적지 않은 자금을 감당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1917년에 부친이 별세하고 쌀 3천석에 해당하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고 평양에서 제일 큰 집에 산 그는 조선의 귀공자나 다름없었다. 당시는 나라를 빼앗기고 그 울분을 삭이지 못해 일제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만세로써 저항하던 시대로, 유관순처럼 나이 어린 소녀들조차 분연히 일어났던 민족정신 대고취의 시기였다. 그러나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일본을 산보하듯 드나들며 기생오입을 밥 먹듯이 하고 돌아다닌 그는 남부러울 게 없는 조선의 방탕 부르주아 문사였다. 그런 그였으니 호가 또한 ‘금동琴童’이었거니와, 그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호승심이 있었다. 그가 천재 작가 이광수와 호적수 염상섭을 그토록 의식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태평시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즉 당시는 일본제국주의가 청일(1894), 러일(1904) 전쟁 이후로 조선을 실질적으로 점령, 아시아를 침탈의 대상으로 삼아 식민 권력을 강화하던 시기로, 이런 상황에서 영향력 있는 조선의 문사로서 김동인의 활동반경이 커지먼 커질수록 일인들의 감시와 견제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니까 남부러울 것 없고 거칠 것 없는 조선의 귀공자 김동인에게도 일제에 의해 굴절된distorted 한국근대사의 그늘이 겹친다. 바로 여기에 하나의 기도try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와 불의한 시대와의 특수한 길항stand-against관계가 놓인다. 글을 쓰는 일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정치적 의사표시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자칭, 타칭 ‘야심만만한’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라 칭하는 김동인은 불의한 시대와 어떤 특수한 길항 관계connection를 유지하면서 작품활동을 했을까 하나하나 이에 얽힌 이야기 끈들을 풀어내 보자.

소설가 김동인이 과연 한국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였는지를 검토하려면 우선, ‘근대’가 무엇인지부터 소명되어야 하고, 이것과 소설의 관계가 규명되어야 하며, 그런 다음 김동인이 이와 관련하여 과연 어떤 선구적인 역할을, 즉 다른 사람에 앞서서 어떤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 일을 주도적으로 실행하였는지를 좀 ‘주의깊게closely’ 검토해야 한다. 

자, 그러니 먼저 근대의 개념부터 보자. 잘 알다시피 근대는 고대, 중세, 근대, 현대 할 때처럼 쓰이는 서양의 역사적인 시간 개념으로, 여기서 말하는 ‘근대modern’는 일반적으로 현대와 가까운近 시대代라는 함의를 지니고는 있지만 본래 서구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던modern’이라는 단어는 ‘모데르누스Modernus’라는 라틴어의 형태로 5세기 말엽 로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그것은 기독교가 공인되었던 당시와 그 이전 이교도였던 로마의 과거를 ‘구별짓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모던의 의미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다가 르네상스 이후, 근대 과학에 의해 고무되어진 지식의 무한한 발전, 사회와 도덕의 개선을 향한 무한한 진보에의 신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근대의 모던이라는 개념 일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와는 다른 차이와 구별과 진보라는 개념이고, 이런 차이와 구별과 진보에의 신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로 우리는 저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코기토cogito는 ‘생각한다’는 뜻의 라틴어다.) 명제를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는 명제들의 다툼의 역사라는 말을 적용해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시대적 상징으로 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야말로 실로 역사적인 명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자, 여기 데카르트의 명제-머 사실은 근대 부르주아 개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주관적 관념론’에 불과하기는 하지만-가 근대의 성격을 축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근대의 핵심은 바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 생각하는 주체가 곧 신이 아니고 인간인 ‘나’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대로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외부 집단의 모럴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도덕률morality로서 기능하였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외부 집단의 모럴을 상징하는 게 바로 신으로 상징되는 비가시적 실체였음을 암시한다. 이 비가시적 실체로서의 신을 모셔둔 가시적 실체가 세속의 신전, 성당과 교회였다. 즉 고중세는 가령 저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 (참고로 지난 2019. 12. 27 뉴욕타임즈 기사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Notre-Dame is more than a church, more than a masterpiece of medieval architecture, more even than a symbol of the great cities of the world. Like many of the earth's great cultural landmarks, it has a life of its own; it is a living character in art, literature, music and legend, and a place where a tired passer-by can drop in for some rest and quiet thought. It carries a message that every visitor can interpret in his or her own way”) 사원처럼 거대하고 신성한 건축이라는 상징적 공간이 하나의 도덕률로서 현실을 지배하는 세계질서로 온존했던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신을 모든 인간행위의 도덕(률)의 중심에 모시고 있던 고중세의 건축적 공간이 갑자기 무너지게 된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이것은 문맥상 이것(책)이 저것(건물)을 죽일 것이라는 묵시록 같은 예언이거니와, 사실은 신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고중세의 구술문화가 종언을 고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문자문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노트르담 성당 신부의 경탄과 두려움 섞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즉 근대의 주체는 바로 출판문화를 주도한 계몽적 지식인들이고, 이들이 주도가 되어 중세문화에 대한 청산에 나선 것이 대표적으로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교회활동의 금지와 수도원의 매매(발작의 <으제니 그랑데>)였다. 또한 그동안의 지배언어로 기능하던 라틴어에서 당시의 각 지방의 ‘일상어romance’를 중심으로 맞춤법을 새롭게 제정하여 근대의 맞춤법은 하나의 국가의 어법語法으로서 자연 부르주아 시민의 독서문화에 맞게 ‘형태소’를 중심으로 한 자의적인 말 꼴form세우기였고, 그것은 또한 그것대로 ‘민족어’를 매개로 한 배타적인 나라세우기nation-building과정으로서, 이는 그대로 언어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국가 형성의 근대의 기획과도 물리는 부분이었다. 즉 근대의 세계는 '인쇄자본주의print capitalism'(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체>)라고 불릴 수 있는 문자문화, 독서문화로서 지식인들이 주도해나간 코기토의 세계였다고 볼 수 있다. 

자, 여기! 중세적 세계와의 배타적인 ‘분리’라는 감정구조에 기초하여 근대 지식인의 멘탈리티를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노트럴한 ‘중립성’이고 ‘개별성’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중립성은 대상에 동화되지 않는 주체의 심미적 거리를, 개별성 또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심리적 거부를 요구한다. 이는 그대로 문자문화를 주도한 지식 계몽들이 자신들을 하나의 근대적 ‘자아’이자 독립적 ‘주체’로, 합리적 ‘이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루카치 식으로 근대는 ‘선험적 고향transcendental home’이라는 신과의 유대가 끊어진 시대임을 암시하는 것이고, 이는 또 그대로 근대의 개인이 신을 상실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이 역할을 위임받은 자가 고대에는 시인이었고, 근대에는 소설가였다)을, 즉 도덕을, 가치를, 형식을 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를 맞았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지난 과거와 현실과 나와의 대자적對自的 거리를 유지하고 이성적 인식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고대예술로서의 서사시가 종말을 고하고 시민서사시(헤겔)라는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서술’ 중심의 근대의 소설의 탄생을 생각해 볼 수 있고, 근대적 형식을 대표하는 이 소설에 왜 ‘시간’이 요청되는 이유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으로 상징되는 고향과의 유기적인 연대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은 이른바 하나의 분리로서 ‘문제적 개인’이 이제 새로운 신을 찾아 스스로 출발을 해야 할 현재를 각성시키고, 이는 그대로 과거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주입시키고, ‘말하기’라는 개화된 서술을 통해 철학적 균열로서의 대상에 대한 ‘미적 거리두기aesthetic distancing’라는 주체적 형식을 요청하게 됨을 예측하게 한다. 즉 서사시가 고대의 신정론이라먼, 소설은 근대의 형이상학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 지식인의 노트럴한 중성적 개인주의 모럴을 반영한 근대의 시민서사시인 (장편)소설에서 왜 미적 거리두기이자 하나의 지배서사가 된 리얼리즘으로서 고중세의 모방-고대의 이른바 ‘모방론mimesis'은 자연(신)을 따르는 인물의 영웅적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이념이자 예술론의 핵심이었다-과는 다른 '객관적 묘사'가 요청되고 서사시와 비극이 공간의 지배를 받는 ‘현재형’의 문학인데 반해, 소설이 왜 시간의 지배를 받는 ‘과거형’의 문학인지를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즉 ‘~이니’, ‘~해서’에서 ‘한다’로, ‘~다’로 어형의 중성적 변화를 겪게 되고, “근대문학의 내러티브는 ‘ㅆ다’라는 과거형에 의해 완성된다”는 (가라카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근대문법으로서의 소설의 명제가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 여기 근대라는 것이 ‘보편catholic’이라는 중세의 실재론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간 하나의 ‘개별적 자아’에 대한 유명론적 인식의 세계이고-그러니까 ‘보편’과 ‘자아’는 ‘국가’와 ‘개인’이라는 함의를 지니면서 늘 부딪쳐왔다고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다시말해 고중세가 보편과 국가라는 집단적 가치가 우세한 사회였다면, 근대는 자아와 개인이라는 개별적 가치가 더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그만큼 이상주의보다는 현실주의, 보편자보다는 개별자에 더 우선권이 주어진 시대가 근대라고 볼 수 있다-이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의 개인주의 문학으로서 고중세의 모방적이고 집단적인 ‘동일성’의 세계인식mimesis으로서의 서사사와 다른 ‘개인적’ 차이의 형식diegesis으로서 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요청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식이 요청되었다면, 김동인은 과연 그 어떤 형식을 가지고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나 보자.

그러니까 근대가 민족국가로서의 나라세우기nation building 과정이고, 근대의 민족적 부르주아 시민문학으로서의 소설이 이런 근대의 자아의식, 민족의식을 반영한 근대의 지배 형식(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김동인의 근대문학 형성 과정과 ‘일단’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먼 1919년 3.1 독립운동의 힘으로 나라세우기가 일어난 그 해에 김동인 또한 조선의 근대 소설을 탄생시키는데 주춧돌을 놓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좀 구체적으로 보자. 

역사적인 3.1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러니까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문’의 발표가 있던 바로 그날, 김동인은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화수분’의 작가 전영택 등 몇몇 동인들과 친구의 하숙방에서 신문학 운동의 일환으로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창간을 자축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서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그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하면서 가졌던 의식은 그대로 근대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즉 그는 창간호에 실린 ‘약한 자의 슬픔’이라는 최초의 단편 소설을 통해 구어체를 확립하고, 3인칭 ‘그’를 최초로 썼으며, 특히 과거형을 과감하게 구사했다는 점을 볼 때, 그가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즉 그는 한국 근대 소설의 피오닐pioneer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김우종의 <한국현대소설사>,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그의 문체론적 공헌은 자신에 의해 과도하게 과장되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즉 그의 문체상의 공적으로 알려진 1) 더라, 이라 등의 구투 탈피, 2) 현재법 서사체와 과거체 서사체의 혼용, 3) 대명사 그의 사용, 4) 사투리 사용 등의 네 가지 사항 중에 앞의 세 가지는 이미 이광수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어서 그의 공적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사투리의 사용뿐이라는 것이다.

what matters,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무슨 소린가. 그의 소설 작품이 비록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근대적인 산문적 문체가 요구하는 여러 형식적 요건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그 내용 속에 드러난 삶의 태도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모럴로서 작가가 작품을 통해 보여준 삶의 태도야말로 궁극적으로 작가적 인식을 드러내고 지향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관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우선 그가 그토록 호언("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써서 ‘사천년 조선에 신문학 나간다’고 천하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김동인, <문단30년의 자취>)하는 ‘약한 자의 슬픔’을 보자. 이 작품의 내용은 여주인공 강 엘리자베트가 K남작과 불의의 관계를 맺은 후 임신을 한 상태에서 쫓겨나 소송을 제기하나 재판에 지고, 유산한 후에 자살을 꾀하나 이 역시 하나의 표본처럼 실패하고 나도 자신의 운명을 망친 장본인인 저 K남작과 같은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참사랑이 필요하다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깨닫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입을 보자.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오늘은 왜 이리 갑갑한고? 마음이 왜 이리 두근거리는고?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있는 것 같군. 어찌할꼬. 어디 갈까. 말까. 아, 혜숙이한테나 가보자. 이즈음 며칠 가보지도 못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이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갑갑하던 것이 더 심하여지고 아무래도 혜숙이한테 가보여야 될 것같이 생각된다.
“아무래도 가보여야겠다.”
그는 중얼거리고 외출의를 갈아입었다”

자, 이것은 오늘 현시점에서 읽어 보아도 이광수의 아담하고 고운雅麗한 문체와 비교도 되려니와 100년 전에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명징한데다 그 모던한 감각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국적인 이름의 설정과 단정한 문체, 자신의 내면을 분석하는 근대적 자아의 등장 등...무엇보다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되었‘다는’ 구어체 문장과 3인칭 대명사 ‘그’의 사용, 그리고 과거형(‘자기 방으로 돌아온다’가 아니고 ‘돌아왔다’)의 과감한 도입, 이것은 과연 김동인이 형식적으로 근대적 멘탈리티를 드러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는 근대 소설사의 한 쾌거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런 자신의 작업에 대해,

“‘한다’, ‘이라’, ‘-인다’ 등의 현재법 서사체는 근대인의 날카로운 심리와 정서를 표현할 수 없는 바를 깨달았다. 현재법을 사용하면 주와 객체의 구별의 명료치 못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감연히 이들을 척하였다.”

-김동인, ‘조선근대소설고’, 대중서관

라고 할 정도로 그가 과연 근대적 의식(주체와 객체의 ‘구별’의 명료함)의 소설적 문법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과거형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건 그대로 김동인 자신의 것일까. 즉 김동인은 어떻게 이런 소설의 형식과 작법에 대한 명료한 근대적 지식과 이론을 터득하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건 그대로 ‘이식문학사移植文學史’로서의 한국근대문학사의 한 면모를 볼 수 장면이거니와, 김동인이 소설을 배우게 된 것은 전혀 일본 내지內地에 유학하게 되면서다. 즉 그는 조선유학생(박영효, 김옥균, 백남훈, 김관호, 문일평, 주요한)과 인연이 깊은 그 유명한 ‘명치학원明治學園’을 다니면서 영화를 탐닉하다가 탐정소설에 이끌려 소설을 배우게 되었다 하는데, 당시는 건강하던 리얼리즘 문학의 타락한 형태로서의 프랑스의 근대 자연주의 문학이 이식되어 발흥하는 일본의 근대문학에 영향을 미치던 무렵이었다. 당시 유명한 문인으로 <파계>, <신생> 등으로 문학적 명성을 얻고 명치학원의 교가까지 지은 자연주의 소설가이자 김동인의 스승인 시마자키 도손 또한 이 명치학원 출신이었다. 그만큼 명치학원의 근대적 문풍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일본근대문학이 메이지明治 이후 국가군국주의, 제국주의화 과정에 놓이게 되면서 정치적 좌절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에 놓여있(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던 결과, 김동인이 받아들인 일본근대문학은 매우 자연주의적이고 사소설적私小說的인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천황제 군국주의화로 근대적인 민권의식이 좌절되면서 나타난 일본의 자연주의가 마치 프랑스의 자연주의(<마담 보바리>, <감정 교육>, <목로주점>)가 잇단 혁명의 실패와 연동되먼서 나타난 소설적 반영인 것처럼 가령, 루카치는 <역사소설론>에서 플로베르의 자연주의적 성취를 두고 ‘감정의 야비화’라고 힐난하먼서 말하기를, 보바리의 환상과 환멸에는 1789년에서 1848년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부르주아 혁명이 광범한 대중의 현실적 열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반동화함으로써 초래된 민중의 원한과 분노가 극히 말초적인 신경으로 은유화되었다고 역사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일본의 근대 자연주의 소설이 정치적 좌절과 연계되면서 더욱 내면의식에 기울고, 사소설화私小說化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와 그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다. 

김동인은 유학 당시 명치학원의 대선배로 자연주의 소설가로 이름이 높았던 시마자키 도손에게 큰 영향을 받았(김동인, ‘문단 30년의 자취’)는데, 김동인이 이렇게 일본의 근대문학을 대변하는 자연주의 문학을 이식받는 과정은 곧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주권이 좌절되면서 나타난 퇴폐적인 허무의식과 다르지 않고, 이는 그대로 ‘약한 자의 슬픔’의 주인공이 황폐한 세계의 무게에 짓밟혀 패배당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즉 자연주의가 정치적 패배주의와 연동이 되는 것처럼, 작가가 정치적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은 매우 회의적이고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품의 결말을 인위적으로 <신생>처럼 재생의 결의와 자신을 짓밟은 강자에 대한 사랑의 깨달음으로 끝맺음으로써 소설의 인과적 필연성과 어긋나는 매우 모순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근대적 의미에서 작품을 작가의 내면 의식의 외화된 형태라고 전제하고 볼 때에 있어서도, 그의 소설적 세계현실은 외부의 폭력적 현실에 대해 매우 자연주의적인 ‘체제순응주의conformism’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운명 탓이지요.”
-귀스타프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민음사

이게 바로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자연에 순응하고 마는 패배주의의 망탈리테 아닌가. 마찬가지로,

“기시모토는 이렇게 생각하고 자신의 작은 지혜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운명’이 향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려고 했다.”
-사마자키 도손, <신생新生>, 문학과지성사

는 것이 또한 그렇거니와,

“약한 자는, 마지막에는 어찌 하노?......이 나, 여기 표본이 있다.”
-김동인, <약한 자의 슬픔>, 동아출판사

처럼, 이 모든 것들이 과연 그 빌어먹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약자의 탄식이 아닌가. 그리하여 자연주의의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소외된 인간 군상들의 내면을 다루고 있는 미적 망탈리테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신체와 내면의 연애 감정을 다루는데 있어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솔직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현대인의 복잡한 내면 심리를 잘 포착한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체에 대해, 연애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내부의 문제로서, 그것은 또 그것대로 외부의 영향이 압도적인 데에 따른 문학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자연주의에 영향을 미친 외부의 영향은 무엇인가 함 생각해 보자. 

우선, 플로베르. 작가는 시대의 상처라 했던가. 그가 그 유명한 <마담 보바리>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하게 1851년 제2제정의 부활과 일치한다. 그러니까 ‘보바리의 환상과 환멸에는 1789년에서 1848년에 이르기까지의 대격변기에 일련의 부르주아 혁명이 광범한 대중의 현실적 열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반동화’-프랑스의 정치적 반동화와 좌절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고전을 낳은 계기가 되었다. 좌절이 근본을 돌아보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참담한 실패를 맛본 사람들은 가령, 보들레에르처럼 저주받은 시인임을 자처하며 상징의 숲으로 도피, 망가짐으로써 오히려 대담한 시꽃(<악의 꽃>,1855)을 피워낸敗而勝의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공화주의자 위고처럼 <레 미제라블>(1962)을 통해 한 저주받은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성인이 되고, 예수가 되고, 하느님이 되는지를 장발장의 일생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준 경우도 있다. 한편 마르크스는 혁명이 의지나 소망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며, 과학이라는 지렛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성서라 칭하는 <자본Das Kapital>(1867)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하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1851년 12월 2일-프랑스 제2공화국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큰 아버지 나폴레옹 1세의 아우스터리츠의 전승과 대관식 기념일을 기하여 쿠데타를 결행했다-을 통해 프랑스는 강력한 제정과 함께 부르주아 중산층 중심의 자본주의가 성숙해가면서 극심한 노동자와의 대립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71년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의 성취로 일시적으로 노동자 중심의 시민자치를 이루기는 했지만 결국 무참히 무너지고만 정치적 이상이 사회정치적으로는 물론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당시 발표된 통계만 보더라도 정부군에 의해 살해된 시민(군)이 3만 명에 이르거니와 정부군의 악귀와도 같은 잔악행위는 파리 시민들에게 정치적 이상에 대한 일체의 환상을 날려버리고, 그들에게 적대 계급의 잔인한 본질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가쓰라 아키오, <파리코뮌>) 비슷한 시기에 쓰여 진 그의 <감정교육>이라는 제목이 이와 같은 잔인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정 이후에 쓰여 진(1863~1869) 이 소설 또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프레데릭을 통해 그림처럼 아름다운 아르누 부인을 애인삼아 보려는 어떤 노력도 소용없게 된 이야기는, 즉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배반을 통해 혁명의 배반을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 알레고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즉 <감정교육>은 ‘환상은 환멸을 부른다’는 <마담 보바리>의 메시지와 함께 ‘낭만(혁명)은 더 이상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자연주의 계열의 패배주의 소설로, 그러지 않아도 민중을 극도로 혐오한 플로베르가 혁명에 대한 낭만적 감정은 사치스럽다는 것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기도try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낭만주의가 관념적인데 비하여 사실주의는 실증주의적이다. 불란서에서는 특히 명료하게 한 편의 사실주의와, 다른 한편의 자연과학적 실증주의와 연관이 두드러졌(프리체, <구주문학발달사>, 개척사, 1947년 *대표적으로 <마담 보바리>에 농공진흥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낭만의 보바리가 유혹을 당하고, 결과적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는 반면, 부르주아 지식상을 대변하는 약제사 오메 ‘씨’는 승승장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장면이 그것이다.)던 것은 이런 정치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머 실증주의는 현실적 안도감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순응적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프랑스를 거쳐 일본에서는 어떻게 이식되었는가. 일본문학의 독소가 된 자연주의 문학의 더욱 타락한 형태로서의 ‘사소설私小說’은 프랑스의 자연주의 문학이 혁명의 실패에 따른 인간의 타락과 연동되었듯이, 메이지明治 이후 일본식 봉건제도인 무사 막부체제의 붕괴와 일본식 근대국가형태인 천황제의 성립, 이후 군국주의화로 달려간 일본사회의 민권의식의 타락-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거침없이 제국주의의 길을 내달리고 ‘국민’, ‘일본제국’이라는 거대 신화를 창조해내고, 이 길과 신화 창조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민주주의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특히, 코바야시 타끼지는 <1928년 3월 15일>(1928)을 통해 천황제 국가권력의 잔인한 민권탄압의 본질을 폭로하고, <게 가공선>(1929)을 통해서는 국가적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더없이 잔혹한 린치로 위협해 가며 노예노동을 강요함으로써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자본의 착취를 고발하였다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창비, 2013년)-과 상호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즉 프랑스에서의 자연주의 문학의 주요소재인 ‘간통’이 도덕적 모럴의 타락에서 오는 문학적 반영으로서의 하나의 사회적 기호인 것처럼, 꼭 그처럼 일본에서의 사소설의 주요소재인 ‘과도한’ 애욕의 표현 또한 도덕적 모럴의 타락에서 오는 사회적 기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김동인의 스승인 시마자키 도손이 살림을 도와주러 와 있던 조카 고마코(작중에서는 ‘세쓰코’)와 불륜을 저질러 고마코가 임신하는 등 여조카와 실제 육체관계를 맺고 <신생新生>을 썼거니와 이 작품을 도쿄아사히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일본의 조선 강점이 노골화하고, 이에 따른 저항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1918년이다. ‘강간强姦’과 ‘강점强占’은 질적으로 전혀 동일한 사회적 기호다. 

같은 맥락에서 김동인이 1919년 2월에 자신의 스승이 쓴 <신생>(1919년 1월1일 초판 발행)을 그대로 모방하여 남작(=일제)이 강 엘리자베트와 불륜을 저지르고 임신을 시켜 그녀의 인생을 망치게 하는 얘기가 결코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당시 일본의 문단은 사소설의, 고백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김동인은 시마자키 도손의 순종 제자다. 

자, 나는 방금 김동인이 자신의 스승이 쓴 <신생>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 확인해 보자. 

“기시모토는 간다 강 어귀에서 2,3백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2층에서 내려와 평소에 자주 거니는 강가로 나왔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강가를 걸었다. 마치 자신의 방 바로 밖에 긴 복도라도 걷는 것처럼.
그 강가로 나올 때마다, 버드나무 가로수를 사이에 두고 낚시배나 미곡 도매점 또는 한적하고 단아한 일반 주택이 강물에 면해 있는 것을 볼 대마다, 반드시 마음속에 떠올리는 미지의 한 청년이 있었다.”

<신생>의 도입과 ‘약한 자의 슬픔’ 도입은 서사구조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니까가시모토가 조카 세쓰코와 근친상간으로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다 다시 사랑을 깨치듯이,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또한 K남작을 만나 불륜을 저지르고 인생을 망치듯 하다 사랑을 깨친다. 대체 프랑스나 일본이나, 아니 우리의 근대초기 한국에서나 자연주의 소설에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간통’이라는 기호가 넘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암시적인 것으로, 가령 오장환의 ‘고전’-“전당포에 고물상이 지저분하게 느러슨 골목에는 가로등도 켜지는 않았다 죄금 높다란 포도도 깔리우지는 않었다 죄금 말숙한 집과 죄금 허름한 집은 모조리 충충하여서 바짝바짝 친밀하게는 느러서 있다 구멍뚫린 속내의를 팔러온 사람, 구멍뚫린 속내의를 사러온 사람, 충충한 길목으로는 검은 망또를 두른 쥐정꾼이 비틀거리고, 인력거 위에선 차와 함께 이믜 하반신이 썩어가는 기녀들이 비단 내음새를 풍기어 가며 가느른 어깨를 흔들거렸다”-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간통은 사회 정의social justice의 실종(‘검은 망토를 두른 쥐정꾼이 비틀거리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이데올로기적 기호인 셈이다.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이자 독특한 일본 사소설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는 다야마 가타이의 대표작 ‘이불’이 또한 여제자에 대한 애욕을 품었던 경험을 ‘외부’ 사건 없이 작가 자신의 경험과 심경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사의 줄기와 퍼스펙티브가 사라진 맥 빠진 세계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일종의 심경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이런 타락한 형태로서의 일본 근대의 사소설적 경향을 가라타니 고진(<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일찍이 ‘내면풍경’이라는 그만의 비평언어로 읽어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패배주의이자 비관주의로서 운명에 굴하고 마는 인간의 나약한 자기 고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슬프다. 그야말로 가슴 저미듯 슬프다. 이 비애는 화려한 청춘의 비애도 아니고,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에서 오는 비애도 아니고, 인생 가장 깊은 곳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그런 커다란 비애다. 떠가는 물의 흐름, 피는 꽃의 조락, 이 자연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서 인간처럼 덧없고 인간처럼 나약한 것도 없다.”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중에서.

자, 여기 외부의 정치사회적 폭력적 현실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순응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자연주의’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문학으로부터 전체적(역사적, 사회적) 관심이 수축하고 개성의 자율이란 것이 위기를 맞았던 시대의 당면의 과제가 된 시대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근대적 인식과 쌍을 이루는 것이었다. 즉 자연주의는 사회를 떠나 개인을 우선에 두고 있는 근대적 망탈리테와 통하는 그것으로 <마담 보바리>처럼 ‘정치精緻한 묘사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이런 경향을 추수하고 있는 것은 그것대로 한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개인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고차적인 입장이 상실되었다는, 근대적 관점을 잃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자연주의는 정치적 비관주의의 문학적 소산이다. 프랑스 혁명 좌절 이후, 가난과 술에 절어 비참한 죽음을 맞는 제르베즈(에밀 졸라, <목로주점>의 여주인공)를 상기해 보자. 

김동인의 이런 현실 순응주의적 자연주의관을 잘 나타낸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라는 ‘감자’를 들 수 있다. 자, 여기!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과 비극적 죽음을 보여주고 있는 ‘감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선, 중요한 것은 가난이라는 환경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대로 ‘자연’환경결정론이 아닌가.

“복녀의 도덕관 내지 인생관은 그대부터 변하였다.
그는 아직껏 딴 사내와 관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여 본 일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짐승의 하는 짓으로만 알고 있었다.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이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름으로 못 할 일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일 안 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일본말로 하자면 ‘삼박자三拍子’ 같은 좋은 일은 이것뿐이었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비결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있은 뒤부터, 그는 처음으로 한 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신까지 얻었다.”

즉 인간의 도덕적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자, 작가를 작품과 분리시킬 수는 없으니, 즉 작품도 하나의 작가의식인 뇌분비의 산물인 셈이니, 이는 곧 소설의 서술자가 작가의 대변자라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무사 여신이여!” 하고 전지전능한 ‘신의 계획’으로 쓰여 진 고대 영웅서사시와 달리, ‘작가의 계획’에 의해 쓰여 진 근대의 부르주아 시민서사시인 소설은 가령, ‘나는~’하고 시작하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꼭 그처럼 현대의 소설은 보다 직접적인 내면 토로의 가능성을 가진 1인칭 고백소설이 주를 이루며, 비록 여기 3인칭 시각으로 쓰여 진 <감자>라 하더라도,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는 나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것은 전지적 시각이 아닌 한 사람의 초점 화자의 시각을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니까 김동인(<춘원연구>)이 스스로 분석하고 있듯이,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을, 선형이와 영채 사이에서 흔들리기 쉽고 줏대가 없는 자로서, 그를 즉시로 이 소설의 작자인 이춘원으로 보았던 것처럼, 꼭 그처럼 우리는 가난이라는 환경을 일제의 식민 현실로, 이런 자연적 환경에 도덕적 파탄을 맞고 비참을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주인공의 운명을 김동인으로 대입해 볼 수 있다. 그렇다먼 가난은 객체이고, 주인공은 주체다. 그런데 주인공(주체)이 가난(객체)에 무너지고 말았다. 즉 가난에 의해 주인공이 도덕적 파탄을 겪고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그것은 곧 객체가 주체보다 앞선다는 거 아닌가. 즉 김동인의 작가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작품을 가로지르는 작품의 경향이 주체보다 객체가 압도하는 자연주의이고, 이런 자연주의가 현실에 대한 비관적이고 순응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문학 사조라먼 이를 두고 근대적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근대적 의식을 지닌 주인공이라먼, 저 ‘라스티냑’(발작,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 결말에서 “자,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라고 결연하게 외쳤던 것처럼, 이 사회에 던지는 도전 행위로서 자신이 삶과 역사의 주체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이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름으로 못 할 일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일 안 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일본말로 하자면 ‘삼박자三拍子’ 같은 좋은 일은 이것뿐이었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비결이 아닐까.”

이 부분을 다시 복기해 보건대, ‘복녀’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고 있는 작가 김동인, 그가 깨달은 삶의 비결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일본(감독)에의 동화를 매우 기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험으로, 감각으로, 맹목적으로, 즉자적으로, 아니 김동리의 표현대로 ‘평면적으로’ 인식한 것이지 이성으로, 반성적으로, 대자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다.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도덕 가치가 무엇인가를 논할 때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이론적 기준으로 볼 때에 있어서도, 이것은 분명 잘못된 ‘동기주의動機主義’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작품에 드러난 그의 작가관은 자발적인 친일이고, 이는 결국 종속적 노예인식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김동인의 문학사적 평가는 그 형식에 대한 모던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지, 그의 작품 내용에 기반한 실질적인 평가라고 볼 수는 없다. 

김동인의 작품들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가 주인공을 통해 이런 패배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자연주의적 인생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대로 작가의 현실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인생관의 일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김동리(‘자연주의의 구경’, <문학과 인간>)는 이것을 ‘평면의 정신’이라고 읽고 있거니와, 아닌 게 아니라 이런 태도는 서사적 비전을, 꿈을, 의지를, 건강한 욕망을 잃은 자의 무기력한 자포자기적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이제는 아주 더 갈 데가 없이 된 이 평면의 정신은 가는 곳마다 많은 정신병과 발광과 난음亂淫’을 전개하였던 것이니, 그 중 대표작이 또한 ‘김연실전’이 아닌가.

“언니, 남자란 여자를 보면 그렇게두 오금을 못 쓰우?”
“맛이 좋거든”
“맛이 좋단 어떻게 좋우?”
“그거야 남자가 아니구야 어떻게 알겠니마는 여자는 또 남자를 보면 그렇지 않더냐. 아유. 흥 흥.”

이렇게 현실에 대한 순응적이고 비관적 태도를 드러내는 자연주의적 작품들이 결과적으로 암울한a bleak 현실이 제기하는 본질적인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벗어나 트리비얼trivial한 이야기에 빠지고 사소설적auto-biographical 경향을 지니며, 더구나 김동인의 경우처럼 ‘색정소설a suggestive novel’에 가까운 타락을 면치 모하고 말았던 것은 그가 그만큼 평면적 시각을 벗어나지 모하고 서사적 비전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그만큼 근대적 자아의식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이와는 달리 한때 김동인과 한 소설을 두고 격론을 벌였던 염상섭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김동인과 달리 당시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묘파하고 식민 치하의 조선의 현실을 ‘무(한기, ‘한국근대소설로의 길’, <염상섭>, 동이출판사, 1995)덤(<만세전>의 원래 이름)’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같은 시기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약한 자의 슬픔’이 1919년 2월 8일 발행된 <창조>지에 실리고, <만세전>이 1922년 <신생활>, 1923년 <시대일보>에 발표되었지만 모두 3.1만세 이전을 그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시대현실을 바라보는 둘의 시각은 너무 다르다. 이것은 분명 작가가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대하고 있는가 라는 태도의 문제라 하지 않은 수 없는 것으로 소설적 성취와 더불어 냉정하게 톺아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았듯이 그가 단순한 작가가 아니고 잘못된 근거에 의해 들씌워진 신화화된 소설가이거니와, 이런 왜곡된distorted 신화가 재생산, 유포되어 하나의 우상으로 굳어져 국민대중들에 많은 영향을 미쳐온 ‘문제적’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먼 김동인과 대척점에 있는 염상섭을 보자. 잘 알다시피, 한국의 발작이라 할 염상섭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만세전>은 식민지시대 전 기간에 걸쳐서 식민지적 현실과 봉건적 현실의 중첩 모순을 잘 묘파한 소설로 <만세전> 만한 소설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작품이다.

<만세전>은 3.1만세 이전의 식민지 현실을 자신의 체험과 가족관계를 빌어 전하고 있는 여로형 귀향서사다. 귀향은 나갔다 돌아오는 여정이다. 그러니까 일본유학생 신분인 이인화는 지금 서울에서 마누라가 위험하다는 급보를 받고 동경에서 서울로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개인의식을 지닌 청년이자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일본인 카페 여급 ‘정자’에 대한 대자적 거리두기와 관부연락선과 부산역두, 경부선 철도에서 마주친 식민 치하의 조선인민의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한 조선의 실상과 마주하먼서 여행자의 객관적 시선을 빌려 최대한 현실의 문맥을 냉정하게 관찰하려 한데서 이 작품의 리얼리즘적 생동감이 잘 드러나 있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추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명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들끊는 무덤이다!’
......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자, 이런 사실은 작가의 우국지사적인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거니와, 특히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오는 와중에 배안 목욕탕에서 우연히 조선 노동자(요보) 모집원이 촌뜨기 청년을 꾀는 장면은 일제가 어떻게 해서 조선인민을 속여 끌고 가 노동착취를 일삼고 어티케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는지 책상도련님에 불과했던 도쿄 유학생이 일제치하 조선인민의 참혹한 실상을 깨닫고, 고발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일을 잘들 하나요?”
“잘 하구 못 하는 것은 내가 아랑곳 있겠노마는, 하여간 요보는 말을 잘 듣고 쿨리만은 못해도 힘드는 일을 잘 하는데다가 삯전이 헐하니까 안성맞춤이자. 그야 처음 데려갈 때에는 품삯도 많고 일은 드러누워서 떡먹기라고 푹 삶아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갈 노자며 처자까지 데리고 가게 하고, 빚까지 갚아 주는데야 제아무런 놈이기로 아니 따라 나설 놈이 있겠소. 한번 따라 나서기만 하면야 전차前借가 있는데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지. 일이 고되니까 품이 헐하긴 고사하고 굶어 뒈진다기루 하는 수 있나, 하하하.”

그러니까 일제와 조선 간의 화해할 수 없는 식민적 모순과 갈등이 저 3.1혁명이라는 폭발 기점을 찾아가고 있는 만세 전, 평면적 시각을 벗어나지 모한 채 색정과 탐욕에 빠진 자연주의와 ‘동통과도 같은 무게’(염상섭의 작풍에 대한 김동인의 평가)를 가진 사실주의의 작풍은 이렇게도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염상섭이 1922년에 쓴 <만세전>에서도 ‘궐자’를 고집하고 있으니, ‘그’의 사용은 분명 김동인의 승리임에 틀림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 [한국의 문예비평] 동인문학상 적절성 논란 속 들여다보는 ‘야비한 자연주의 - 김동인론’ (2) 은 이곳(클릭)을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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