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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이 숨 가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요즈음, 하루아침에도 새로운 개념들이 쏟아진다. 무언가를 이해하기는커녕, 접해보기도 전에 또 다른 것들이 넘쳐흐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키오스크를 제대로 쓰기도 전에 비트코인이나 도지코인 같은 암호 화폐가 흥망을 거듭하고, 5G 폰을 사기도 전에 인공지능이 병을 진단하고 있다.

[알파고 기권, “Lee Sedol vs. AlphaGo, Round 4” 작품 캡쳐]
[알파고 기권, “Lee Sedol vs. AlphaGo, Round 4” 작품 캡쳐]
[이세돌, “Lee Sedol vs. AlphaGo, Round 4” 작품 캡쳐]
[이세돌, “Lee Sedol vs. AlphaGo, Round 4” 작품 캡쳐]

새롭게 쏟아진 것들 중 하나가 NFT(Non-fungible token), 대체 불가 토큰이다. 얼마 전 바둑 기사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승리했던 전설적인 대국의 기보가 NFT로 팔린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NFT가 거래되는 웹사이트 Opensea 에 들어가서 해당 작품을 봤다. 간단한 동영상이었다. 기보가 펼쳐지고, 알파고가 기권하고, 이세돌 구단의 웃는 사진으로 끝나는 짧은 영상이었다. 며칠이 지나니, 이 작품이 약 2억 5천만원에 팔렸다는 새로운 뉴스가 들려왔다. 

이렇게 NFT가 억 단위의 가격으로 팔렸다는 뉴스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나 빼고 모두 부자가 되는 것 같고, 나만 뭔가 모르고 있다는 박탈감마저 든다. 대체 이게 뭐길래.

일단 사전을 찾아봤다. 모르는 말이 한가득이다. 한경 경제 사전에서 정의를 찾아보자면 NFT는 ‘블록체인 상에서 유통되는 토큰의 한 종류로 각 토큰마다 고유 값을 가지고 있어 다른 토큰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토큰’인데, 참으로 복잡하다. 이를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NFT는 블록체인이라 불리는, 해킹할 수 없는 암호를 사용해 디지털 자산에 새겨 넣는 사인이나 각인 같은 것이다. 온라인 버전의 진품 증명서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도자기 장인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필체로 자신의 작품 아래에 각인을 새겨 넣는 것처럼, 디지털 파일에도 이제 그러한 각인을 새기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장인이 만든 도자기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한 작품이 되는 것이고, 완벽히 똑같은 각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처럼 NFT도 한 파일당 단 하나의 블록체인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하나의 NFT를 공동 소유할 수는 없다. 하나의 디지털 파일에 대해 NFT는 단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NFT가 새겨지지 않은 디지털 파일은 수천수백만의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런 NFT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화폐가 아닌 암호 화폐로 거래된다. 암호 화폐 또한 블록체인으로 만든 화폐인데,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블록체인이 위조지폐 방지 홀로그램의 효과를 가진다고 보면 된다.

‘디지털 사인’이 왜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로, 아직까지 돈으로 거래되지 않던 것이 돈으로 거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NFT는 지금까지의 예술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이게 뭔 소린가 싶으시겠지만, 이제 천천히 함께 알아가 보려고 한다.

NFT는 지금까지 누구나 당연하게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었던 디지털 파일들을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재화로 만들었다. 무언가가 재화로 거래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제 그 재화가 돈으로 판단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돈으로 재화를 사고 팔면서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돈을 잃는다는 뜻이다. 새로이 돈이 되는 것은 우리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그러한 주목이 옳든 그르든.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어야 의식주가 해결된다. 돈이 있어야 제대로 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노동을 덜 할 수 있기에 시간을 살 수 있다.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by digital artist Beeple. 출처 = CNBC Christie’s]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by digital artist Beeple. 출처 = CNBC Christie’s]

Beeple이라는 디지털 예술가가 만든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라는 작품의  NFT가 790억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팔리면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날 새롭게 세상에 태어난 NFT. 연신 비싼 가격에 팔린다는 NFT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다 보면 왠지 나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미 많아졌겠다- NFT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재화의 성공적인 데뷔는 잘 팔리는 재화, 돈을 많이 벌어주는 재화가 되는 것이다. 제일 잘 팔리는 재화는 새로우면서도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재화이다. 가령 스마트폰을 생각해보자. 핸드폰을 쓰던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시에, 공짜로 문자를 보낼 수 있고 길에서도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스마트폰의 기능은 30년 전만해도 필수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필수적이라고 인식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가진 지금 세상에서는 정말로 필수가 되었다. 경영학에서는 세련된 말로 새롭게 하는 것을 ‘혁신’, 그리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도록 만드는 것을 ‘니즈(needs)를 창출’한다고 한다. 

의식주와 여가 거리가 충분한 사회에서 니즈를 창출해야 이익을 얻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거래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것들을 야금야금 시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근 몇 년 내에 급속도로 성장한 음식 배달 앱은 배달 기사와 음식점을 이어주고 돈을 받으면서 그 연결 자체를 시장에서 거래한다. 사람들은 SNS에서 광고를 보고, SNS 플랫폼은 광고를 내건 사람에게서 돈을 받는다. SNS 이용자들의 수고와 시간이 광고를 하는 사람과 플랫폼 사이에서 거래된 것이다. 민영화된 의료 보험으로 악명 높은 미국에서는 사람의 건강과 목숨을 사고 판다. 

NFT는 무료였던 디지털 파일에 블록체인으로 암호 각인을 새겨 넣음으로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았었던 디지털 파일들을 시장으로 끌고 들어왔다. NFT는 디지털 각인이라는 ‘혁신’이다. 동시에 디지털 파일을 소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기게 만들면서 NFT에 대한 ‘니즈를 창출’했다. 이제 NFT는 돈을 버는 재화, 시장 가치를 지닌 재화가 된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이 재화로 인정받은 것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NFT에 눈길이 가는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디지털 파일들을 여전히 인터넷에서 공짜로 다운 받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NFT를 살까? 지금 당장 인터넷 브라우저에 NFT를 치면 790억 짜리 NFT와 완벽히 똑같은 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는데도?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종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자유와 평등보다 구속과 권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설명하자면, 조금 옛날 얘기부터 해야겠다.  

인간은 늘 스스로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그에 맞춰 예술의 역사도 더더욱 자유롭고 평등한 방향으로 바뀌어왔다. 더 나은 것, 오리지널, 원본. 그리고 그 아래에 못한 것, 복사본, 짝퉁, 위조품. 이런 위계가 있던 세상에서, 예술은 점점 더 위계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림에는 늘 원본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원본과 모나리자의 복사본은 다르다. 모나리자의 복사본이 원본과 같다면,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원본을 볼 이유도 없고, 미술관에서 철통 보안이 필요할 이유도 없다. 그냥 우리는 집에서 복사본을 하나 인쇄해서 즐기면 그곳이 루브르다. 그러나 미술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한 예술품인 영화는 다르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원본이 없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봐도, 침대 위에서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봐도 ‘진짜’ 영화를 본 것이다. 같은 배우가 같은 대사를 하고, 결말도 같다. 지구 반대편 남미의 영화관에서 틀어주는 기생충과 한국의 영화관에서 틀어주는 기생충은 모두 같은 영화다. 미디어를 복제하는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이렇게 원본이 사라졌다. 애초에 원본과 복사본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 원본이 가지고 있던, 왠지 다른 것보다 멋져 보이고, 특별하고, 짝퉁이 아닌 ‘진짜’인 느낌인 아우라 또한 사라졌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여기까지가 문화 비평가이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설명이다. 그는 기술 복제의 시대에 원본과 아우라가 사라진 상황에 대한 논문을 써서 예술계에 놀라움을 선사했고, 아직까지도 그의 의견은 유효하다.

원본과 복사본의 우열이 없어진 시대에, 무수히 만들어진 동일한 이 복제 작품들은 ‘시뮬라크르’라고 부른다. 원래 시뮬라크르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이 말한 개념인데, 이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었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완벽한 관념의 세계, 이데아 세계를 꿈꿨던 플라톤은 현실을 그저 이데아의 복사본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은 이 현실을 시뮬라크르, 원본보다 훨씬 못난 복사본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늘 현실보다 나은, 우월한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원본과 복사본의 개념이 없어졌고, 하나의 영화 파일에서 무수히 복제된 영화같이, 복제가 가능한 작품들은 모두 동일하고 평등한 지위에 놓여있다. 현대에 와서는 이것들을 시뮬라크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들은 무엇이 더 낫고 못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과거의 전통적인 예술, 아우라를 가진 원본이 있는 예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화 그림, 작가만이 만들 수 있는 조각 등이 아직도 사랑을 받고 있다. 시뮬라크르를 특히 예술의 역사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새로운 역사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역사를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전구를 쓰지만 요즘 시대에 AI를 주목하지 전구의 사용에 대해 주목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나리자는 두 점이 있을 수가 없다. 만약에 두 점이 있으려면 누군가가 모작을 해야 한다. 다빈치가 직접 그린 모나리자 원본과 이것을 따라한 무명 화가의 짝퉁 복사본이 필요하다. 당연히 원본이 복사본보다 당연히 나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예술인 사진과 영화를 본다면, 세상 모든 디지털 기기에 사진 파일과 영화 파일을 복사해서 저장해도 누구 것이 원본이고 누구 것이 복사본이라는 구별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누구나 평등한 시뮬라크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살았던 20세기 초부터 누구에게나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예술이 세상을 뒤덮고 이끌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이 트렌드가 더욱 폭발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NFT가 원본과 복사본의 우위가 없는 예술의 평등 지향적 흐름에 태클을 걸었다. NFT는 속삭인다. ‘겉보기에는 같아도 NFT의 각인을 새겨 넣은 이것은 달라. 이것은 원본이지.’ 인터넷에 들어가 790억에 거래된 디지털 파일을 다운 받아도, 우리는 모두 어딘가 진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누군가는 ‘진짜’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 것은 복사본, 어딘가 미흡한 것, 짝퉁이니까. NFT는 이렇게 기술복제 시대가 가져왔던 자유롭고 평등한 시뮬라크르들의 시대의 막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 

NFT는 사람이라는 종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권위적인 것을 사랑하는지, 자유보다 구속을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 중 하나이다. 사람은 결국 평등하고 모두 함께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특별하기를 원하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일 경우에는‘ 권위적인 것을 원한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대상, 나만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원한다. 

[로베르 캉팽의 "메로드 제단화"(수태고지 세 폭 제단화) Annunciation Triptych (Merode Altarpiece)]
[로베르 캉팽의 "메로드 제단화"(수태고지 세 폭 제단화) Annunciation Triptych (Merode Altarpiece)]

NFT를 향한 욕망은 옛날 르네상스 시대 제단화를 부유한 개인이 의뢰하는 경우 천사 옆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도록 의뢰하는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로베르 캉팽이 그린 메로드 제단화의 맨 왼쪽에 꿇어앉은 남녀는 마치 성자와 성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들의 모델은 바로 이 제단화를 의뢰하고 교회에 기부한 부부이다. 완벽히 종교화인 것 같지만 그 안에 자신의 얼굴,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끼워 넣고자 하는 욕망. 권위를 가지고 남들보다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망. 우리 인간은 진정 자유와 평등을 원하는 것일까? 내가 가질 수만 있다면 자유보다는 권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BurntBanksy의 유튜브 채널의 한 장면. 뱅크시의 판화가 불에 타고 있다. 오른쪽에는 라이터를 들고 불을 붙이는 손.]
[BurntBanksy의 유튜브 채널의 한 장면. 뱅크시의 판화가 불에 타고 있다. 오른쪽에는 라이터를 들고 불을 붙이는 손.]

NFT에 대한 논의는 각양각색이다. 디지털 파일을 매번 불법 도용당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좋은 소식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도 NFT 등록을 먼저 하는 사람이 NFT의 발행자가 되어 이익을 가져갈 수도 있지만 말이다. NFT의 경제적 가치를 위해 디지털이 아닌 작품이 수난을 겪을 수도 있다. 얼마 전, the BurntBanksy라는 유튜브 계정은 그래피티 작가 뱅크시의 원본 작품인 ‘Morons’(바보들)을 사서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태웠다. 태우기 전에 찍어둔 사진을 NFT로 만들어서 약 4억 3천만 원에 팔았다. 이 행위예술(?)을 벌인 것은 블록체인 기업 인젝티브 프로토콜이라고 한다. 과연 NFT가 디지털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일지 알기 힘든 사례가 벌써 나오고 있다. 예술을 예술로서가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점에서 NFT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다른 예술들도 투기의 대상으로 쓰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분명 미술품 투기의 장이 넓어지긴 할 것이다. 더 나아가, NFT가 거래될 수 있는 시장을 만든 암호 화폐 기업들이 NFT가 거래될 때마다 수수료를 받는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것뿐이라는 통렬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를 차치하고, 결국 사람들은 NFT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위계 없는 시뮬라크르들 중 하나를 소유하기보다 원본, 진짜, 아우라를 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갤러리에서 전통적인 그림을 돌아보면서 특정 작품이 자신에게 특별해서 구매하든, 경제적으로 희소해서 돈을 불릴 수 있는 수단으로서 구매하든, 원본이 엄연히 존재하는 전통 그림을 사는 것과 NFT를 사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NFT는 한 때 사라졌던 아우라의 부활이다.

NFT는 단순히 사람의 욕망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그 욕망이 시장에서 돈으로 그 값이 매겨지기 시작한 이상, NFT는 자본주의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미디어 복제를 통해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사라진 기술복제 시대, 발터 벤야민 시대 이전의 아우라와 NFT의 아우라는 다르다. NFT는 여전히 복제품과 모습이 완전히 똑같다. 그렇기에 NFT가 발터 벤야민의 시대 이전의 예술품들만큼의 커다란 아우라를 가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기생충’의 광팬이 있다고 하면, 그는 봉준호 감독이 처음 구운 그 완성 파일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NFT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관이나 OTT 플랫폼에서도 충분히 원본과 똑같은 영화를 볼 수 있다. 아주 적은 수의 부유한 찐광팬이 아니고서야 봉준호 감독이 처음으로 완성한 편집 영화 파일이 들어있는 컴퓨터나 하드 드라이브를 통째로 사서 원본을 보존하진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NFT가 존재하더라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NFT 인증을 받은 디지털 미술품과 완벽히 똑같은 작품을 고화질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취향의 이유로든, 투기의 이유로든 찐광팬들만이 NFT를 사고, 그렇게까지는 열광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디지털 파일을 이전과 같이 즐길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전통적 미술이 ‘큰 아우라’를 가진 원본이라면, 이번에 NFT가 새로이 부활시켜낸 아우라는 ‘작은 아우라’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아우라’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빠른 기술 발전으로 새로운 거래 대상을 찾아냈다. 이전에는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 디지털 파일에 원본을 부여하는 NFT가 바로 그것이다. 원본과 복사본이 없어 보다 평등하고 누구나 가질 수 있었던 시뮬라크르와는 달리, NFT는 과거의 미술품들처럼 ‘진짜’라는 아우라를 지닌다. 아우라가 없던 것에 아우라를 만들어서 시장에서 거래 대상으로 만들어낸 사람들. 아우라, 특별함, 원본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NFT가 탄생했다. 우리 인간들은 결국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누리는 것보다 권력과 권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과학은 진보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나 혼자만 누리고 싶은 소유욕, 누구보다도 내가 특별하고 싶은 욕망과 같은 본능적이고도 보수적인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닐까. NFT의 등장으로 인해 아우라가 부활했고 신(新)아우라가 태어났다. 그 아우라와 함께 예술작품에 각인될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모양을, 어떠한 향기를 가졌을까. NFT를 사고파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NFT를 탄생시킨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남유연 칼럼리스트  

이력 :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Pratt Institute Fine art - Painting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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