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두 개의 기둥

 

나는 지난 회에 ‘인류사는 문체투쟁사다’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시인은 왜 철학자를 고발하였나’를 풀어갈 것을 약속하먼서 이걸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철학사에서 하나의 패턴pattern으로 서로 부딪치고 차이와 반복을 드러내며 강물처럼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은 시와 소설이라는 문체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음을-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대변하는 철학자이고, 플라톤은 소설을 옹호하는 철학자로서-좀 장황하게 늘어놓으먼서 대서사로서의 서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먼서 나는 시리즈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지었습니다.

“왜 로마 사회에서 한때 유명론인 플라톤의 ‘개별’ 사상이 득세하였다가 중세에 가먼 하나의 실재론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 사상이 득세했던 것일까요?”

이것은 내용상으로 두 가지이니 먼저 왜 로마 사회에서 한때 유명론인 플라톤의 ‘개별’ 사상이 득세하였는지부터 보것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 제국 이후에 플라톤사상이 득세하였음을 나타내는 철학사상의 표지는 바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입니다. 그러니까 신플라톤주의라는 말은 신자유주의가 아담 스미스(<국부론>)의 고전적 자유주의시대를 전제로 하는 것처럼, 꼭 그처럼 신플라톤주의는 예전의 플라톤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신플라톤주의가 득세하기 전에는 이와 대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세력을 얻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철학사를 보건대, 그리스의 붕괴 이후 알렉산더가 일시 대제국을 이루었다가 얼마 후에 무너지고 다시 로마로의 대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수백 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전쟁이 일상이 된 어지러운 난세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멸망-알렉산더제국의 흥기와 멸망-로마의 성립과정은 전쟁에 따른 극도의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불안과 공포는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로마가 제국화되는 과정에서 지중해 주변국을 침략한데서 기인한 것이지 외부의 침략 때문에 공포가 조성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인과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로마의 철학사상을 논한다고 할 때에 있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오다가 '로마에 의한 온전한 평화true pax Romana'가 이룩되기까지는 수백 년간에 걸친 전쟁이 일상의 삶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세 차례(기원전 264~241, 218~202, 148~146)에 걸친 포에니 전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 벌인 전쟁-이것이 후일 로마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상상력을 넣었습니다-은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백년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의 기억>, 한길사
. 과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게르만족의 침입이 이어졌고, 끝내 그들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했으며, 동방의 페르시아 이슬람 세력 또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자,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은 로마에 의한 온전한 평화라는 게 사실은 무력과 힘에 의한 일시적인 평화였다는 점입니다.

자, 이것도 행운인가요? 나는 최근 우연히 ‘로마제국의 멸망’을 다룬 동명의 고전영화를 보게 되먼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로마 말기, 로마제국의 속령 대표단 일행들을 국경지역에서 사열하먼서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왕, 총독, 왕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집트의 사막에서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에서 골의 산림, 스페인의 평원에서 이곳까지 오셨소. 모두들 생긴 모습과 입는 옷도 다르고 부르는 노래와 숭배하는 신도 다르지만 튼튼한 뿌리를 가진 거목처럼 여러분은 모두 로마로 한데 묶여 있소. 여러분 주변과 자신을 살펴보면 로마의 위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우리의 공동의 적은 북방의 야만족과 동방의 페르시아요. 나는 모든 민족의 동화를 원하오. 평화의 황금시대가 우리 앞에 왔소. 그것은 바로 참다운 로마의 평화true pax Romana요. 그 평화는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것으로 모든 로마의 시민에게 부여된 숭고한 권리요.”

그러먼서 고전적인 명장면의 하나로 중요한 대목을 넣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황제는 기어코 마음에 있는 속내를 꺼내놓았습니다.

“평등한 민족의 일원,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상이오.”

여기서 나는 비로소 로마의 철학을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a clue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 여기에 무슨 로마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 꽂혀 있다는 것인지, 대체 우리가 알고 싶고, 또 알아야 할 로마 철학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전쟁과 철학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겉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속내로는 모다 로마와 ‘하나’가 될 수 없는 불만, 그러니까 민족 저마다의 ‘다름’을 지니고 있었음을 황제의 발언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一’와 ‘다름多’을 철학적으로 일컫는 말이 바로 ‘동일성’과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당시는 언제든 민족적 다름을 지닌 나라로 제각기 떨어져 나갈 시대적 정서가 하나의 공기가 되어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하나-동일성’과 ‘각 민족국가-다름-차이’는 로마제국시대 서로 다른 배타적인 무늬를 형성하는 삶의 줄기이자 패턴입니다. 

바로 여기, 전자를 대변하는 동일성의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실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왕사로서 그의 사상이 당대를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후자를 대변하는 차이의 철학자가 플라톤으로 알렉산더 제국이 무너지고 난 후에는 신플라톤주의가 또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저 동양의 중국에 있어 한漢제국이 다스리던 시대에 하나의 국가의 교학으로서 유교가 그 지배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담당하였다먼, 제국의 분열 시기에는 늘 하나의 저항이념으로 도교가 민중의 마음을 얻었던 것과 매우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비적으로 볼 때, 유교의 비조 공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가깝고, 도교의 시조 노자는 플라톤에 가까운 것입니다. 

자, 세상일이란 게 분열한 지 오래먼 반드시 합해지고, 합한지 오래먼 반드시 분열한다는 사실과 이에 바탕한 추론은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조금만 염두에 두고 책장을 넘기다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학문으로, 객관적인 지식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학적으로 엄정한 분석과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명쾌한lucid 증명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니, 나는 또한 이에 대한 세밀하고도 두터운 근거가 요구되는 역사의 검증대에서 나의 의견을 '정당화justification, a good and acceptable reason for doing something'시켜야 합니다. 

어쨋거나 나는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인식과 문제를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들뢰즈/가타리 공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한국판, 현대미학사)를 보다가 어느 한 대목에 이르러 나는 어떤 놀라움 앞에서 멈추어 섰던 것입니다. 그것은 뭐 이런 것입니다.

“영국 철학의 아주 특이한 그리스적 성격, 그 경험론적 신플라톤주의the very special Greekness of English philosophy, its empirical neo-Platonism”

이 부분은 매우 조심스러운 진술이라고 볼 수 있을 덴데, 이 글을 쓴 철학자들이 프랑스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의식을 지닌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이웃나라의 철학에 대해 잘못 말했다간 개망신일 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매우 믿을 만한 진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 보건대, 영국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끄나풀이라는 것입니다. 머 그놈들은 개인주의를 물려받았다는 뜻이라 이겁니다.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오늘 미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앵글로-색슨계의 신교도 백인 집단-미국의 주류사회를 일컬어 ‘와스프WASP’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두문자에서 온 것입니다-의 망탈리테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영미의 철학을 한마디로 플라톤 철학의 아류로, 개인주의로, 그 경험주의에 따른 유명론적 실증주의의 국가로, 머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인정머리 없는 이성철학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로 연상되고 있는 신플라톤주의가 왜 로마제국의 사상이 될 정도로 시대를 풍미했는가 라는 점입니다. 철학사는 그리스의 멸망, 알렉산더 제국의 등장과 멸망, 로마의 발흥과정에 등장했던 철학으로 스토아Stoa철학과 에피쿠로스의 신플라톤철학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의 관용구로 ‘스토아적 평정Stoic composure’과 '아파테이아apatheia'를 즐겨 사용하기도 하고, '아타락시아apatheia'란 어구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먼 이들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 스토아적 평정과 아파테이아, 아타락시아의 공통점은 정신적인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머 ‘스토아Stoa’는 사원의 ‘채색된 회랑’을 뜻하는 것으로 어지러운 현실을 떠나 한가한 곳에서 거닐던 당시의 부르주아 철학자 무리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들의 신조를 잘 나타내고 있는 ‘아파테이아apatheia’는 ‘격정pathos’을 ‘부정하는a’ 말입니다. ‘아타락시아ataraxia’ 또한 무감동, 냉정, 평정을 뜻하는 것으로 부정을 나타내는 ‘a’와 ‘휘젓다’, ‘문제를 일으키다’, ‘동요시키다’를 뜻하는 ‘tarasso’, 여기에다 접미사 ‘ia’가 붙어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당대를 지배하던 스토아철학,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그 어떠한 외적 상황에도 변치 않는 내 마음의 평정심을 대변하는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개인주의적 도피성향이 강한 내면의 철학은 세상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머 스토아 철학, 신플라톤철학은 일종의 회의론skepticism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전쟁이 일상화된 위험한 세상에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나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하나의 보신, 처세사상으로 나의 내면의 평정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상이 당대의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즉 정치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실존의 불확실성,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철학 사조로서의 반정치적 싹이 깃들었던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명성에 대한 플라톤의 문제 제기를 극단으로 몰고 가서 공동생활에서 권세, 칭찬, 명성을 얻으려는 모든 행위를 비난한다. 그들은 선언하기를 도덕적 명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올바름은 주위 사람의 판단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이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다면 명예를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그대로 ‘명예를 누릴 만하다’. 그러나 이 명예는 외부의 다른 사람들에게 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하게 나 자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클라우스 헬트, <지중해 철학기행>, 효형출판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플라톤 철학이 그리스철학으로 단명한 것이 아니고 로마로, 중세로, 이태리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이어지먼서 오늘에도 하나의 이념이자 신념으로-미국의 실용주의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의 문화적 유전자a gene of culture로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 플라톤이 남긴 문화적 유전자는 하나의 이성철학이자 개별철학이고,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균열로서의 차이의 철학이고 이런 인식을 나타내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apatheia’에 이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정상태를 말하는데, 그 전제는 무론 파토스pathos라는 시의, 격정의, 마음의 흥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의 효용 가치를 적극 옹호함으로써 귀족들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철학자이자 고대문예이론의 창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다시말해 ‘공포심’과 ‘동정심’을 통해(<시학>) 민중들을 모방의 노예로, 국가를 위한 희생자로 만드는데 기여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국가>)은 의심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니, 왜냐하먼 그가 추구하는 국가는 이성적인 철학자가 지배하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성logos을 본으로 하는 국가에서 감성pathos을 주로 하는 시의 세계는 어울릴 수 없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시인추방론’으로 시인은 대중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여 정신을 어지럽히는데 일조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플라톤이 모방을 혐오하고 기하학을 선호한 이유가, 시인보다 철학자를, 생성보다 존재를, 시보다 소설을, 전쟁서사인 <일리아스>-아리스트텔레스의 충실한 왕자 알렉산더는 전쟁 중에도 석관에 <일리아스>를 넣고 다닌 것으로 유명합니다-보다 계몽서사인 <오디쎄이아>를 좋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 그리스 상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돌아다니며 무지를 깨치는 오디쎄우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펼쳐지고 있는데, 대체로 인간은 서사적 경험을 통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나는 최근 에드가 엘런 포, 허먼 멜빌과 함께 가장 위대한 19세기 미국 작가라는 공식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헨리 제임스의 대표작 <아메리칸>을 매우 흥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미국인의 오디세이’라는 리뷰(민음사)를 달고 있는데, 이것 또한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것은 머 ‘오디세이’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서양문학사를 들추다 보먼 자주 언급되는 터여서 <아메리칸The American>을 읽어보고야 말았지만, 나는 여기서 무슨 서양문체사의 비밀을 푸는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읽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는 과연 어느 순간에 미쳐서는 서구의 세계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두 기둥으로 하는, 시와 소설이라는 두 형식의 길항stand against의 역사로 볼 수 있것다는 과학적 확신을 더욱 견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머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내 나름으로 서양철학과 문예이론에 대한 적지 않은 독서의 결과였습니다. 그것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통하고, 저 푸코의 '에피스테메'와 어울리며, 철학의 갓돌 들뢰즈의 저 '차이와 반복'과도 닿는 참으로 유용한 개념의 도구막대가 아니것는가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작품을 읽으먼서 무릎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무릇 소설은, 저 호메로스의 <오디쎄이아>에서 비롯된 장사꾼의 언어임에 틀림없다는 것 말입니다. 왜냐하먼 이야기는 쿤데라의 말대로 앎을, 지식을 그 모럴로 하는 것인데, 이 지식은 바로 경험의 위대한 일반화가 아닌가 말입니다. 근대의 소설을 일컬어 부르주아의 승리의 서사라 하는데, 이게 사실 쉽게 말하먼 저 지중해의 노략질, 해적질에 가까운 그리스 상단을 운영했던 해적 선장 오디쎄우스 이야기(<오디쎄이아>)에서 영국의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경험을 풀어놓은 <로빈슨 크루소> 이르기까지 장똘뱅이들의 삶에 속임수를 섞어 넣은 찌개백반 같이 맛있고 천일야화처럼 재미진 이야기의 세계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래서 오디쎄우스 이야기는 하나의 동화(발터 벤야민)로서 ‘신기한novel’ 요소가 있기도 하고, ‘믿기 힘든 면fiction’이 있는가 하먼, 나 또한 겪어보고 싶은 아름다운 ‘꿈과 낭만roman’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웅적인 에토스를 지닌 서사시와는 달리 본래 그 '소설'이 가리키는 바 그대로 찌질한 삶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야기라는 서사적 형식을 통해 우리는 시상사를 좀 알 수 있게 되었거니와, 이 시상사라는 게 잘 보먼 짐작하는 일이지만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삼국지> 서두의 유명한 ‘천하대세天下大勢,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란 구절과도 통하는 것이니, 즉 천하의 대세는 분열한지 오래면 반드시 합해지고, 합한지 오래면 반드시 분열한다는 것은 서양의 역사와 철학, 양식도 예외는 아닐 것인즉 여기, 분과 합을 상징하는 철학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요, 시와 소설이 또한 그렇다고 보는 게 이 이야기의 기본 전제입니다.

자, 그렇다먼 <아메리칸>은 또 어떤지 여기, 어둠 속에서 금덩이처럼 반짝이는 진실을 마주해 보것습니다.

"우리의 견해는...솔직히 고백하건대, 우리가 반대하는 건 당신의 성격이 아니라 내력이죠. 실제 우리는 장사치와 어울릴 수 없답니다" 노 벨가드 부인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그녀를 포기하지 않겠소" 뉴만이 말했다
"마음대로 하구료! 하지만 그 애가 당신을 만나기조차 거부하면-아마도 그럴 테지만-당신 지조는 그야말로 플라토닉하게 되겠지요"(밑줄-글쓴이)

자, 여기 소설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는 상징적 대목을 정리해 보먼 우리는 놀라운 진실이 은칼, 금칼처럼 박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화를 통해 ‘귀족’과 ‘부르주아’ 간에는 뿌리 깊은 애증관계가 박혀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이것을 계보학적으로 정리해 보먼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특히, 프랑스의 귀족인 노 벨가드 부인의 ‘장사치’, '플라토닉'이라는 언급에서 오랜 내력을 지닌 귀족의 옹호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후예의 플라톤주의 후예에 대한 싸늘하고 오만한, 그 적의에 찬 눈길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린다고 결혼을 앞에 두고 뜻밖에도 주인공 뉴먼은 문화적 차이에서 모멸을 느끼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성당과 교회의 종소리가 서로 다른 것처럼 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문화는 이처럼 서로 다른 분위기와 이질적인 결, 고유의 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귀족이냐 부르주아냐

가문의 내력이냐 개인의 성격이냐
명예냐 실제냐
시냐 소설이냐
신이냐 인간이냐
로마가톨릭이냐 개신교냐
아리스토텔레스냐 플라톤이냐
리세냐 아카데미냐
(*참고로 프랑스의 고등학교를 ‘리세’라 하고, 미국의 고등학교를 ‘아카데미’라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과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빌은 개념입니다)
프랑스냐 미국이냐

......

<아메리칸>은 실용주의의 나라 미국인이 겪은 허세주의의 나라 프랑스인에 대한 이야기를 밑감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역시 소설은 앎을 제공합니다. 머 프랑스의 허세는 수탉으로도 상징되거니와 화려한 말발 글발 밤거리 건축 예술 등 머 을마든지 있습니다. 여기에 딱 어울리는 그림 같은 귀족가문의 여인 싱트레 부인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가 잘 아는 마담 보바리  같이도 아름다운 귀족 가문의 여인을 돈 많은 미국의 사업가 뉴먼이 낚으려다 보기 좋게 쓴잔을 마신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전형적인 티피컬한 사례로 미국과 프랑스의 이와 같은 이야기가 오늘 ‘미국적 가치American Value’와 ‘프랑스적 가치French Value’로 상징되고 있거니와, 그리스 이래 오랜 내력을 지닌 서구적 문화에 바탕하고 있다는 데에 이 소설의 깊이와 말로 다할 수 없는 매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체 백만장자 미국인 사업가 뉴먼은 귀족가문이 무엇을 그 기본 모럴로 하는지 모르고 덤벼들었다가 물코를 흘렸으니, 귀족들은 명예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존심을 지닌 로만 가톨릭의 후예들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니 백만장자가 돈을 앞세워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덤벼들었으니, 머 그들의 닭벼슬처럼 높은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 참 훌륭한 반면교과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머 그것은 관우와 조조에게도 해당되는 보편성을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고귀한 아킬레우스적 세계-이것은 소설에서 ‘결투’로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와 더불어 '실제'를 중시하는 영리한 오디쎄우스적 세계가 공존, 갈등하고 있다는 것이 그 첫째요, 이것은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냐 플라톤이냐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 둘째요, 양식적으로 볼 때 시냐 소설이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또한 그렇지 않것는가 말입니다. 왜냐하먼 귀족은 노래를 원하지만 부르주아는 자신의 성공서사를 끝없는 이야기를 통해 과시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말입니다.

여러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로마의 철학이 플라톤에게,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스토아사상, 신플라톤주의에 월계관을 씌워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전쟁서사가 일상화 된 현실에서 수많은 민중들은 고통과 불안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정(심)을 요구하는 사상이 하나의 시대적 사조가 되었던 것이니, 이런 사상의 물결이 다시 흐르고 흘러 중세에 들어서서는 하나의 보편사상이 되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철학으로서의 기독교사상이 당대의 철학이 되었던 것이니, 대체 종교는 러셀의 말대로 그 불안과 공포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먼 또한 중세의 불안과 공포는 어데서 비롯되었던 것일까요? 아니,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대변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플라톤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 사상적 수원水源을 발견했던 것일까요?

계속됩니다...


1)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의 기억>,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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