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민중 · 민족 · 민주운동의 큰 기둥이었던 백기완 선생이 2021년 2월 15일 새벽 향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백기완은 천석꾼의 부자집 손자였다. 1992년 『월간 길』 12월호에 실린 황광우 씨의 글 ‘민중후보 백기완의 일대기’에 따르면, 백기완의 할아버지 백태주 씨는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주는 활동을 하는 등 독립 운동에 헌신적이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수 천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은율에 피신해 있던 백범 김구를 극진히 돌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들이 빌미가 되어 일본 경찰에 고문을 받고 숨을 거둔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해방이 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 열 세살의 소년 백기완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한 인텔리였던 아버지 백홍렬과 둘째 형,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유학을 간다. 어머니와 누이, 큰 형은 고향 은율에 남았고, 그것이 그들과의 그리고 고향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서울에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는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고, 은율의 일도국민학교 4학년 중퇴가 문서상 그의 최종 학력이 되었다. 공부를 아예 할 수 없는 상황만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애국통일 고취를 위한 국민 궐기대회’에서 연사로 등단한 소년은 그 자리에 있던 백범 김구의 눈에 띄었다. 김구는 소년 백기완에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노라 약속했지만, 아버지의 단호한 거절로 이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 후 백기완은 평생을 독학자로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얼마 뒤 한국전쟁이 발발면서 백기완과 그의 작은 형도 징집이 되었다. 2017년 뉴스타파와 진행한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그는 당시 전사하기 전 작은 형이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말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북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차마 북쪽을 향해 ㄴ총구를 들이밀 수 없어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가슴아픈 사연은 후에 백기완으로 하여금 ‘남북통일’ 운동에 헌신할 수 있게끔 한 개인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뒤 청년 백기완은 청년들을 조직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개진한다. 농민운동을 계기로 평생의 동반자가 된 김정숙 여사도 만난다. 1956년 농민운동과 관련해 강연자로 참석한 자리에서 당시 덕성여대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던 김정숙 여사와 만나게 된 것이다. 백기완이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만난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나하고 한살매(한평생)를 맺자”고 고백을 했다 한다.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그의 말대로 ‘한살매’를 함께 한다.

반독재・반정부 투쟁
한편 1961년에 벌어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백기완은 본격적으로 반정부 투쟁에 나서게 된다. 특히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수교회담에 나서게 되자 적극적으로 이에 대한 반대 투쟁에 앞장선다. 이 시기 많은 재야 인사들과 친분을 쌓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사상계』를 발간한 재야 지도자 장준하와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1967년엔 장준하와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한다. 백범사상연구소는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로 확대개편 하기 전까지 ‘백범’이란 말로 통일을 담지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권이 ‘통일’이란 말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립 이후부터 통일문제연구소로 개편한 뒤에도 이 기관은 많은 재야 인사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선 모든 집회가 신고대상이었기 때문에 재야 인사들은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를 진행하기 위해 ‘가짜 결혼식’을 연다. ‘YWCA 위장결혼사건’이 그것이다. 주례 역할을 맡은 백기완과 그의 동료들은 전두환이 지휘하던 보안사에 끌려간다. 거기서 그는 이후 그의 건강에 큰 영향을 준 혹독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이 잇달았다. 2년 뒤 석방된 백기완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위장결혼사건을 함께한 최열이 그를 강원도에 모시고 가서 요양을 시켰다. 

요양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가택연금을 당한 백기완은 박정희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가택연금 상태에서 탈출해 대학생들의 집회에 나가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계기로 온국민의 분노가 들끓었고, 백기완도 그 열기에 함께하며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고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이 모두 출마를 해 야권이 분열된 상황에서 백기완은 다시 대의를 위해 어려운 자리에 나선다. 민중후보로 출마해 야권 대통합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의 ‘민주대연대’ 거부로 야권통합은 무산되었고, 백기완은 대선 이틀전에 ‘민주대연대’를 이루지 못한 데 책임을 지고 후보사퇴를 했다. 1992년 대선 후보로 다시 나온 그는 5위로 낙선을 하고, 이후 통일문제 등에 주력하며 시민 운동을 해나갔다.

장산곶매
장산곶은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바다에 빠진 ‘인당수’ 근처다. 북한의 장산곶과 남한의 백령도 사이에 ‘인당수’가 있다. 이 장산곶에 사는 매에 관한 전설은 백기완과 뗼 수 없는 관계다. 1979년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병원은 커녕 옥중에 있어야 했던 때, 그는 딸에게 보내는 서간체 형식으로 장산곶매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했다. 장산곶매는 전투에 나서기 전에 자기 둥지를 모조리 부수고 딱딱 거리는 부리질을 한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전투에 임하려는 때문이다. 어둠 속 높이 오르는 장산곶매의 딱딱 거리는 부리질 한 번에 (백기완의 표현대로) “밤하늘이 열리며” 별이 하나씩 생긴다. 그것이 우리 민중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 백기완의 뜻일 것이다. 별을 하나씩 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반독재 투쟁을 말하든, 통일을 말하든,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대해 말하든, 백기완에게 언제나 중요한 것은 민중의 해방이었다. 그 과정과 자세한 내용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그가 아주 오랫동안 민중해방을 말했고 또 그 말을 실천하며 산 것을 우리 모두 안다. 그러므로 백기완은 하나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두루마기를 걸치고 헝클어진 백발머리를 한 채 장산곶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매로 호랑이처럼 말하는 사람. 그의 말은 ‘민중 해방’을 향했고, 몸은 그 말을 따랐다. 큰 뜻을 품고 그 어떤 패배주의도 용납하지 않으며 살아온 그를 보내며,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노나메기’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노나메기의 뜻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위해 산다면 그의 말대로 “똑같은 일 초를 살더라도 영원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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