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에서 발제하는 임명선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사진제공 = 장우원 시인]
10월 31일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에서 발제하는 임명선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사진제공 = 장우원 시인]

 

지금에 생각하면 그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일이었다.
소재가 분명하지 못한 무덤 하나를 찾느라고
여余가 발로써 밟은 수효는 500으로써 헤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여余가 밟은 곳은 모두 무덤의 마루인지라
말하자면 죽은 이의 배, 혹은 가슴의 직상直上일 것이었다.1)

세상이여 내가 당신을 떠날 때
개천가에 누었거나 들에 누었거나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하시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같은 사람이 있더래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하시오,
그러면 나는 세상에 다신 안 오리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작별합시다.2)

 

1. 들어가며

한국 근대문학에서 김동인의 위치는 압도적이다. 그와 <창조>가 “초기 조선문단 자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기원”3)이었던 만큼 근대문학을 논하는 데 김동인을 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근대문학의 초석을 다진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중요성은 수긍이 가지만, 일면 그에 대한 평가에는 과잉된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많은 선행연구에서 그의 작품이 가진 한계를 논하고 있다. 문학적 기교의 미숙함과 역사적·정치적 인식의 결함,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바라본 한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 제출되고 있다. 하지만 김동인이 살았던 당대로부터 지금까지 그가 점하고 있는 문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그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더욱 많이 필요하며, 그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기존의 문학장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도약 또한 가능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지주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김동인은 금전적 어려움 없이 생애의 전반기를 보냈다. 방탕한 생활과 사업 실패로 경제적 곤란에 처한 후반기에는 작가로서 다작을 하며 원고료로 생활비를 충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몇백 편에 육박하는 소설, 수필, 평론 등을 남긴다. 소설의 경우, 1919년 <창조>에 발표한 '약한 자의 슬픔'으로부터 시작해서 1953년 태극사에서 나온 <서라벌>4)까지 총 96편5)인데 이 중 가장 많은 것은 단편이다.

그의 소설에서 양적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창작 활동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썼다는 점에서 김동인의 작가적 면모를 살피기 위해 단편 소설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따라서 본고는 김동인의 단편 소설 중 식민지 시기의 작품들에 집중하여, 그 작품들에서 인물들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인물의 형상화에 나타나는 편협하고 왜곡된 인간관이 궁극적으로 김동인 문학의 한계로 이어짐을 밝히고자 한다.


2. 확장하는 시점과 제한되는 상상력

김동인 단편소설에서 인물의 형상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소설 속 인물 유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순서는 작품의 발표 시기에 따른다.


표1 식민지 시기 김동인 단편 소설의 시점 및 중심인물

[출처 =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자료집]

 

[출처 =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자료집]

 

[출처 =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자료집]
[출처 =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자료집]

김동인 소설 중 1인칭 소설의 경우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대체로 ‘나’는 소설가로 등장한다. 때때로 평양 출신을 밝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나’는 김동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김동인의 1인칭 소설들에서 ‘나’가 주인공이기보다는 이야기를 관찰·전달하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1인칭 관찰자는 그 자신의 시각에서만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며, 그로 인해 다양한 효과를 낳기도 한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소설을 전개하는 많은 1인칭 소설들이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런데 김동인 소설에서 ‘나’는 일견 1인칭 관찰자의 모습을 취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1인칭 관찰자를 서술자로 내세우는 작품들('목숨', '광염소나타', '죽음', '광화사', '대탕지 아주머니' 등)을 살펴보면, 외화와 내화가 분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외화에서 서술자인 ‘나’가 등장하고 내화에서 초점화자를 따로 두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보통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6) 무용하다고 볼 수 있는 서술자 ‘나’를 여러 소설에서 계속해서 등장시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 이러한 전제로써,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7)

여는 꽃 가운데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월전에 신문에서 본 어떤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무대는 황해도 고을이었다.8)

하여간 기위 잡은 붓이니, 비슷비슷한 소리건 어쩌건 쓰려는 이야기를 하나 써보자. 같은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레코드를 틀어놓고도 매일 그만치 좋다고 덤벼대는 이 세상에서 소설쟁이라고 꼭 매번 색다른 이야기만을 쓰라는 법도 없겠지.9)


인용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김동인 소설에서 ‘나’는 작가적 위치를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또 보통 1인칭 관찰자 소설에서 나타나는 외화에서 내화로의 이동은 소설의 개연성을 고려하는 데 반해, 김동인은 도리어 내화가 실제의 것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공상’)임을 강조한다. 작품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도 현실에 밀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김동인 소설의 특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10)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부재에서 그의 소설의 여러 문제가 빚어지는데,11) 그중 하나가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유명한 김동인의 인형조종술 또한 이와 관련해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인물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인물들을 소비해버리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을 대하는 김동인의 태도에서는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문학적 상상력(공상)의 힘이 전혀 발휘되지 못한다. 김동인도 마사 누스바움도 공상과 소설이 연관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나, 김동인의 공상이 자기 함몰적인 데 반해, 마사 누스바움의 공상은 자기 밖으로 뻗어 나가는 성질을 보인다. 다시 말해 마사 누스바움은 공상을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고,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으로 볼 줄 알고, 다른 것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며, 인식된 형태에 복잡한 삶을 투영할 수 있는 능력”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은 공상의 능력을 구현하고 발전시키며, 이는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문학적 상상력 안에 ‘공적 상상력’의 특징이 있다고 본다.12)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의 환원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마치 개미나 기계 부품의 움직임이나 동작같이 객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에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듯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이 그것이다. 소설은 다른 많은 서사 장르들보다 내적 세계의 풍부함을 훨씬 더 탁월하게 다루며, 수많은 구체적인 맥락 속의 모든 모험을 통해 삶이 주는 도덕적 의미까지도 구현한다.13)


우리가 어찌하면 죽지를 아니할까 하여, 소년 300을 배에 태워 불사약을 구하러 떠나보내며, 예술의 사치를 다하여 아방궁을 지으며, 매일 신하 몇 천 명과 잔치로써 즐기며, 이리하여 여기 한 유토피아를 세우려던 시황은, 몇 만의 역사가 어떻다고 욕을 하든, 그는 참말로 인생의 향락자이며 역사 이후의 제일 큰 위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만한 순전한 용기 있는 사람이 있고야 우리 인류의 역사는 끝이 날지라도 한 ‘사람’을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14)

방화? 살인? 변변찮은 집, 변변찮은 사람은 그의 예술의 하나가 산출되는 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 번 날지 못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찮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애버린다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15)


소설이 개별적인 인간 삶에 대한 ‘존중’의 힘을 길러준다고 말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생각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듯한 김동인의 생각은 소설 속 서술자의 목소리로 대변된다. '광염 소나타'의 백성수가 자신의 예술을 위해 무고한 이들에게 해를 끼친 것처럼 김동인은 자신의 소설을 위해 인물들에 난도질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물론 소설이 매양 윤리적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유희 혹은 예술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비윤리를 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러한 비윤리적 태도를 옹호하고 지지한다는 점에서 김동인의 소설은 문제적이다.

김동인은 소설가(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고 과시하기 위해 1인칭 서술자를 곧잘 내세우며, 이 1인칭 서술자의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 외화 속에 내화를 두는 액자식 구성을 활용한다. 내화 속의 또 다른 서술자에 의해 1인칭 서술자라면 필경 가닿지 못할 영역(다른 인물의 심리, 사건의 내막 및 배경 등)을 노출시키며, 작품 전체를 속속들이 장악하려 한다. 그리고는 인물들을 꼼짝달싹 못 하게 자신이 직조한 운명 속으로 밀어 넣는데, 작품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작가의 욕망은 연작 단편들―표1에서 ‘시리즈’로 표기된 작품들―에서 더 확연히 나타난다.16) 인물들은 김동인이 설계한 세계 속 자신의 ‘자리’에 장기 말처럼 놓여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김동인 소설에서 아무리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고 한들, 그것은 끝없이 작가 자신으로만 수렴될 뿐이다. 바로 이 점이 30년이 넘는 작가 생활을 했음에도 작품 경향에 큰 변화가 없이 단조로우며,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이 작품의 이해로 곧바로 직결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3. 전제자와 희생양

작품을 철저히 통제하고 모든 인물을 꿰뚫으며 ‘전지全知’적이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는 소설 속에서 인물들을 압살하며, 역으로 인물들에 대해 ‘무지無知’하게 만든다. 자신의 예술관을 자폐적으로 반복·강화하는 김동인 소설 속 ‘나’들은 자기와는 다른 인물들을 이해할 역량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유아독존적이며 편협하고 잘못된 시각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노출한다. 지주 계층에 계급적 바탕을 두고 있고, 남성 중심적인 김동인의 시각은 소설 속에서 그가 하층계급과 여성을 어떤 방식으로 호명하고 소환하는지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선 계층적인 문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김동인 소설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는 운명론적 세계관은 주로 하층계급의 인물에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 예로 '배따라기'의 그, '감자'의 복녀, '송동이'의 송 서방 등은 작가가 만들어낸 운명에 휩쓸려 죽거나 사라져버리는 인물들이다. '광염 소나타'나 '광화사'에서 예술가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백성수나 화공이 죽었을 때 소설에는 그 죽음에 대한 유감이 분명하게 표현된다.17) 그에 비해 '감자'의 복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적 서술도 드러나지 않으며, '송동이'의 송 서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18) 앞의 소설들은 1인칭 관찰자라는 장치를 두어서 보다 감정을 표출하기 용이하지만, 뒤의 소설들은 모두 3인칭으로 거리감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도드라진다.19) 유독 하층계급의 인물에 무심한 김동인의 면모는 제가 살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하층계급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소설 속 인물(지식인)을 통해서도 재현된다.

'눈보라'의 홍 선생은 먹고살려고 의술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돌팔이 의술로 사람들을 진료한다. 정확하지 않은 의술로 환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사람들을 진료하고 돈을 받고 밤에는 도망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자기 연민에 더 강하게 사로잡힌다. '죽음'에서 ‘여余’는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를 늘어놓으며,20) “죽음은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21)인지를 생각한다. 그는 다양한 죽음들을 언급한 후 단지 “죽음이란 풀지 못할 커다란 수수께끼”22)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릴 뿐이다.

김동인이 한낱 자신만의 공상을 위해 인물들을 함부로 죽여버리고, 자기 감상에 젖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거지'이다. 작가의 분신 격인 ‘여余’는 자신의 집에 동냥을 구하러 온 거지에게 부엌의 남은 밥을 준다. 그런데 그 밥에는 아내가 쥐를 잡으려고 아비산을 섞어두었던 터이다. 거지는 결국 집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는데, 그것을 보고 ‘여余’는 “동정조차 엄밀한 음미하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인은 진실로 비참하다.”23)라고 일기장에 쓴다. 자기중심적인 김동인의 시각은 하층계급에 대한 미천한 인식을 넘어, 그들의 죽음을 무자비하게 소설 속에서 소비하고, 그 죽음에 아무런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 감정적 불구로 이어진다.

소설 속 하층계급의 인물의 존재가 김동인이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함을 반증한다면, 여성 인물들은 그의 뒤틀리고 문제적인 남성성을 잘 보여준다. 김동인의 이러한 모습을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정의 폭군 s를 두고 봐라, 아버지를 두고 봐라, p를 두고 봐라. 내가 아는 남자를 다 두고 봐라. 남자란 가정의 전제자 아니고 무어냐. (…)
자기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
제일 가까운 내 일로, 내가 부모에게 받은 그 학대, 남편에게서 받은 그 학대, 이것뿐으로도 넉넉히 이만 것은 알 것이 아니었는가?24)


김동인의 창작 초기인 1921년에 쓰인 '전제자'(후에 '폭군'으로 수정)는 이후 김동인 소설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수난이 예견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순애는 S와 결혼했으나 그는 색色을 과도하게 밝혀 죽고 만다. 오갈 데 없는 순애는 동생네 집으로 들어가는데, 어린 남동생인 P가 죽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방탕해질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걱정에 동생은 냉대로 답하며, 이에 상심한 그녀는 자살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단지 남동생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고 죽음을 택하는 인물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물이 처한 상황 속에서 충분히 다른 선택지25)가 있었음에도 그것의 가능성을 열지 않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작가 김동인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앞서 하층계급의 인물들이 숙명적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방랑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하였는데,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의 죽음은 그 개연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서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배따라기'에서 주인공 아내의 자살 역시 '전제자'에서 순애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자주 아내를 의심하고 때렸으며, 아우와 아내의 친근한 사이에 대한 질투 또한 늘상 있던 일인데 그녀가 갑자기 자살을 택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혹은 죽음을 택하는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는 작가가 그녀들의 목소리에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딸의 업을 이으려'에서 화순은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 이후 이혼을 당하고 그것이 가십거리로서 신문에 오르내려 괴로워한다. 화순은 결국 죽음을 택하게 되는데, 그녀가 죽기 전 서술자인 경애 앞으로 남긴 편지의 내용은 전혀 이야기되지 않고, 소설의 후반부는 화순의 아버지 이야기로 채워진다. 작가의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독자는 화순의 목소리에 가닿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전제자' 속 남성 인물들의 모습이다. 순애의 남편 S는 죽을 때 순애에게 용서를 구한다. 순애는 죽어가면서 동생 P의 얼굴이 남편이 용서를 구할 때의 표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새 당신에게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염치없긴 하지만 용서해주셔요. 순애 씨 안심하구 죽어두 좋습니까?”26)

‘누님, 웬일이오니까?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셔요, 누님. 안심하여도 좋습니까?’27)


소설에서 순애는 잘못이 없음에도 불행한 삶을 이어나간다. 불행한 삶의 원인이 된 사람들의 사과는 잘못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순애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더 잘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전도는 이후 소설들에서 더 심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포플러'의 최 서방은 자신의 욕정을 참지 못해 여러 여자를 강간하고 죽이는 범죄를 저질러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이 명백한 범죄 앞에서도 소설의 서술자는 최 서방을 옹호하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28) '광화사'에서 화공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에 소경인 여성을 꾀어서 자기 집으로 데려오고 그녀를 범하기까지 한다. 허나 처녀이던 소경의 눈과 남자를 알고 난 후의 그녀의 눈이 달라졌다며 역정을 내며 그녀를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서술자는 이 죽어버린 소경 처녀는 안중에도 없고 그녀가 죽으면서 완성된 그림에 대한 감상만 늘어놓은 뒤 화공의 기구한 삶(?)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소설 속 여성 인물에게 ‘전제자’이자 ‘폭군’으로 군림하는 작가 김동인의 모습은 소설 바깥으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더욱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 1인칭 시점의 소설들은 김동인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은데, '태형', '약혼자에게', '거지', '사기사', '가두', '가신 어머님'과 같은 소설들이 그러하다. '가두'의 소설 끝부분에 실린 부언을 보면 김동인 또한 이러한 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언 : 사실소설이라 하면 흔히 사실 그대로 일점의 가감도 없는 듯이 생각한다. 이 소설도 얼거리는 비슷한 사실이 있지만,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29)


'가두'는 ‘나’의 집에 세를 든 여성인 정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때 독자의 입장에서 ‘나’가 김동인 그 자신과 닮아 있으므로, 정자 또한 실제 인물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발가락이 닮았다'로 염상섭과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던 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듯이 그는 부언을 붙여가며까지 얼거리만 비슷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목소리는 한낱 ‘포즈’에 불과한 것인데, 시종일관 그는 현실의 인물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왔었기 때문이다. 1930년 '무능자의 아내'에서는 자신의 전처를, 1932년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염상섭을, 그리고 1939년~1941년 총 3편 연작으로 쓰여진 '김연실전', '선구녀', '집주릅'의 김명순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윤리적이고 방탕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러한 인물 형상화에 힘입어 인물들은 끝끝내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소설의 흐름에서 본다면 인물들이 겪게 되는 참담한 결말은 그 자신의 행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 인물들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에서 조롱과 비난 또한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인물의 형상화 방법이나 서술자의 태도 등은 논외로 하더라도 독자가 실제 모델을 연상할 수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 인물의 사생활―실제 인물에 대한 작가 자신의 억측과 공정하지 않은 시선에서 직조된―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은 비방문에 불과할 뿐이지 소설이라 말할 수 없다.


대체 문학자가 누구의 부탁을 바더서 복수적으로 붓을 잡는다 하는 일은 문학자인 염군의 양심에 무를 뿐 구구히 쓸 필요도 업슬 것이다. 염군에게는 혹은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창작은 창작이지 결코 무슨 무기로 사용할 것이 안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아직것문에 대하여뿐은 결벽과 자존심과 신용을 지켜온 나는 한 번도 이 신조를 범하여 본 일이 없다.30)

그 소설의 내용이 염군의 사실과 부합되는가 혹한 M이라는 인물의 성격이 염군 자기의 성격과 가튼가. 나는 그 소설의 작자인지라 거긔 대한 똑똑한 비판은 내릴 수가 업다.
(…) 그러면 염군은 엇던 근거에서 그런 결론을 나렷나?31)

그럼으로 나는 아직것 실재사실에서 직접 단편소설의 제재를 취한 일이 업다. 혹은 실재 사실에서 힌트를 엇는다 하는 일이 잇다. 그러나 이 ‘힌트’와 “모델 문제”와를 홍동할만티 염군의 소설안이 굽지는 안헛슬리자 나는 염군의 발까락에 대하여 품은 오해를 이해 할 수가 없다.32)


김동인은 염상섭이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한 비판을 하기에 앞서 자기가 먼저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나의 변명'이라는 논설을 싣는다. 논설의 논리 구조상 염상섭이 소설의 내용을 비판할수록 그 자신이 소설의 모델이며 인물이 지닌 결함까지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염상섭은 이후 <조선일보>에 '소위 ‘모델’ 문제'라는 글을 6회에 걸쳐 내는데, 이 글에서 그는 김동인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소설과 달리 자기 사생활이 부정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염상섭은 “일의 진상과는 떠러저서 풍설에 풍설이 꼬리물고 억측에 억측이 자심하야 간다면 백이 흑이 될 수 있고 성한 사람도 미친 놈이 되”33)기에 부득이하게 자신의 사생활을 고백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염상섭은 지면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라도 있었지만, 김동인의 전처와 김명순, 그리고 그의 소설에서 희화화된 여성 작가들의 반론하는 목소리를 당대의 신문, 잡지와 같은 공식적인 매체에서 찾기는 어렵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들은 염상섭의 말대로 ‘흑’이 되고 ‘미친’ 사람이 되어 평생 추문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다.


4. 나가며

지금까지 김동인 소설에서 인물들의 형상화 방식을 살펴보았다. 인물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관점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서술자의 위치와도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그의 단편들에서는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다양하게 활용하지만, 실상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부분이 많다. 1인칭 소설 역시 내화와 외화의 구분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정보를 모두 그러쥐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동인의 작품에 대한 통제욕과 강한 자의식은 작품 속의 인물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생동生動력을 빼앗아, 캐릭터로서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그들의 목소리에 작가 자신의 편협하고 뒤틀린 인식이 투영되어 인물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하층계급이나 여성을 중심인물로 내세운 소설들에서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타인의 목소리에 불감한 김동인의 모습은 '광염 소나타' 내화 속 서술자 ‘나’(음악비평가K)와 닮았다. 그는 “외따로고 조용하고 음침”한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예배당에 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거기서 언덕 아래 사람들이 사는 집에 화재가 난 걸 보며, “불붙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다며 “차차 흥이” 나기까지 한다.34)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일이 본인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이끎으로써 동정심을 형성”35)하는 것을 소설의 고유한 형식이라 보았다. 작가의 목소리로만 수렴되기만 하는 김동인의 소설들에서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공감’이나 ‘감정이입’의 능력을 찾기란 쉽지 않다.36)

김동인 문학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태형'이다. 소설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감옥에 갇히게 된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섯 평이 못 되는 감옥 안에는 마흔한 사람이 함께 있다. 더위와 역한 냄새 속에서 이들은 서로 몸을 포갠 채 송장처럼 지낸다. 감옥 안의 사람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며, ‘나’는 다른 사람들의 다리들에 깔려 잠들며 그곳을 ‘다리 진열장’이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사물화되어 가는 감옥 안에서 ‘나’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독립도, 자결도, 자유도 아닌 ‘냉수’와 ‘자리’이다.37) 10여 일에 한 번씩 목욕을 할 때 냉수는 마실 수 있으나, 꽉 찬 감옥에서 자리를 가지기란 어려운 일인데 기회가 찾아온다. 같은 방에 함께 있던 영감이 재판소에서 태형 90대 판결을 받은 것으로, 그가 나가면 그 한 사람만큼의 자리가 넓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감은 태형을 받는다면 죽을 가능성이 높아서 공소했다고 말한다.


“여보! 시끄럽소. 노망했소? 당신은 당신이 죽겠다구 걱정하지만, 그래 당신만 사람이란 말이오? 이 방 40여 인이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 맞아 죽은 다음에 당신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해? 여보!”
(…) 다른 사람들도 영감을 용서하지 않았다. 노망하였다. 바보로다. 제 몸만 생각한다. 내쫓아라. 여러 가지의 폄이 일어났다.38)


결국 영감은 태형을 선택하고 감옥 안 사람들의 얼굴은 “자리가 좀 넓어졌다는 기쁨이 빛”39)난다. 이후 그들은 영감이 매 맞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떠는데 이는 동정이나 슬픔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떨림’은 매 맞는 신체/죽는 신체가 언제 본인의 일이 될지 몰라 느끼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40) 좁은 감옥 안에서 그들의 신체는 얽혀 있고 그래서 함께 떨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하여 약한 인물의 자리를 박탈하는 데 큰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태형'이 보여주는 특이점이자 김동인 문학의 일관된 특성이다. 자신의 자리를 위해 인물들에 온당한 자리를 내주지 않고 몰아낸다는 점은 현대에 와서 김동인의 입지를 협소하게 만들기도 한다. 요리조리 변조된 작가의 목소리만 가득할 뿐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그의 작품은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으로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나 ‘사람’은 “타인의 인정”과 “자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41) 결국 누군가를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혹은 사회)의 ‘환대’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환대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서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42)이다. 저자는 환대가 전제될 때에야 우정이나 사랑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김현경의 견해는 김동인의 문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타자의 자리가 부재하는 그의 작품에서 우정이나 사랑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신 우리는 김동인의 소설에서 배신과 의심, 냉소와 혐오를 발견할 수 있다. 김동인 자신은 결코 무기로 사용한 적이 없다 했으나, 그의 문文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소설 안팎의 인물들을 찔렀기 때문이다.


*각주

1) 김동인, '죽음', <김동인 단편 전집 1>, 가람기획, 2006, 405쪽.
2) 탄실이(김명순), '유언', <조선일보>, 1924.05.29.
3) 송명진, '근대 소설어의 형성 과정 연구―김동인의 소설작법과 소설론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73호, 국어국문학회, 2015, 157쪽.
4) 1948년에 나왔다고 하지만 그 원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5) <김동인 단편 전집 2>의 작품 연보를 참고하였다. 본고에서 인용되는 김동인의 소설 속 구절들은  <김동인 단편 전집>에서 가져 왔다.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김동인, 김종년 엮음, <김동인 단편 전집 1>, 가람기획, 2006. 김동인, 김종년 엮음, <김동인 단편 전집 2>, 가람기획, 2006.
6) 송명진은 김동인의 소설에서 ‘일원묘사’ 즉, 소설 내부에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통해 ‘작가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서술 변화를 일으키고, 개인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본다. (송명진, 앞의 논문, 2장 참조) 그러나 본고의 경우 송명진의 견해와 달리 김동인이 표면적으로는 일원묘사를 택하였어도, 실제로는 다원묘사의 특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결과적으로 ‘인물 중심’이 아닌 ‘작가 중심’의 성격을 강화한다.
7) '광염 소나타', <김동인 단편 전집 1>, 앞의 책, 319쪽.
8) '수녀', 위의 책, 382쪽.
9) '대탕지 아주머니', <김동인 단편 전집 2>, 앞의 책, 175쪽.
10) 김동인 소설에서 현실이 핍진하게 녹아들지 않음을 비평하는 목소리는 그가 활동하던 당대에도 이미 존재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무산파 문예의 ‘입장’ 문제'(1931.1.14.)에서 양주동은 김동인에 대하여 “현실유리의 비사회적경향 또는 근본적으로 씨의 파지(把持)하는 시대착오적 예술론을 힐난코 십흐나 씨의 예술지상주의론과 작풍은 ‘마지메’한 이론적 공방을 가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오 또 씨의 오연독선(傲然獨善)한 태도에 조고마한 반성도 더할 뜻 십지 아니하야 그만두기로 한다.”라고 혹평한다. 한편 강헌국은 김동인의 액자식 구성이 “하나는 내화의 사실성을 보증하는 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내화를 현실로부터 분리시켜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한정하는 효과”를 지니며, 이 현실과 단절된 세계 덕분에 “인형조종술을 아무 거리낌 없이 구사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다고 말한다. (강헌국, '김동인의 창작방법론과 그 실천―1920년대를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77호, 국어국문학회, 2016, 290쪽.
11) 이동하는 방탕한 지주층이라는 김동인의 전기적 특성이 그의 작품에 흐르는 편협한 태도와 유희적 인생관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김동인의 작품이 “‘삶의 깊은 내면’이라든가 ‘현실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근본 동력’ 혹은 ‘그것의 거시적인 구조’를 알지 못하는 자리에 놓인다”고 이야기한다. (이동하, '김동인의 삶과 문학', <김동인 단편 전집 1>, 앞의 책, 31쪽.)
12)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옮김, <시적 정의>, 궁리출판, 2017, 31-32쪽.
13) 위의 책, 83쪽.
14) '배따라기', <김동인 단편 전집 1>, 앞의 책, 99-100쪽.
15) '광염 소나타', 위의 책, 344-345쪽.
16) 안지영은 김동인이 자신의 피조물들을 완전히 지배하기를 원했으며, 그러기 위하여 ‘서술자’, ‘액자형 구성’, ‘작가의 삽입’ 등을 지속적으로 실험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실험은 역으로 작가로서의 자신이 ‘이원적’으로 분열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작품의 완전한 지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지영, '김동인과 이상 소설에 나타난 서술자의 문제성(1)', <한국현대문학연구> 52호, 한국현대문학회, 2017 참조.)
17) “K씨는 마주앉은 노인에게서 편지를 받아서 서랍에 집어넣었다. 새빨간 저녁 해에 비쳐서 그의 늙은 눈에는 눈물이 반득였다.” ('광염 소나타', 앞의 책, 345쪽) “늙은 화공이여. 그대의 쓸쓸한 일생을 여는 조상하노라.” ('광화사', <김동인 단편 전집 2>, 앞의 책, 138쪽)
18) “복녀의 손에 들려 있던 낫은 어느덧 왕 서방의 손으로 넘어가고, 복녀는 목으로 피를 쏟으면서 그 자리에 고꾸라져 있었다. (…)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가져갔다.”('감자', <김동인 단편 전집 1>, 앞의 책, 173쪽) “그때부터 송 서방의 자취는 없어졌다.”('송동이', 위의 책, 300쪽)
19) '배따라기'의 경우 하층계급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기는 하나, '광염 소나타', '광화사'와 마찬가지로 1인칭 서술자(나)가 등장하며, 그의 사연에 안타까워한다는 점에서 '감자', '송동이'와는 다르다. 이는 주인공인 그가 배따라기의 본고장인 영유 사람으로 배따라기에 능한 반半예술가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차이이다.
20) “여는 몇 가지의 ‘죽음’을 또 나열해보고자 한다.” '죽음', 앞의 책, 422쪽.
21) 위의 소설, 409쪽.
22) 위의 소설, 424쪽.
23) '거지', 위의 책, 510쪽.
24) '폭군', 위의 책, 87쪽.
25) 순애는 잠시 가출하여 동창생이자 동무 과부인 혜감의 집에 간다. 거기서 혜감은 “언니! 나하구 함께 있읍시다. 오늘부터 형제가 되어 나하구 함께 있읍시다. 허락하셔요.”(위의 소설, 92쪽)라고 말한다. 하지만 순애는 다시 동생네 집으로 돌아가고, 한 번 더 동생으로부터 냉대를 당한 후 혜감의 집으로 갈까 하다가 자살을 택한다.
26) 위의 소설, 80쪽.
27) 위의 소설, 95쪽.
28) “그리고 누구 한 사람, 그의 과거 40년의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천진스러운 삶에 대하여 한마디의 칭찬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에게 일찍 한 마누라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그런 광포성을 발휘할 기회를 없이하지 않음을 후회하는 사람이 없었다.” ('포플러', 위의 책, 318쪽)
29) '가두', <김동인 단편 전집 2>, 앞의 책, 154쪽.
30) 김동인, '나의 변명 2', <조선일보>, 1932.2.7.
31) 김동인, '나의 변명 3', <조선일보>, 1932.2.9.
32) 김동인, '나의 변명 4', <조선일보>, 1932.2.10.
33) 염상섭, '所謂 ‘모델’ 문제', <조선일보>, 1932.2.27.
34) '광염 소나타', 앞의 책, 324-325쪽.
35) 마사 누스바움, 앞의 책, 146쪽.
36) 박재익은 김동인이 이희철의 'K선생을 생각함'이라는 글에 대해 “이만큼 맑게 이만큼 아름답게 되면 쓴 筆者도 한 번 그 苦생을 痛切하게 맛보고 십다.”(김동인, '글동산의 거둠', <창조> 7호, 1920, 66쪽)라고 쓴 것을, “슬픔과 고통에 대한 감각은 고통스러운 타인의 삶을 향하지 않고, 그 슬픔을 재현하는 말”, 다시 말해 “그 말의 미적 가치”에 집중한다고 분석한다. 거기서 “타인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동정’”은 찾아볼 수 없다. 박재익의 말처럼 김동인에게 있어 소설은 문학적 언어를 통해 미적 가치를 빚어내는 예술이자 놀이였다. (박재익, '문학이라는 소꿉놀이: 김동인 초기 문예론 재독', <현대문학의 연구> 67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19, 109쪽.)
37) “나라를 팔고 고향을 팔고 친척을 팔고 또는 뒤에 이를 모든 행복을 희생하여서라도 바꿀 값이 있는 것은 냉수 한 모금밖에는 없었다.” ('태형', <김동인 단편 전집 1>, 앞의 책, 123쪽)
38) 위의 소설, 138쪽.
39) 위의 소설, 139쪽.
40) “이상한 일이거니와 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방 안의 전체가 떨린다(공분이라든가 동정이라든가는 결코 아니다). 몸만 떨릴 뿐 아니라 염통까지 떨린다.” 위의 소설, 121쪽.
4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9년, 31쪽.
42) 위의 책, 204쪽.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