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페이퍼, 스튜디오 촬영
사진=뉴스페이퍼, 스튜디오 촬영

 

여름은 누군가에게는 풋풋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시원한 바다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같은 계절을 공유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감정과 감각을 불러 온다. 정지향 소설가에게 여름은 10대 후반에서 20대를 닮았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때’, 그렇기에 정의되지 않은 수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때다. 

정지향 작가는 2014년 장편소설 ‘초록 가죽 소파 표류기’로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지난 해 10월에 첫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활동’을 발간했다. 

뉴스페이퍼는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활동’의 정지향 소설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1. (장편소설)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이후 6년 만에 출간하신 소설집입니다. 6년 동안 쓰신 소설들을 한데 묶으시면서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아요. 이번 소설집에 들어갈 단편소설은 어떻게 고르시고 순서를 정하셨나요?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는 첫 책이자 등단작이기도 해요. 그때 저는 여전히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처음 지원한 공모전이었고, 사실 덜컥 당선이 될 줄은 몰랐어요. 무척 행복한 일이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야 할지, 다음에 낼 책은 어떤 모양새가 되어야 할지 알아가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책을 내려고 그간 발표했던 소설을 살펴보니 20대 내내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주제가 모두 담겨있더라고요. 그중에서도 <토요일의 특별활동>을 아우르는 질문을 꼽자면 ‘성숙한 이별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될 것 같아요.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모두 한 시절을 마치고 떠나왔거나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연인으로부터, 친구로부터, 한동안 머물러왔던 장소로부터, 또 때로는 갑작스레 마주한 누군가의 죽음과 긴 애도 과정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어쩌면 20대는 잘 헤어지는 방법을 배우는 때인 것 같아요.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순간순간 책임을 지고 떠나야 할 때가 찾아오는 것이겠죠.

사진= 뉴스페이퍼, 스튜디오 촬영
사진= 뉴스페이퍼, 스튜디오 촬영

 

2. 저번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여름을 꼽으셨고 이번 소설집의 많은 단편도 배경이 여름입니다. 소설에 계절을 녹여낼 때 가장 중요시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계절은 소설에 생동감을 주고 분위기를 장악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저 배경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죠. 여름에 만나 연애를 시작한 이들은 오래오래 밤의 공원을 걷겠지만, 겨울에 만나 연애를 시작한 이들은 이자카야 구석 자리에서 술을 마시겠죠. 똑같은 연인이라 할지라도 어디에서 시작했는지에 따라 연애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요.
얼마 전 한 에세이에 이런 문장을 썼어요. “긴 하루가 공백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뜨겁고 무거운 공기는 이따금 정신을 혼미하게 하지. 얼음이 녹아가는 동안에는 왠지 조바심이 나고, 밤공기는 괜히 달아서 우리를 추동해. 그런 계절에는 왠지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을 것 같아서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는 거야.” 라고요.
이번 소설에는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에 걸친 인물이 많이 등장해요. 그들의 나이가 여름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때요.

3. 표제작인 ‘토요일의 특별활동’은 ‘놀토’와 싸이월드 등 그리운 소재들이 많습니다. 작품의 배경을 2000년대 중후반으로 설정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제가 중학생이던 시절을 떠올리며 썼어요. 2000년대 중후반이었습니다. 시범적으로 주 5일제가 시행되고, 그래서 학교와 같은 공공기관은 격주 토요일에 문을 닫지만, 일반 직장인들은 하던 데로 토요일 출근을 해야 했잖아요. 아이들은 직장에 다니는 보호자로부터도, 학교로부터도 감시받지 않는 토요일을 가지게 된 거예요. 덤과 같은 시간이요. 그 토요일에도 아이들은 자랄 테고 학교 밖에서 뭔가를 배울 거로 생각했어요. <토요일의 특별활동>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자신의 성적 지향성도 탐구할 수 있겠죠.

4. ‘한나’에서 백일장과 신춘문예, 문학회 등 문예창작과 관련된 여러 요소가 등장합니다. 이와 관련된 작가님의 경험이 궁금합니다.
저는 소위 ‘백일장 키드’였어요. 고등학교 시절 내내 백일장과 공모전에 도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재미있었어요. 백일장 날이면 당당히 결석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학생 신분으로 전국 곳곳을 둘러 다니는 것도 특권처럼 느껴졌어요. 친구들이랑 고속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는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백일장에 갔어요. 입시가 가까워져 오면서는 점점 압박이 심해져서 상을 받은 누군가를 질투하기도 했고, 제가 상장을 들고 오던 날에는 질투를 받기도 했고요. 고속버스 커튼에 얼굴을 묻고 몰래 울던 친구 생각도 나요.
대학에서도 문예창작을 전공했습니다. 문학을 함께 공부하는 사이는 묘한 것 같아요. 서로의 재능을 질투하는 일도 흔하지만, 어쨌든 ‘글’을 나눠보는 사이라는 점에서 더욱 끈끈한 유대가 생기는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고요. 다른 것을 전공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는 때도 있지만 저는 문학을 전공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운 것 같아요.

5. ‘토요일의 특별활동’과 ‘한나’에서 각각 ‘나’와 진아는 자신의 감정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데요. 우정과 사랑 중 무엇으로 정해진다 해도 동요가 적을 것 같은 담담함이 이번 소설집의 매력 중 하나로 생각됩니다. 작가님께서는 성 정체성, 우정과 사랑 사이 등 혼란스러운 감정 상태를 표현하실 때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시나요?
두 편의 소설에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토요일의 특별활동>에서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요. 중학생인 ‘나’는 처음으로 동성연애를 하면서 이것이 사랑인지,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형태와는 다른지, 친구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결국에는 허무하게 첫사랑을 떠나보내죠.
반면 <한나>의 ‘나’에게는 상대가 여자라는 것보다는 ‘한나’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것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무엇인지보다 한나 곁에 있고 싶고, 한나에게 손을 뻗고 싶은 마음이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죠. 저도 쓸 때는 ‘나’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혼란스럽게 느껴졌는데,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은 개인적으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느껴요.

6. ‘베이비 그루피’에서 자신의 연애가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인지한 주인공에게 건네는 초의 위로는 어설픈 동정보다는,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가지는 연대 의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여성의 연대를 표현하실 때 특별히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맞아요. ‘베이비 그루피’의 주요사건은 사실 ‘초’가 없이도 진행이 되어요. 미성년자인 ‘나’가 누군가로부터 성적착취를 당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 그것이 착취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완성될 수 있죠. 그렇지만 내게 일어난 폭력이 폭력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고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 데는 연대할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그동안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게 일어났던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처럼요.

사진= 뉴스페이퍼, 정지향 촬영
사진= 뉴스페이퍼, 뉴스페이퍼 촬영

 

7. 젠더 폭력에 대한 고발은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남자 강사부터 데이트 폭력, 성매매 투어리즘에 참여하는 남성들로 이어지는데요. 사회가 거부하지 않은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한 고민도 엿보입니다. 젠더 폭력을 작품에서 다루시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베이비 그루피>를 쓸 때 꽤 괴로웠어요. 미성년자인 ‘초’가 계속해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상대를 찾아가는 부분이 나와요. 제 안의 누군가는 ‘초’가 스스로 그 굴레를 끊지 않는다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가 아무리 구조적인 그루밍 안에 갇혀있다고 해도, 거짓말에 속고 있다고 해도,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저를 불편하게 했어요.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완성할 수 있었죠.
이 소설집을 쓰는 지난 몇 년 동안 저 역시 계속해서 배우고 나아가는 상태에 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 더 넓게,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 저에게도, 독자들께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8. 이번 소설집 외에도 자살 생존자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룬 글을 많이 쓰셨는데, 최근 작가님께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이슈는 무엇인가요?
네. 자살생존자와 관련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올해 2~30대 여성청년 자살이 늘어 많이 보도되기도 했었죠. 자살률이 이토록 높은 나라임에도 자신이 자살생존자라고 말하거나 자살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도 굉장히 금기시되는 사회라는 점이 아이러니해요. 한 명이 자살하면 크게는 28명의 자살생존자가 생겨나는 셈이라고 해요. 이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는 친족의 경우 4.4배, 친구의 경우는 3.7배로 늘어난다고 하고요. 주변의 지지도, 제대로 된 애도도 경험하지 못한 채 쌓인 감정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관련해 단행본 작업 역시 계획되어 있습니다.

9.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해주세요.
계속해서 단편 소설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는 요가를 주제로 한 엔솔로지 <요가하는 마음>(가제, 은행나무)가 출간될 예정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살생존자와 관련해 에세이를 작업 중에 있고, 곧 두 번째 장편소설 집필도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끔 관심 가지고 찾아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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