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정 소설에서는 패배하는 듯 보이고 수동적이며 물러서 있는 듯 보이지만 내성의 경건함 안에서 고독을 견뎌온 인물들의 시간이 뒤늦게, 조용히 부상한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김이정 소설가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과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물속의 사막><유령의 시간>을 출간했다.

김 작가: 예, <네 눈물을 믿지 마>는 저의 세 번째 소설집인데요. 2010년에 <그 남자의 방>이라는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오고 꼭 11년 만에 나온 세 번째 소설집입니다. 총 8편의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 <믿지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 이 한 편만 빼고 전부 다 배경이 외국이거든요. 제게는 인물들에게 그런 거리감이 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 대부분의 소설의 인물들이 외국에 가서 결국은 그곳의 풍물이나 풍경이나 이런 것들 속에서 결국,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거든요. 그래서 이 인물들에게 그런 자신을 볼 수 있는 어떤 공간이 필요했고 또 그런 거리감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제가 10년 동안 뭔가 미친 듯이 이런 재난이나 폐허나 전쟁 이런 곳들을 찾아다녔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곳들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곳인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10년 동안  저의 어떤 내면이나 삶의 상징적인 공간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그런 곳들이 결국 나를 닮은 곳이고 또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고 때로는 그곳에서 울어도 좋을 그런 곳들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통이라는 게 제 각기 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지난 10년 사실은 제 개인의 삶이나 이런 것들에 있어서 가장 어떤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파산이라는 사건이 있어서 그 사건이 저를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었고 또 그게 결국은 고난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당연히 개인으로서의 내면도 황폐해져 가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이랄까 이런 것들도 다 흩어져 버리는 것 같고 뭔가 굉장히 큰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은데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산이라는 것은 사회적 금치산자가 되는 거더라고요. 저도 뭐 경험하기 전에는 사실 잘 몰랐던 건데. 그런 속에서 작가로서도 그렇고 개인으로서도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기 어려운 조건이었는데 근데 굉장히 신기하게도 또 그런 위기에 봉착하게 되니까 그곳에서 뭔가 문학이 싹 트는 이런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제가 파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딱 맞이하고 나서 제일 먼저 했던 게 사실은 노트북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매일매일 소설을 쓰는 것이었거든요. 정리하고 해야 될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매일 도서관을 가게 되더라고요. 가서 정말 숙제하듯이 매일 조금씩 조금씩 소설을 넉 달간 써가지고 완성한 게 <유령의 시간>이라는 장편 소설이었거든요. 다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가 결국 제가 살려는 몸부림이었고 그게 결국 저를 구해준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유령의 시간> 작가의 말에서 글쓰기가 결국 내 구명보트였다,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구명보트를 타고 위기에서 빠져나온 듯한 이런 기분이 들었어요. 근데 그게 이번 소설집도 사실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10년 동안 띄엄띄엄 썼던 소설들인데 비슷하게도 어쨌든 제가 쓸 때마다 저는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고 짧은 소설이지만 한 편씩 쓸 때마다 이것들이 결국 나를 위기에서 구해줬고 또 조금이라도 제가 뭔가 성장한 게 있다면은 이 글쓰기를 통해서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좀 들더라고요.

-   앞서 장편소설 쓸 떄 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는데, 2015년에 나온 <유령의 시간>은 어떤 소설인지요?

김 작가: <유령의 시간>은 뭔가 거창하게 말하면 저로 하여금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결심하게 만든 동기이기도 한데요. 그 모델이 저희 아버지예요. 아버지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저는 작가가 됐다고 할 수도 있는데,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자였던 한 인물이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반목 속에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고 또 사회에서 완전히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행로를 걷게 되는데요. 그게 젊은 시절 자기 마음속에 가졌던 꿈과 이상 이런 것들 때문에 한 인간이 이렇게 유령처럼 살아도 되는 것인가, 어려서부터 그런 의문이 참 많이 들었던 건데, 이건 실제로 저희 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1975년 8월 15일부터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거든요. 근데 9월 21일에 돌아가셨어요. 한 달 남짓 밖에 자서전을 못 썼죠.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지영이라는 인물이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남은 자서전을 보면서 이거를 내가 어떻게 하든 써 보겠다, 하는 결심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기는 그렇게 돼서 시작된 소설이었는데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어쨌든 저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썼던 소설입니다.

-   소설 속 인물들이 충동적으로 외국 여행을 떠나 길 위에서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답을 찾았을까요?

김 작가: 글쎄요, 답이라는 게 인생이 그렇듯이 뭔가 정답이나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소설이라는 게 저는 질문의 양식이지 해답을 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여태 소설을 써왔고, 끝없이 제 안에서 뭔가 질문이 생길 때 그거를 소설로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질문까지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질문을 제대로, 정확하게, 정직하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적어도 외국을 가든 아니면 뭐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든 내 안의 질문들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해답이나 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문제는 얼마나 위선이나 허위나 이런 것들을 가능하면 없이 정직하게 질문할 수 있느냐. 늘 거기에 중점을 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다음에 질문은 저의 몫이기도 하지만 또 독자의 몫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질문을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제가 베트남 간 거는 2017년 1월 1일날 갔거든요. 새해 첫날을 외국에서 보낸다는 데 의미를 잔뜩 두고 떠났는데 갈 때만 해도 물론 베트남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는 않고 있는 상황이었고, 또 나름대로 호의를 가지고 또 관심을 갖고 안다고 생각하고 갔었거든요. 근데 갈 때는 베트남 이야기를 소설로 써야지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때 마침 약간의 여유가 생겼을 떄여서 그런 소설 베트남 이야기를 소설로 써야지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때 마침 약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여서 베트남에서 이제 소설도 써야 되고 저에게 좀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베트남에서 한 달 정도 소설 쓰면서 지내자 하고 갔던 건데, 우연한 기회에 하미마을과 퐁니마을을 가게 됐거든요. 하미마을에 가서 제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순식간에 다 깨지고 내가 뭘 안다고 생각했던 거지? 싶을 만큼. 그 위령비가 있거든요, 하미마을에 가면 위령비가 있는데 거기는 이제 희생자들의 나이와 이름과 이런 것들이 쭉 나이 순서대로 적혀 있는데, 베트남 사람들의 이름은 남녀 구분이 돼요. 남자는 ‘반’이 들어가고 여자는 ‘티’가 들어가는데 그래서 이름을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금방 구분이 되거든요. 그리고 나이가 거기 나오니까, 보니까 89세 할머니부터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 세 명 이름까지 쭉 있는데 그 세 명의 아이들은 이름조차도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희생됐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보니까 전부 여성들이고 뭔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거나 노인들이거나 한데 이거는 뭔가 확 깨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근데 저를 더 놀라게 했던 거는 그 유령비 뒷면에 연꽃이 있는데 연꽃 그림이 너무 이상했어요. 좀 예쁘지가 않았어요. 그 연꽃 그림은 너무 좀 기괴한 느낌이 들어서 같이 갔던 친구에게 저 그림이 왜 그러냐 물었더니 그 연꽃 그림 안에 실은 그날의 학살 현장을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추모 글이죠. 근데 그걸 위령비를 세울 때 한국참전동지회 이런 데서 돈을 댔거든요. 근데 그 추모 글을 지워라, 없애라, 이런 요구를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베트남 주민들이 그럼 우리는 이거 필요 없다. 증오비를 차라리 세우겠다, 위령비 필요 없다, 이랬는데 그 타협책으로 정부가 이제 베트남 정부가 나서서 타협을 한 게 그 연꽃 그림으로 덮는 거였다고, 아예 없애지 못 하고 덮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베트남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었구나, 이 생각이 들면서 내가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피상적이고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잖아요, 사실은. 그날 또 퐁니도 가게 되고 했는데 그 두 곳을 다니면서 일단 사실을 알리는 게 중요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날 밤에 와서 원래 쓰던 소설이 있었는데 그걸 덮고 새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이 두 개의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달리 사실은 그날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밖에 저는 쓸 수가 없었어요. 저 같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먼저 더 중요한 일이구나 싶어서 그냥 거의 재현의 방식으로 소설을 썼는데, 쓰는 동안 굉장히 힘들었어요. 끔찍하고. 그래서 힘들었는데 제가 베트남 가기 전에 2016년 가을에 베트남 소설가 자응언 선생님하고 같이 대담을 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때 이제 베트남 이야기를 잠깐 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나의 사과는 소설을 쓰는 걸로 아마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사실은 소설 안에서도 제가 재현만 했지, 뭔가 사과라는 어떤 형식을 보이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오히려 섣부른 사과가 그들에게 뭔가 좀 더 그들을 모욕하거나 이런 게 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들이 자꾸 들어서 못 썼어요. 오랫동안 못 쓰다가 이번에 책 나오기 직전에 교정을 보면서 몇 년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제가 <하미 연꽃> 마지막 장면에 할 얘기가 있다. 이런 정도의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좀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던 소설들입니다. 이번 소설을 내고 참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인데, 저는 여태까지 이렇게 소설집을 내고 여섯 권을 냈지만 그렇게 피드백을 많이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물론 <유령의 시간>은 정말 고맙게도 상을 받기도 큰 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또 좀 다른 거고. 근데 이번 소설집을 내고 나서 이게 페이스북이라는 한정된 공간이기는 했지만, 굉장히 많은 리뷰들을 올려주셔서 저는 깜짝 놀랐어요, 사실. 너무 놀랍고 고맙고 한데 저는 여태 독자라는 어떤 대상, 구체적인 대상을 별로 생각 하지 않고 소설을 써왔고 이번 소설들도 일차로는 저 자신을 위해서 썼던 소설들인데 그런 리뷰를 보면서 비로소 제가 작가로서의 자의식이랄까? 정체성이랄까? 이런 것들이 재정립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이렇게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그 느낌을 리뷰를 읽을때마다 그 생각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서 닿고 때로는 닿았을 뿐만 아니라 공감하고 또 때로는 같이 울어주기도 하는 이런 과정들을 보면서 소설 쓰기라는 것들이 갖고 있는 힘 이런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어요. 그래서 어떤 책보다 큰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강으로 보트가 소리 없이 나아갔다. 메인 가트에선 힌두교 예배 의식인 뿌자가 시작돼 화려한 불빛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보트가 강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보트 주인은 그곳에서 디아를 띄우라고 했다. 사람들이 제각기 들고 있던 디아에 불을 붙여 강물 위로 띄워 보내기 시작했다. 나도 뱃전에 내려놓았던 디아 하나를 들어 불을 붙였다. 유속이 느린 강물 위에 가만히 디아를 내려놓았다. 꽃불이 강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강 건너편 어디엔가 있을 고탐을 위한 불꽃이었다. 디아를 살 때부터 마음 먹은 것이었다. 다음 디아에 불을 붙였다. 메리골드 꽃이 짓눌려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꽃잎을 편 뒤 두 손으로 강물에 띄웠다. 배를 타기 전 보트 주인이 고탐을 부르는 바람에 끝내 하지 못한 말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잃은 삶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한지도 몰라. 어떻게든 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쓸 거야.’
꽃불 두 개가 검은 강 위로 나란히 흔들리며 떠가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저기 모여든 배에서 떠내려 보낸 꽃불로 강물은 붉은 꽃밭 같았다. 오른편 가트에선 여전히 화장장의 장작불이 축제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왼편에서는 뿌자를 위한 노란 조명들이 강물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라나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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