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국의 시에는 '섬'이 있다. 그 섬에는 불혹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젊은 아버지가 살아 있다. 대추나무 '도장'이 찍고 간 붉은 낙인들이, 아직도 청상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어깨를 겯고 나란히 걷는다. "숟가락 두 개"로 세파의 길을 나선 그가 "새"를 그리는 시인이 되었다. -정윤천(시인)

주영국 시인은 전남 신안 어의도에서 태어나 2018년 예편하기까지 35년 동안 공군에 근무하며 기상예보관으로 일했다. 2004년 13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회 오월문학상과 2010년 <시와 사람> 신인상을 받았다. 현재는 한국작가회의 회원과 죽란시사회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 시인: 저는 2004년에 제13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 이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때 군인 신분이었는데 군인 신분으로 전태일 정신을 시로 쓴다는 것은 좀 뜻밖이기도 하고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님의 민주정부가 이어지면서 어떤 자신감을 가지고 저만의 특유한 시를 응모를 해봤는데 다행히 당선이 되면서 이렇게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시를 써오고 있습니다.

 

- 고향 어의도와 가족사가 궁금합니다.

 

주 시인: 최근에 알게 된 내용인데 제 고향 어의도가 상당히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곳이더라고요. 잘 아시겠지만, 명량해전을 마치고 이제 이순신 장군께서 퇴각을 해가지고 3일 동안 거기에서 머무르면서 승전 잔치를 한 곳이 저희 섬이더라고요. 나중에 찾아보니까 난중일기에 무려 세 번 정도 언급될 정도로 상당히 유서 깊은 곳이었는데 저는 그걸 모르고 자랐습니다. 사실은, 모르고 자랐었는데 얼마 전에 알게 돼서 어의도를 시로 표현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써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그 섬마을에서 아버지는 물고기를 잡는 가난한 어부로 살아오셨죠. 근데 제가 군대 생활을 하던 어느 해 겨울에 느닷없이 46세에 생을 마감하시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아버님이 돌아가시니까 어머님은 40대 초반에 홀로 되셔가지고 그 어린 자식들을 건사하시면서 지금까지 살아오셨는데 지금 연세도 많아지시고 편찮으신 데가 많아가지고 제 마음도 아픕니다. 거의 아버님의 한을 그대로 어머님이 이어 받으셔가지고 이제 살아오신 거죠. 아마도 제 시에서 어떤 서정성이 발견된다면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고향과 가족들 그리고 형제, 친척, 이웃들 (덕분)이지 않았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오랜 공군 기상예보관 생활이 時作에 도움되었겠어요.

 

주 시인: 공군 기상대에서 하늘과 바람과 구름을 친구삼아서 35년 정도 생활을 하다가 2018년에 퇴직을 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직장이 담장이나 어떤 철조망으로 막혀 있는 곳은, 아마 군대 아니면 교도소일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생활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떤 자유의지라든가 그런 게 이제 강할 텐데 그런 어떤 하늘, 구름, 바람 등의 어떤 기상 요소들을 보면서 그런 마음들을 키웠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2006년도에 파병이 돼서 이라크 전장에 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아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그런 현장에도 바람이라든가 구름이라든가 그런 기상 요소들은 유유하게 이렇게 존재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인간들이 그어 놓은 경계선에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을 비롯한 기상 요소들의 어떤 상징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시를 쓰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새점을 치는 저녁》은 참여시와 서정시가 어우러진 시집입니다.

 

박 작가: 아마도 잘 아시겠지만, 저희 남도는 의향의 고향이라고 해도 누가 부정하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어떤 불이라든가 압제가 있으면 가장 먼저 분노하고, 가장 먼저 맞서 싸우는 지역이 남도 아닐까 싶은데요. 죽창을 깎아서든 펜을 버려서든 어떻게든 어떤 정신을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를 만들어왔는데 아마 자연스럽게 저에게 그 정신이 스며든 것 같고요. 제가 볼 때에는 군 생활 하면서 어느 시점에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의 추천으로, 그 당시 진보적 잡지가 있었습니다. <말>지라고 지금은 폐간되었나 어쨌나 잘 모르겠는데요. <말>지가 있었고, 그 당시에 한겨레신문이 창간 되어가지고 어떤 민주적인 역할들을 했었습니다. 군사독재에 맞서서,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저의 저항의식과 역사 의식, 현실인식이 참여적인 시로 형성이 된 것 같고, 거기에다 어떤 남도만의 따뜻하고 아늑한 서정성들이 곁들어져서 참여적 서정시로 혼합이 되어서 시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김미옥 선생님께서 참여적이면서도, 진보적이면서도 따뜻한 서정성이 발견된다고 평을 해 주시더라고요. 저는 그 평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봄 이불 한 채

대주아파트 옆 외진 공터에

분홍색 봄 이불 한 채 버려져 있다

누군가의 마지막 몸을 추억하며

입동의 바람 앞에 웅크리고 있다

 

경상도 오늘 비행장에서 일을 할 때

아내와 나는 숟가락 두 개로 살림을 시작했다

연탄보일러 숨구멍을 줄이며

석유난로에 밥을 끓이면서도, 우리는 좋았다

 

봄 이불 한 채를 사며 자꾸만 값을 조른

아내는 베개 하나를 덤으로 얻었지만,

흥정에 나서지도 못한 나는 애먼 돌부리나

툭, 툭 걷어차며 용문의 먼산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봄 이불 솜처럼 부풀어 올라

새처럼 조잘거리며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활주로를 이륙한 비행기는 새처럼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새처럼 날 수 있다며

아내는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봄날의 꿈을

꾸기 위해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분홍색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죽령을 넘어온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도

비행기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랑지의 쓸쓸함도 욱씬거리는 뼈아픔도

봄 이불 속에서 자근자근 찾아들었다

 

신혼의 단잠을 재워주던 봄 이불 한 채

낡은 솔기의 실밥을 뜯으며, 숨죽은

솜을 부풀리며 아내가 느릿느릿 말을 걸어온다.

 

- 시 <봄 이불 한 채>가 각별한 이유는요?

 

주 시인:  시집 62쪽에 나와 있는 <봄 이불 한 채>라는 시인데요. 사실 이때 저는 경상북도 예천이라는 비행장에서 기상예보관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불의의 사고가 있어가지고 몹시 아팠던 적이 있는데 제 아내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가 내려와서 간호를 해주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식의 기회를 놓쳐가지고 동거부터 시작하게 됐는데요. 아주 가난하고 아주 우습게 그야말로 시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숟가락 두 개로 이제 신혼 살림을 시작을 했죠 ···. 어느 날 제가 겨울에 출근을 하다가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이불 한 채가 버려져 있더라고요. 그때 우리가 그 당시 가난할 때 샀던 그 봄 이불 한 채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시의 모티브를 얻어가지고 썼는데 예전에 어떤 문학단체에서 이 시를 낭송하다가 끝까지 읽지 못하고 울어버린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집사람도 시집에서 이 시가 제일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읽으면 이 시를 끝까지 못 읽어요. 그때가 생각나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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