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국립한국문학관 학술대회 화면 갈무리

국립한국문학관(관장 염무웅)은 지난 26일 제1회 국립한국문학관 학술대회 ‘문학, 데이터. 효과.’ 1부 사전행사로 작가 대담을 개최했다.

선배 시인 백석을 향한 애정과 존경으로 ‘백석평전’을 쓴 안도현 시인과 분단 이후 고향 정주에 남은 백석을 주인공으로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쓴 김연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작가 대담은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사회를 맡았다.

“백석이라는 흰 바람벽이 있어, 소설가 김연수와 시인 안도현은 일곱 해의 마지막과 백석평전을 썼다”는 행사 문구처럼 ‘흰 바람벽이 있어, 기대 쓰다’를 주제로 진행된 작가 대담은 평론가 신형철이 오늘의 작가들과 백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신형철 평론가 [ 사진제공 = ]
신형철 문학평론가 [ 사진제공 = 국립한국문학관 ]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백석은 김수영 시인과 더불어 한국 문화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시인으로 현재에도 지금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시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언제 어디에서 다뤄도 이상할 게 없는 대상이 백석이다”며 “특히 올해 김연수 소설가와 안도현 시인이 백석을 다룬 작품을 냈기에 더욱 시의성이 있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자리에 나온 두 분이 백석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닐까”라고 주제로 백석을 선정한 이유와 두 작가를 초청한 이유를 함께 설명했다.

이날 대담은 백석의 삶을 ▲일본 유학 시절 ▲유학 이후 ▲만주 시절 ▲해방 이후 ▲유배 시절로 나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일본 유학 시절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오산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일본에서 4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백석은 이때 만난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밤은 노래한다’ 소설에서 인용했던 김연수 소설가는 시인에 대해 “조선의 청년 문인들은 이 시인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양적인 형식, 정형시 형태로 쓰면서도 담긴 내용은 낭만적이다”며 “방랑과 고등실업자로서의 비애감, 사투리 같은 것도 언어적인 접근으로 다뤘다. 세련된 형태의 시를 썼던 시인으로 백석도 아마 그런 부분에 끌리지 않았을까”라고 평했다.

안도현 시인 역시 ‘백석평전’을 통해 “백석의 시 형태를 보면 일본 모더니스트의 신식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며 이 두 시인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바 있다.

안도현 시인 [사진제공 = ]
안도현 시인 [ 사진제공 = 국립한국문학관 ]

이어서 안 시인은 “그렇지만 백석은 내용 면에서 향토성을 잃지 않았다. ‘사슴’ 출간 이후 이 부분에 대해 호되게 비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고향의 말을 시에 가져다 쓴 것은 시인으로서의 전략처럼 보인다”며 “시를 보면 1920년대 평안도의 모습,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고향 사투리 역시 자주 등장한다. 다른 시인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백석은 이러한 말 자체를 시인 자신의 자존심으로 내세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주장했다.

 

▲유학 이후

일본에서 4년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석은 조선일보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 이후 백석의 사랑도 시작됐다. 백석의 여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는 크게 통영의 박경련 시인과 함흥의 기생 김영한(자야)가 있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만난 여인들로, 그 와중에 백석은 경성과 충북 진천에서 두 번의 결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백석의 사랑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양산해내는 소재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소설가는 “백석의 인생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결혼을 하기 이해 굉장히 노력을 한 부분이다. 결혼 이후에도 쉽게 이혼해버리고 반려자를 찾아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던 게 인상적이다”며 “그런 맥락에서 박경련에게 구혼을 했던 것처럼 보이고, 짝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시로써 그 결과가 남았다. 자야에 대해서는 목표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결과 없이 중단됐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인물도 자야가 맞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무언가 남았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전했다.

‘백석평전’에 충북 진천에서 만난 두 번째 결혼 상대자를 화자로 한 시를 쓰기도 했던 안도현 시인은 “백석은 사랑에 대한 방식이 독특했다. 연애에 대한 탐색 없이 사랑을 했으며 충북 진천에서 결혼한 그날 첫날밤도 보내지 않고 자야에게 돌아가 ‘결혼하고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그렇게 결혼한 여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면서도 당시 여성상으로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백석을 원망하면서도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시 한 편으로나마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만주 시절

백석의 만주 시절에 대해 안 시인은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기 시작한 1920년대에서 카프 활동을 했던 임화도 어떻게 보면 총독부가 배경에 있었던 문인단체에 들어갔다. 백석은 이 단체에 들어가지 않고 만주로 떠났다”며 “어쩌면 일제의 영향이 국내에서 더 커질 것이라 짐작하지 않았을까”라고 이야기했다.

김 소설가는 “만주 시절 백석의 시를 보면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많이 말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시를 보면서 소설로 치면, 화자가 1인칭에서 전지적작가시점으로 바뀌는 부분이 있다”며 “그런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면 나로부터 벗어나서 더 큰 시야를 가진다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마 백석은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많은 문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선택할 수 없었던 선택도 하게 된다. 그 와중에 백석은 1947년까지 그 어떤 조직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는 안 시인의 ‘백석평전’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안도현 시인은 “현대사를 보면 1947년 전후는 월북, 월남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때였다. 그 시기에 백석은 월남을 하지 않고 북에 남았다”며 “그것이 단순히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선망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아마 백석이 보기에 친일을 하던 사람들이 문학판을 구성하는데 등장하는 등 이러한 남쪽의 형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연수 소설가는 “1958년까지는 사회의 형태가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나눠질 뿐 사회공간은 큰 차이 없이 전통적인 것들이 그대로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처럼 강하게 요구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백석에게는 북에 남은 것이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유배 시절

이후 북에 남아있던 백석은 수령 우상화 이후 분위기가 삼엄해지면서 1959년 함경남도 삼수군으로 추방을 당하고 1962년 시인 백석은 완전히 퇴장하게 된다.

김연수 소설가 [ 사진제공 = 국립한국문학관 ]

김연수 소설가는 “이번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이 시절 백석과 같은 나이를 지나면서 당시 그의 심정을 알고 싶었던 것이 동기가 됐다. 이때 외부적인 압박감과 평양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꿈이 공존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많이 쓰고 화려했던 젊은 시절이 끝나고 나면 생존 문제가 중요해지는데 왜 백석은 반대 방향을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이 깊게 다가왔다. 그런 선택에 대해 소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답은 백석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다. 소설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백석처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었고 굉장히 적극적인 선택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앞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백석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구축해놓은 언어의 세계에 충실하게 살면서 ‘시인 백석’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한국현대문학관에서 백석의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데 감격스럽다”고 덧붙였다.

안도현 시인은 “김연수 소설가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백석이 평양에 그대로 남아 계속 글을 쓰는 집필노동자로서 당의 정책을 빠뜨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 스스로 괴로웠을 것이라 생각된다”며 “무언가를 쓰지 않고 말년을 보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이 적극적인 선택이었다면 더 다행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고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백석의 연보를 보며 마지막 두 줄은 언제나 같다. 1962년과 1996년 사이 34년은 항상 공란이다. 이 34년 동안 시를 쓰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하면 아득하고 먹먹한 기분이다”며 “오늘 국립한국현대문학관 학술대회 첫째날에 백석의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34년에 대한 약간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감을 밝히며 마쳤다.

한편 한국문학관은 지난 2019년 4월 법인을 설립하고 올해 초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소재 법인 사무실로 이전해 오는 2024년 개관에 필요한 여러 사업들을 펼치고 있다. 콘텐츠 구축을 위한 다양한 자료 수집과 함께 문학관 건립 사업을 홍보하고 시민과 소통하기 위한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이번에 개최하는 제1회 국립한국문학관 학술대회에서는 그동안 한국문학관이 추진해 온 자료 수집 사업의 성과 발표에 이어 문학관 자료의 가치와 활용에 대한 전문가 토론이 펼쳐졌으며 코로나19 시대에 맞춰 비대면 온라인 방식으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다.

이날 사전행사로 작가대담을 진행했으며 이후 27일에는 ‘문학 자료의 효과(effect of literary data)’와 ‘자료 효과로서의 문학(literature: data-effect)’을 살펴보고자 ‘문학. 데이터. 효과.’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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