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1, 문제제기

나도 남들처럼 뽀대나는 세계철학사를 쓰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문예비평가의 소임을 다하느라 서가에 수천 권의 관련서들이 뒹굴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믿음이 가는 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 적지 않은 철학 애서들입니다. 대체 모든 걸 돈으로만 가치를 매기는 부박한 신자유주의의 세상에 저 수밀도와도 같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농익은 사유의 열매를 맛보는 재미를 그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이킥 오르가슴’이라 할까요? 그러니 나는 연애보다 철학이 더 좋다니 이 늘샘의 헛소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한국의 이름 없는 대중문예비평가로서 개인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를 사숙하고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루카치와 탈근대철학의 비조 니체를 경외해 왔지만, 나는 또한 한국의 뛰어난 철학자 이정우처럼 기어코 내 나름의 세계철학개사를 쓰고 말것다는 꿈을 키워 온지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나에게도 그 어떤 소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어느 때부터인가 ‘세계사는 문체사다’, 아니 ‘세계의 역사는 문체투쟁사’ 라는 천둥번개 같은 초견성의 깨달음이 있어 왔으나 풀리지 않는 학문적 화두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그래 이런 염원을 지니고 공부를 해 오던 중,

첫째, 부르크하르트의 고전 <이탈리아 르네상스이야기>를 읽으먼서 들었던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오랫동안 풀리지 않다가 최근에야 풀렸습니다. 그것은 르네상스기에 들어서 '플라톤 아카데미가 다시 세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라니, 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요. 이것은 서구의 문화사와 지성사의 흐름을 이해하지 모하고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둘째, '빠리 르네상스'라고나 할까요...

19, 20세기 세계 문화의 중심지, 빠리를 중심으로 모여든 일군의 성운과도 같은 지식인들이 1960년대 이룩해 놓은 휘황찬란한 인류의 지적 자산들을 읽으먼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언어 중에 '에뀌르튀르écriture'가 있습니다. '글쓰기'라는 말입니다. 또한 '담론', '텍스트'도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작가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렇다먼 여기 하나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을 '에뀌르튀르-담론-텍스트-작가의 죽음' 등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저변에 흐르고 있는 문화사상사의 의미, ‘그것it'은 머냐 이겁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야그하것지만 첫째 논의의 중심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 <국가>, 헤겔의 <미학>,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라는 문제적 저작들이 있고, 둘째의 언표énoncé의 핵심에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를 비롯하여 그의 충실한 적자 푸코의 <말과 사물>, <담론의 질서>, <저자란 무엇인가>등 수많은 역사적 문건들이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야그하것지만 첫째 논의의 중심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 <국가>, 헤겔의 <미학>,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라는 문제적 저작들이 있고, 둘째의 언표énoncé의 핵심에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를 비롯하여 그의 충실한 적자 푸코의 <말과 사물>, <담론의 질서>, <저자란 무엇인가>등 수많은 역사적 문건들이 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자, 여기 거듭해서 등장하고 있는 눈여겨볼 단어는 '흐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한가한schole' 사람들이 학문의 불을 밝히고 호기심의 눈을 밝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가 커다란 흐름, 줄기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사화시켜 놓은 게 개념이고, 하나의 패턴pattern으로 이것을 레니어하게 시대별로 선을 그어놓은 게 이른바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개념표지들입니다. 그러니까 늘샘이 앞의 두 가지 의문점을 해소하지 모하고 똥마려운 개새끼처럼 헤매고 다녔던 것은 '개념화'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개념지로서 학문은 이렇게 개념이라는 막대를 필요로 합니다. 사유의 방향과 틀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유용한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막대를 이리저리 휘저어 가먼서 불씨를 다스리듯이, 개념이라는 막대가 있어야 우리는 사유의 바다를 이리저리 휘저어가먼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사유의 원천기술이랄 수 있는 우리만의 사유의 막대가 없습니다. 이렇게 학문의 기초 도구가 전무한 무풍지대에서 철학을 한다고 하는 나는 참으로 무모한 게임을 하는 자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무모한 게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부지깽이라도 앞세워 먼 길을 가는 지팡이로 삼아야 할 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지팡이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일단 ‘모던modern’ 또는 ‘모더니티modernity'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활용하되,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내 나름대로 한국적 사유의 한 형태로서의 개념도구들을 제시해가먼서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첫째부터 보것습니다.

철학은 시대의 딸이라는 헤겔의 유명한 말이 있거니와, 이것은 문체도 마찬가집니다. 문체라는 형식 또한 그 시대가 낳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이야기>는 명저에 값하는 놀라운 자료들로 가득합니다. 대체 이만한 교양서가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숨이 막혀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운 지식의 향연을 누리고 지나는 사이 늘샘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려는데 다음과 같은 전언과 마주치고 맙니다.

"여기서 중세 신비주의의 여운이 플라톤의 학설과 근대 고유의 정신과 만나게 된다."

이 부분이 분명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인데, 그는 이렇게 그 상징적 기호로 뚜껑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부분에서 나는 또한 다음 대목을 눈여겨 볼 수 있었습니다.


"인격신론적인 사고방식의 핵심은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 특히 로렌초 마니피코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역으로 읽어보니 나는 다음 대목에 밑줄을 그어놓았습니다.

"이런 노력들의 열매로, 고대 정신과 그리스도교 정신의 결합을 정식 목표로 한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가 나타나기에 이른다."

자, 이것으로 우리는 '플라톤 아카데미'가 르네상스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성을 지닌 것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그러나 이것은 준비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플라톤 정신이 담고 있는 그것은 오랫동안, 머 페르낭 브로델의 개념으로 말해서 ‘장기지속’적 관점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문화의 지층으로 흘러오는 것이었지, 그러나 한동안은 지상에서는 대접을 받지 모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이러한 사실들이 가리키고 있는 기호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먼 일단 부활하기 이전의 플라톤 정신의 요체가 무엇이고, 이것이 그동안 왜 중세사에서 한동안 침묵을 강요당해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이야기>의 주내용은 피렌체(영어로는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든 구라파 제국에 앞서서 상업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진출한 것은 이태리이고(프리체, <구주문학발달사>), 그중에서도 피렌체가 이탈리아 제일의 도시이자 근대의 유럽 정신, 그러니까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발상지이기 때문입니다. 머 어느 시대나 문명의 교차점이자 문화의 중심지가 있었던 것이니, 고대의 아테네가 그런 곳이고, 근대의 피렌체가 그런 곳이며, 난중에 야그하것지만 하나의 블랙홀처럼 현대의 빠리가 또한 바로 그런 문명의 교차점이자 문화의 중심지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서구의 문명과 문화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곳에서 또한 ‘(서사)시’‘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총화로서의 아름다운 성취를 자아냈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또한 문화의 대충돌이라 명명할 수 있는 ‘(서사)시’와 ‘소설’, ‘소설’과 ‘에세이’ 간의 문체의 대투쟁이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세계사는 또 하나의 문체투쟁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먼 '문체style'라는 ‘형식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태도표명’ 루카치, <영혼과 형식>, 심설당.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적 격변기에 정치, 경제 세력 간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헤메모니로서의 대투쟁이 발생했던 것처럼, 꼭 그처럼 또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세계사의 변환이 있던 곳에 세계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이를 대변하는 문체에 대한 역사상 대투쟁이 일어났던 것이니, 그 첫 번째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요, 그 두 번째가 근대소설의 탄생이요, 그 세 번째가 바로 역사적인 에뀌르튀르 논쟁입니다.

자, 여기서 우선 중요한 말은 '근대''르네상스'라는 개념지입니다. 역사상 근대는 사회와 분리된 개념으로서의 '개인주의'의 발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인주의가 발흥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이 전제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머 '있는 놈이 큰소리 친다'고 물적 자산이 있어 한가하니 그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놈’은 물적 자산을 움켜쥔 당대의 세력자들을 암시하는 코노테이션이요, ‘큰소리 친다’는 이런 자들이 역사의 주역으로서 형식 또한 거머쥐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머 항구도시 베니스를 무시하고서는 야그가 안 되것지만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독립된 공화국으로 지중해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부터 면직물-머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돈이 많은 바로 이곳인 것입니다-과 은행업 등 상업이 발달하여 물적으로 가장 독립된 곳이었을 뿐 아니라 문화 예술 등 정신적으로도 가장 개화한 중심지였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 경우가 유럽최고의 금융가문 메디치집안이고, 여행가로 유명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오늘 ‘아메리카America’의 기원이 여기에 있고, 모두가 즐기는 고급스러운 커피의 상징이 된 ‘아메리카노Americano’ 커피는 바로 미국화 된 이태리식 커피를 말하는 것입니다-가 이곳 출신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3대 화성들의 등장과 눈부신 활약은 물질적인 안정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니스의 색채의 예술과는 다른 '선線'의 예술을 낳았던 것인데, 왜냐하먼 베니스는 소비도시이고 피렌체는 생산도시였기 때문인데, 이것이 곧 감성과 이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프리체(<예술사회학>)에 따르먼, 선은 지적이고 적극적이며, 합리적인 현상이지만, 인상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색채는 피동적, 정치적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단테와 마키아벨리, 보카치오가 또한 모두 이곳 피렌체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은 신과도 같은 희곡이라는 뜻으로 ‘comedy’는 본래는 '시골지방'이라는 뜻입니다. 머 사기꾼 같은 권력자들을 풍자, 비판했으니 지방으로 쫓겨났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근대 정치학의 고전으로 거기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켰음은 물론 사자도 되고 여우도 돼야 한다고 했는데 사자는 용기있는 아킬레우스를, 여우는 영리한 오디쎄우스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보카치오는 또 너무 유명한 근대소설 <데카메론>의 창시자입니다. 거기 수도사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야그하는데서 우리는 벌써 개인의식의 대두라는 근대의 모럴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을 두루 일컬어 이태리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하는데, 두루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르네상스는 재생re-birth이라는 뜻입니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재생의 실질적인 의미는 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근대적 의식으로서 고전기 그리스의 휴머니즘, 그러니까 인간주의를 일컫는 것이지만 정확하게는 개인주의를, 더 정확하게는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는 통해 우리는 역사상 부르주아적 개인주의가 나타났던 시기를 고전기 그리스로 소급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근대는 15, 6세기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서 일어 난 일련의 문화적, 역사적 산물입니다. 그것은 물적 자본을 가진 새로운 부르주아 상인 세력들에 의해, 신의 세계를 밀어낸 그들에 의해 주도된 국민국가, 자본주의, 주체철학,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일련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런 변화들을 관류하고 있는 핵심은 아마도 ‘인간적인 것의 발견’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국가’의 탄생은 권력의 중심을 신과 교회로부터 왕과 국가로 이전시켰고, ‘자본주의’의 탄생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긍정하게 하였고, ‘주체철학’의 탄생은 이데아와 신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객체철학을 인간 중심주의로 바꾸어 놓았으며, ‘과학기술’의 탄생은 인간을 자연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오늘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먼서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모던한 변화의 중심에 인간적인 것의 발견, 그러니까 ‘주체의 발견’ 이정우, <세계철학사.1:지중해세계의 철학>, 길
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주체의 발견은 객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요, 또한 주체의 발견은 이런 객체에서 ‘분리’된 감정으로서의 ‘나에 대한 자각’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주체가 객체와 분리된 것처럼, 꼭 그처럼 정치는 도덕과 분리되고, 경제는 인정과 분리되고, 문화는 풍자, 비판으로서 대상에 대한 거리를 지니게 되고, 예술은 대상을 외화시킴으로써 감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니, 이런 기풍이 사회 전반적으로 주류로서 인정을 받아 마치 비가 온 뒤에 죽순이 죽죽 올라오듯이, 대상에서 분리된 감정이 하나의 시대의 모럴이자 풍속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자 플라톤이 여기저기서 부활이 목소리를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먼 플라톤주의야말로 “난 그들과 다르거든”이라고 뻐기는 잘난 부르주아들의 모던적 위상심리를 대변해주는 근대의 이원론에 딱 들어맞는 이론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인데 대체 뭐가 반복되고 있다는 뜻일까요. 역사에서는 이보다 앞선 시기의 주체의 발견을 고전기 그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3~4세기에 해당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제국주의를 일컫는 시기입니다. 이때에 지중해와 에게해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전개하여 물적 자산을 확보한 신흥부르주아들이 전래의 귀족들과 불화를 겪었을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는데, 왜냐하먼 전래의 귀족은 종합적이고 신적 권위에 의지하던 신관적 사회의 주역들이고, 신흥부르주아들은 분화적이고 계산에 밝은 타산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의 주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불화discord’는 사실 국가와 도시의 대결이자 전체와 개인의 대결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찬양과 찬사를 통해 지배집단을 옹호해왔던 ‘(서사)시’와 귀족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중시했던, 하나의 철학적 균열로서의 ‘소설’의 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를 통해 알 수 있듯 찬양의 형식을 지닌 노래를 본위로 하는 ‘(서사)시’는 하나의 전쟁서사로서 전체 사회의 보존과 재현에, <오디쎄이아>의 오디쎄우스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소설’은 하나의 계몽 서사로서 개인주의 사회의 승리의 서사로서의 재구를 나타내는 역사적인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전체와 개인을, 다른 말로 동일성과 차이를 대변하는 예술형식으로 ‘(서사)시’와 ‘소설’의 형식의 갈등으로 나타난 게 바로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입니다. 거기, 정치인과 결탁한 국가시인 밀레토스가 철인소설가 소크라테스와 운명을 건 역사적인 문체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 때의 호메로스를 통해 ‘(서사)시’를 옹호하는 고대 시학의 대표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고, 소크라테스를 통해 소설을 대변하는 시인추방론을 주창한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로서의 보편적 실재론을, 플라톤은 개인으로서의 부르주아적 유명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사실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실재론자들은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유명론자들은 모두 플라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그리스 제국주의는 오래가지 모했습니다. 델로스 동맹이 해체되고 그리스제국은 내분에 휩싸이다가 결국 알렉산더에 의해 재통합되었고, 다시 끊임없는 분쟁을 거쳐 로마로 병합되어 이후 긴 중세를 거치는 동안 서양 중세를 사로잡은 사상은 플라톤 사상에 기초한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철학을 거쳐 서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을 둔 토마스 아퀴나스의 보편적인 스콜라 철학의 강물로 느리고 유장하게 흘러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니까 로마와 중세 사상의 흐름을 오래 동안 관장해 온 사상이 바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입니다. 우리는 근대 유명론에 따른 형태론적 기호학의 창시자 소쉬르의 후계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를 상징하는 장서관이 불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로 상징되고 있는 중세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으로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적 '보편적catholic' 사유가 지배하던 시기가 종말을 고하고 플라톤의 유명론적 개인주의에 따른 근대 사상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먼 우리는 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로마 사회에서 한때 유명론인 플라톤 사상이 득세하였다가 중세에 가먼 하나의 실재론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사상이 득세했던 것일까요?

계속됩니다...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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