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한송희 에디터]
[사진 = 한송희 에디터]

당신의 사유에 포함되는 동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개와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 혹은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는 돼지와 닭, 나아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생명체일 수도 있다. 인간과 동물은 포식자와 피식자가 되기도, 때로는 가족의 일원이 된다. 분명 쉬이 매듭을 지을 수도, 풀 수도 없는 복잡한 관계임은 확실하다. 

비거니즘을 비롯하여 동물권에 관한 토론은 활발히 진행 중이며, 문학3을 비롯한 많은 문예지 또한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지난 1월 8일에 출간한 인문잡지 ‘한편’은 수의학부터 경제학, 여성학, 사회학에 걸친 10편의 글로 동물과 인간의 세계를 보여준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리는 지금껏 외면했던 질문들과 마주한다. 동물복지 연구자 최태규는 동물원에서 동물이 죽는 현장을 기록하며 질문을 던진다. 

“얼어 죽지 않고, 배를 곯지 않을 수 있다면 갇혀 있는 삶은 살 만한 것인가?” 

해마다 많은 아이들이 현장학습으로 방문하는 곳임에도 동물원과 관련된 법률은 2016년에서야 제정되었고 죽은 동물은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현실을 직면한 저자는 하나의 제안을 한다. 바로 동물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동물원과 마찬가지로 유기동물 보호소의 동물들은 이름이 없다. 두어 자리의 숫자가 이를 대신한다. ‘이름 없는 동물 보호소’의 이소영은 숫자로 불리는 동물들이 누군가에게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보호소의 현실은 가혹하다. 동물 복지 차원에서의 안락사를 꺼리는 사회에서 보호소의 동물들은 작은 우리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한다.

최근 유행하는 반려동물 행동 교정 프로그램을 비롯한 한국의 반려문화가 미디어와 자본에 어떻게 얽혀있는지, 인간이 동물의 쾌고 감수능력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유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은 하나의 질문에 직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전윤정의 ‘낙태는 여성의 권리다’에 등장하는 동물로서의 여성은 이러한 사유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자본주의에서 이어진 근대사회의 인구 통제 정책 속 여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동물이었다고 주장한다. 임신과 출산을 결정하는 주체가 여성이 아니었다는 지적은 현대에 와서 낙태권 제정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여성을 인간이 아닌 자원으로 취급했던 사회를 벗어나 이제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비건과 동물 복지를 꿈꾸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심이 아닌,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를 똑바로 보는 힘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은 동물을 사랑하는 목표를 위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이미 동물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믿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동물과 함께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문잡지 ‘한편’의 4호로 그들의 세계를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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