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작업 = 한송이 에디터]

 

시인과 그래픽노블 작가는 인터뷰해 보았지만 평론가는 처음이다. 낯설다. 낯선 감정은 가던 길을 멈추게 하니 자연스럽게 생각도 멈추게 된다. 나는 지금 허름한 카페에 앉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읽으며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에 대해 논한 평론가의 글에 대해 어떤 말을 꺼내 놓아야 할까. 게다가 이 평론집을 온전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에 숨겨진 많은 각주를 만져봐야 한다. 그런데 5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찾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터뷰라 함은 한 사람을 온전히 통과했을 때 다가갈 수 있는 행위이지 않겠는가. 이 문장이 거칠다면 최소한 대상 작가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숙지한 후 작업에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다. 밀고 나갈 수밖에. 무엇보다도 시의성이 중요한 인터뷰이니. 작가마다 목소리 내는 방식이 다르듯이 비평 스타일 또한 평론가마다 모두 상이하다. 취향의 영역에서 좋고 덜 좋음이 논의될 수 있듯이 비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론가에게 있어 기본은 텍스트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자료를 성실하게 읽고 잣대를 세운 후 자신의 입장을 덧붙이는 것은 값지다. 이 방식에 있어서 오혜진 씨는 열심히 자료를 읽었고 객관적인 입장 위에서 잘못된 것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첫 평론집 ‘이후’의 작업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겨울의 문턱에서 평론가 오혜진 씨를 만나러 간다.

*

문종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 2019년 4월 26일에 출간되었어요. 우선 이 평론집이 나오기까지 힘들고 많이 고독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인가 제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움켜잡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떤 힘이 이 글을 쓰게 했을까. 같은 생각을요. 아무튼 ‘각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평론집으로 문학상을 받으신 것에 대해 축하드립니다. 독자들에게 이 평론집이 나오기까지의 긴 여정과 함께 가슴 뭉클했던 사연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으신지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르게 말해 책 탄생 배경.

오혜진: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힘들고 많이 고독”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최강민 선생님이 쓰신 심사평에서도 저를 가리켜 “비평의 외로운 길을 가고 있”다고 하셨더라고요. (웃음) 제 평론집을 ‘젊은 세대의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과 함께 등장한 책’이라고 평하시면서도 저를 ‘외로운 평론가’라고 칭하시는 게 좀 의아했습니다. 
저는 ‘문화 다’가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경계와 언어에 늘 민감한 관심을 보여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외로움’을 말씀하시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한국문학장, 나아가 이 세계에서 ‘(비교적) 젊은 여성-소수자’로 존재할 때 제가 ‘외로웠’을까요? 하지만 모든 젊은 여성평론가에게 ‘외로운 평론가’라는 규정이 따르지는 않으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외로움’이 저의 젠더나 세대와 관련된 ‘소수자성’에 근거한 정동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 주장이 주류 문단에서 좀처럼 수용되지 않는 소수의견으로 치부될 때 저는 좀 ‘외로웠’을까요? 물론 저는 문학제도가 상정한 ‘등단’을 하지 않았고, 제 주된 활동분야도 ‘문학과지성사·창비·문학동네’로 칭해지는 ‘주류’ 문단은 아닙니다. 문단 인사들과 개인적 친분이나 교류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그런 의미에서 저를 ‘외로운 평론가’라고 말한다면 그건 문단중심주의적인 사고의 산물일 것 같아요. ‘주류 제도권 문단’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죠. 제 글의 텍스트들과 잡다한 레퍼런스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문단문학 외에도 각계의 여러 페미니스트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며 제 비평적 관심과 역량을 축적해왔습니다. 제가 그분들께 해드린 건 없지만, 적어도 제 비평은 다양한 문화예술계 창작자 및 연구자, 활동가들에게 빚지고 있고, 이들과 함께 호흡해왔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슴 뭉클”한 사연이랄 건 없지만, 평소 평론가로서의 저를 눈여겨보던 편집자가 제게 출간을 제안했을 때, 제가 좋아하는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협업해 제 글들을 아름다운 책으로 묶어줬을 때, 책이 나오자 페미니스트 동료·선배들이 축하와 격려를 쏟아부어줄 때 무척 감사하고 기뻤죠. 그 모든 게 ‘페미니스트 연대’의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문종필: 모든 사람들이 고독한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이야기 했어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인간의 모습이요. 제 이야기를 조금 괜찮지요. 2013년 대학원 수료 후 학교를 떠나 대안연구동체라는 인문학 단체에서 공부할 때에요. 그 공간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요. 대학원에 가지 않고 공부하는 청년들. 똑똑한 지식을 가진 어르신 평론가들. 전공과 상관없이 좌우로 횡단하는 사람들. 이 분들은 등단 제도를 중요시 여기지 않았고 실제로 등단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다양한 지면에 발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글쟁이들이었어요. 그 당시 저는 이 분들을 보면서 꿈을 키웠던 것 같아요. 굳이 학교가 아니어도 가능하구나. 제도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구나. 동료들이 있으면 괜찮구나. 라고 생각하면서요. 오해가 있으시다면 풀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선생님의 답변 중에 “제 비평은 다양한 문화예술계 창작자 및 연구자, 활동가들에게 빚지고 있고, 이들과 함께 호흡해왔다고 믿습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에요. 빚지고 있다는 말이 서로에게 힘을 주고받는 것 같아서요.

오혜진: “오해”를 한 게 저인가요? (웃음) 인간 존재 일반, 글 쓰는 존재 일반이 가진 ‘외로움’이라면 굳이 저를 그렇게 칭할 필요가 없겠고요. ‘등단’ 중심으로 형성된 문학장에서의 ‘외로움’을 말씀하신 거라면, 그건 그런 방식으로 그곳에 속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기에 짚고 넘어가고 싶었어요. 더구나 ‘외롭다’라는 평가가 역사적으로 ‘글 쓰는 여성’들을 비극적이고 고립된 존재로 재현하는 수사였음을 상기할 때, 저는 그렇게 기록되고 싶지 않고요. 주관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많은 동료들과 함께한 제 연구환경과 조건이 ‘외로움’과는 거리가 먼 듯해 말씀드려보았습니다.

문종필: “‘외롭다’라는 평가가 역사적으로 ‘글 쓰는 여성’들을 비극적이고 고립된 존재로 재현하는 수사”였는지 제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많은 동료들과 함께한 제 연구환경과 조건이 ‘외로움’과는 거리” 멀었다는 선생님의 표현을 듣고 나니 부럽습니다. 오해는 제가 한 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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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평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은 어느 지점에 놓여 있을까요.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혜진: 글쎄요. 제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저는 ‘제가 이러이러한 비평가이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글을 쓴다’라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이러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연구자적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저는 식민지기 문학장 및 문화정치에 대한 연구를 해왔고, 특히 후기식민주의와 ‘트랜스’의 정치학, 젠더와 섹슈얼리티 개념을 중심으로 한 문화연구에 매진해왔습니다.

제게 글쓰기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제가 구구절절 설명할 일이 아니라 독자가 판단할 일이겠죠. 다른 필자들도 그렇겠지만, 저 역시 제가 말 걸고자 하는 대상, 논제의 성격, 글이 실리는 매체와 해당 장의 분위기 등을 고려해 그때그때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논의방식과 화법, 문체의 톤을 결정합니다. 어떤 분은 제 글이 공격적이라고 여기시고, 또 어떤 분은 제 문장이 날카롭고 정확하다고 말씀하시던데요. 저로서는 ‘바로 그것을 의도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문종필: 부조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움을 하셨어요. 저도 선생님의 작업에 응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싸움 이후라고 생각해요.―물론,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지만―선생님의 글쓰기는 어느 곳으로 향하게 될까요. 

오혜진: 구체적으로 제 “싸움” 혹은 “작업”의 어떤 면을 “응원”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제 글쓰기의 향방이라면,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발간 이후에 쓴 두 편의 글 '경계로서의 젠더와 “가능한 세계”'(김현진 편,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도록>, 터틀북스, 2020)와 '구겨버린 입장권─소수자의 존재론과 역사적 아카이브, 그리고 ‘퀴어링’'(<문화과학> 100, 2019년 겨울)의 문제의식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최근 저는 소수자의 존재론과 그것을 재현하고 역사화하는 방식에 관심 있어요.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전략이 소수자를 ‘가시화’하는 데에 경제적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대문자 역사의 서술방식 자체를 문제 삼거나, 소수자의 존재론적 특이성(singularity)을 보존하는 재현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존 세계의 정상성(normality)과 충돌·불화하면서 자신의 삶을 역동적으로 살아내는 소수자의 존재론,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계에서 활동하는 동시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과의 협업도 언제나 제 주된 활동 중 하나입니다. 제가 기획한 공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과 <원본 없는 판타지>(후마니타스, 2020)를 펴내는 과정은 제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줬어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공통의 쟁점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해 서로의 연구를 참조하며 같고도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는 과정을 목도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문종필: 글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해 응원을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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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저는 이 평론집에서 자연스럽게 '“포스트-아포칼립스”를 향한 미지未知의 미러링'과 '‘그날’ 이후의 서정시와 ‘망막적인 것’'에 손이 닿았어요.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매체가 ‘영화’와 ‘웹툰’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문학을 벗어나 영화나 웹툰과 같은 영역으로 손길을 뻗으신 이유가 있나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오혜진: 문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웹툰이나 영화에 매료되는 건 아니고요. <미지의 세계>의 문제의식과 재현전략이 한국문학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기에 제 흥미를 끌었고, <두 개의 문>·<26년>·<지슬>과 관련된 영화계의 논쟁 역시 기존 ‘정치와 예술’ 담론에 대한 제 오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비평적으로 개입해보고 싶었습니다. 웹툰이라서 혹은 영화라서 관심 가진 게 아니라, 그것들을 매개로 제 문제의식을 확장·발전시킬 수 있었기에 비평의 텍스트로 선택한 겁니다.

문종필: 자신의 “문제의식을 확장·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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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의 마지막 문단이 인상적이었어요.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예언컨대, 젊은 독자를 잃은 ‘K문학/비평’은 장르화된 방식으로만 겨우 존재하면서 영원히 ‘그들’만의 은어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애도의 대상도 되지 않을 것이다. ‘K문학/비평’이 없는 세계는 축복이며, 거기서 21세기의 독자들은 압도적인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물론 여기서 끝은 문학의 끝이 아니라 기존의 방식에서 진행된 문학의 ‘끝’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비평’은 어느 곳으로 향해야 될까요. 그리고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이 없다면 축구선수는 의미 없을 것 같아요. 타자가 없으면 욕망이 무용한 것처럼 독자가 없는 이곳의 문학은 어느 곳을 향하게 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몸을 던지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자신의 인정을 실험할 수 있을까요. 

오혜진: 잘 말씀해주신 것처럼, 제가 애도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K문학/비평’은 ‘한국문학 일반’이 아니라, 기존 한국 문학/비평의 어떤 ‘부후한 관성들’이예요. 그것의 종말을 기도했을 뿐, 한국문학 전체의 과거와 미래를 저주하거나 부정한 게 아닙니다. 저는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한다’라는 식의 도그마적 언어를 말하고 싶지는 않고요. 다만, 모든 독자/비평가는 한국문학, 나아가 한국사회의 ‘정상성’이나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여러 의제들에 대해 이 사회에 속한 ‘시민’으로서 숙고하고, 질문을 던지고, 그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여성문학·퀴어문학·장애인문학을 비롯한 소수자문학이 여성·성소수자·장애인들끼리만 향유하는 종족문학이 아니라, 이들을 ‘소수자’로 만드는 이 사회의 질서,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해온 그 질서와 역사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그 걸 조정하고 변화시켜야 할 시민으로서의 책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신경숙 표절사건과 페미니즘 리부트, #문화예술계_성폭력과 #미투 이후,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망라한 한국문학계 전반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와 독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죠. 이들은 한국문학계에서 통용되던 물신화되고 형해화된 민주주의의 기율을 심문하고, 공동체에 대한 자신들의 새로운 교양과 윤리를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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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선생님이 좋아하는 문학과 바라는 문학이 있다면? 최근 좋게 읽으신 시집은? 소설 혹은 영화는? 

오혜진: ‘문학’은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담론양식이자 연구대상이기 때문에, 그것에 뭘 바라거나 하지는 않아요. 최근 제게 강렬한 지적·정서적 충격을 준 몇몇 작품들을 언급해볼 수는 있겠네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의 보고'를 저신장장애가 있는 배우 신강수가 연기한 1인극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극단 엘리펀트룸, 김기일 연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2020. 11. 9~2020. 11. 20)와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일어난 동성애혐오 살인사건 및 그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을 취재해 만든 다큐멘터리 연극 <래러미 프로젝트: 십 년 후>(극단 북새통, 남인우 연출, 연희예술극장, 2020. 11. 5~11. 15)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특히 요즘 연극계에서 시도하고 있는 ‘배리어 프리’ 실험에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5·18 아카이브와 역사화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강상우, 2018)과 단행본 <김군을 찾아서>(강상우, 후마니타스, 2020)도 감탄하며 봤고요. 문학이라면, 특정 작가나 작품을 꼽기는 어려운데요. 최근 여성·퀴어를 비롯한 소수자와 관련된 주제에 도전하는 모든 제도권·비제도권 매체 및 작품들에 늘 관심이 있고, 모조리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접한 작품에 관한 평론들을 반드시 찾아 읽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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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마지막으로 지금 선생님께서 작업하고 계신 글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평론집에 실리지 못했지만 마음에 드는 글이 있었다면 어떤 글이 있었나요.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지만 선생님의 평론집을 읽을 미래의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의 구성은 편집자와 함께 매우 공들여 만든 것이기에 후회는 없고요. 그 이후에 쓴 글들이 또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꼭 ‘책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진도가 참 안 나가는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고요. 미래의 독자들에게 남길 한마디라면, “어서 ‘현재’의 독자가 돼주세요.” 정도일까요? 농담이고요. 이렇게 말할게요. “제 글이 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에 의미 있는 준거 혹은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P.S 오혜진 선생님께 미래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어서 ‘현재’의 독자가 돼주세요.”라는 말을 적어 주었다. 이 인터뷰 제목도 이 바람을 담고 싶다. 무엇보다도 오혜진 선생님의 박사논문이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술술 넘어갔으면 좋겠다. 술술!  

바쁜 일정 속에 시간을 내주신 오혜진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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