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교 강사:장강명

소설가. 20세기부터 SF를 썼다. 한겨레문학상,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문학동네작가상, 오늘의작가상,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심훈문학대상, SF어워드 우수상 등을 받았다.

이것은 파트와가 아닙니다

이 답장을 마지막으로 선생님과의 논쟁을 마치려 합니다.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라서, 저희가 어떤 합의에 이를 것 같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두 가지 질문》을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시급히 매듭지어야 할 현실 세계의 당면 과제로 인식하는 데 반해, 선생님께서는 일종의 철학적 사고실험으로서, 가치의 대결로서 대하시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트롤리 딜레마’가 윤리학 교과서의 예제일 때와, 그런 사건이 실제로 벌어져서 제가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평결을 내려야 할 때 저의 행동과 판단은 달라집니다.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제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치 논쟁은 그만하면 충분히 했다고 여기며, 우리가 이제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난 번 선생님의 메일이 몇몇 지점에서 핵심을 찔렀다고 인정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두 가지 질문》의 감독이 2류, 혹은 3류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는 사실과, 그의 창작의 권리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의 길〉이 몇몇 논객으로부터 사이비 종교라는 비판을 받는 것과, 그들의 존엄은 본질적으로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범죄자에게도 인권은 있습니다. 3류 예술가도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신흥 테크노종교 교인에게도 명예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영성의 길〉은 제 눈에도 미심쩍어 보이는 단체입니다. 저는 그들의 우주관이나 교리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자아를 조금씩 포기하면서 이를 수 있는 영성이라는 것의 존재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게 기술로 가능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자기 ‘펠로우’들을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착취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 고소 고발도 다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지요. 듣자하니 회계도 깔끔하다고 합니다. 사실 이들은 지역 사회에서 얌전하고 선량한 이웃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각종 봉사나 기부 활동이 좀 작위적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저한테는 이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창조론을 신봉하는 과학자 단체 같은 느낌입니다. 주장하는 내용은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봅니다.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단계에서, 그들을 강제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공감 능력을 확대하는 뇌수술을 받는 걸 어느 정도까지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이 수술이 양악 수술이나 유방확대 수술보다 더 위험해 보이진 않네요. 신경 신호를 조금 강화하는 작은 칩을 삽입하는 것이고, 언제든 그 칩을 제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시술 시간은 5분도 안 됩니다.

어쨌든 〈영성의 길〉 펠로우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의사들을 확보하고 있고, 그들로부터 공감 능력 부족이라는 진단서를 받아 합법적으로 수술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건 〈영성의 길〉과 관계없이, 자폐 성향부터 트라우마 치료에까지 널리 쓰이는 요법 아닙니까. 반사회성 성격장애 판정을 받은 범죄자에게는 강제로 시술하기도 하잖습니까.

공감 능력이 확장된 〈영성의 길〉 펠로우들은 공론장에서 꽤나 유난스럽고 성가신 존재들이지요. 걸핏하면 약자를, 동물들을, 지구를 생각하라고 말하지요. 그래도 그들은 대체로 오프라인에서 무척 상냥하며, 무해한 시민입니다. 종종 사기의 희생자가 되기도 합니다. 다행히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터랙티브 영화 《두 가지 질문》에 기이하고 불편한 구석이 있는 것을 선생님도 부정하진 않으실 겁니다. 강아지를 걷어차는데 그 불쌍한 어린 동물이 그걸 오히려 즐기는 듯한, 그 유명한 장면이 대표적이죠. 몇몇 대목들은 뭔가 우리의 본능적인 공감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보는 이의 감정을 몰고 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은데, 보고 있으면 제가 외계인이 된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듭니다. 한편 장면과 장면들 사이에는 적당한 리듬감과 예측불가능성이 있어서, 확실히 흡인력은 있습니다. 과거에 유행했던 뮤직비디오라는 장르가 떠오릅니다.

어떤 이들은 《두 가지 질문》이 〈영성의 길〉 펠로우들을 정교하게 노린 일종의 뇌 해킹 영상이라는 음모론을 펼칩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보지는 않습니다. 감독이 그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나 의도를 지닌 인물 같지 않습니다.

그냥, 그는 어쩌다 이슈를 만들어버린 변방의 예술가에 불과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 큰 성공이라, 거기에 도취되어 이후의 미디어 서커스에 아무 주저함 없이 자기 몸을 던져버렸지요. 저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그 쌍방향 영화를 찍었습니다진정한 예술이란 웃음과 감동을 파는 일과는 무관합니다저는 이방인이고 천재입니다…….

이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바로 이것이 표현의 자유입니다. 이런 수준의 생산물을 만들어낼 권리까지도 옹호하는 것. 저도 선생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한데 이 영상이 〈영성의 길〉 펠로우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두 가지 질문》 몇몇 장면이 〈영성의 길〉 펠로우들에게 어지럼증과 구토감, 때로 실신을 유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저히 연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성의 길〉 펠로우들은 이 인터랙티브 영화가 단순한 현기증 이상의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아주 심각하게 모욕당하는 느낌, 자아존중감이 극도로 훼손되는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대변인이 오프더레코드로 “강간당한 것 같다”라는 표현을 썼다가 논란을 빚기도 했지요.

이것은 사실일까요, 아니면 일부에서 의심하듯 그저 엄살일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관적 체험을 그저 유추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 빨간색이라는 주관적 체험을 이해하기는 어렵지요. 공감 확장술이라는 기술이 의도치 않게 〈영성의 길〉 펠로우들을 어떤 틈 속으로, 우리의 앎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보내버린 듯합니다.

이것은 〈영성의 길〉 펠로우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일까요? 너희가 원해서 받은 수술의 부작용이니 너희 잘못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실수로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된 사람에게는 휠체어용 경사로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고통과 불편 아닙니까? 그 발단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요.

《두 가지 질문》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한 펠로우들의 저항은 제가 보기에 정당합니다. 그들은 그 영상을 직접 보지 않아도, 그에 대해 떠올리기만 해도 자신들의 존엄이 훼손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나요? 나치 휘장이 액세서리 소품으로 판매되거나 가구 장식 문양으로 쓰인다면 유태인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사실 위의 비유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영성의 길〉 펠로우들은 문제의 인터랙티브 영화를 완전하게 금지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조차 아니니까요. 제대로 비유하자면, 그들은 가게에서 하켄크로이츠 액세서리를 파는 것까지도 괜찮다고 합니다. 다만 그 저주 받을 무늬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달라는 겁니다. 《두 가지 질문》 감독과 제작자가 콘텐츠 자동 수정 기능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펠로우들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이 작품을 피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펠로우들이 그런 비판에 격분하는 데에는 물론 대의명분의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질문》 영상들을 조각내고 알아볼 수 없는 제목으로 바꾸어 전송하거나 밈으로 유행시키는 식으로 펠로우를 공격하는 저열한 무리들 역시 현실적인 위협입니다.

소수자를 배려하는 콘텐츠 자동 수정 기능이 발명된 지도 거의 한 세대가 되어 갑니다(초기 모델까지 따지면요). 저는 《두 가지 질문》의 감독이 순전히 논란을 일으키기 위해 그 기능을 거부하고 있다고 봅니다. 〈영성의 길〉을 과거의 이슬람처럼 묘사하면서 자신을 우리 시대의 살만 루슈디로 자리 매기려는 의도가 훤히 보입니다.

그러나 펠로우들의 시위는, 간혹 도를 벗어난 온라인 테러까지 포함한다 해도, 절대 호메이니가 내렸던 파트와는 아닙니다. 그 작품의 제작자와 연출자를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도 없고, 죽이겠다고 맹세한 사람도 없습니다.

감독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호소하지요. 이 역시 그의 주관적 체험이라 저희는 그의 진술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그 고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 협박을 구체적으로 받는 만큼은 아니겠지요. 그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할 이유가 충분하고요. 썩 훌륭한 연기자는 아닌 듯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한다고 여깁니다. 소수 종교에 대한 존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저는 이 사안을 그 두 가치의 충돌로 보이게끔 만드는 것이 감독과 제작자, 마케터의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세 가지 가치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소수 종교에 대한 존중, 표현의 자유, 그리고 예술 작품의 완결성입니다. 여기서 완결성이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것을 표현의 자유와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이 가치를 희생시켜서 다른 두 가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이미 지난 세기부터 많은 플랫폼들이, 특히 영상 예술 분야에서, 창작자의 작품을 적절히 고쳐서 감상자에게 전달했습니다. 지나치게 외설스럽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삭제했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흐리게 처리했습니다. 극장과 방송사들은 자국의 문화적 특성을 감안해서 자신들이 사들인 콘텐츠의 특정 묘사를 순화하거나 강조했으며, 항공사들은 기내 상영용 버전을 따로 제작했습니다.

이런 수정 및 편집 작업과 인터랙티브 영화 제작 툴의 콘텐츠 자동 수정 기능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두 가지 질문》의 감독은 전자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또한 창작자의 동의 없이 가해지는 가위질이자 검열을 넘어선 작품 훼손 행위인데도요.

앞의 글에서 선생님이 드신 예를 그대로 저도 이용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과 달리, 『톰 소여의 모험』에서 톰 소여의 흡연 장면이 빠져도 작품의 가치가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한 사람들이 ‘깜둥이’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바꾼 버전으로 그 책을 읽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롤리타가 18세인 버전의 『롤리타』, 혹은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에 대해 성욕을 느끼지만 육체관계를 맺지 않는 버전의 『롤리타』는 어떨까요. 『롤리타』를 소아성애의 실현에 대한 작품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런 자동 수정은 묵과할 수 없는 변질이겠지요. 하지만 『롤리타』를 부르주아의 위선 혹은 사랑의 불쾌한 측면, 아니면 문장에 대한 작품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많은 『롤리타』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선생님, 사실 저는 우리 시대에 예술의 완결성이란 폐기되어야 할 개념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소수 신념을 가졌다 해서 예술가라는 불한당으로부터 불시에 기습적인 감정 폭력을 당하는 일이 사라지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동시에 예술가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무제한적으로 캔버스나 영상 제작 툴에 펼칠 수 있고요.

작품이, 혹은 글이 원작자의 소유물이라는 생각 역시 낡았습니다. 저는 이 마지막 반론을 자동 수정 기능 필터를 통해 선생님께 보내려 합니다. 선생님이 읽으실 글과 다른 독자들이 읽을 글은 문체가 다를 것이고, 어쩌면 내용이나 주제도 조금 그러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자동 수정 기능의 오류 때문에 이 글이 앞뒤가 다소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성한 문서는 곧 지울 예정입니다. 보시고 계신 글의 원본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의 논쟁 역시 지켜보는 이들에게 여러 결로 다가가 다양하게 해석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대화는 그리하여 더 풍성해지고 더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