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혼자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관계의, 상호작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시대의 아들1)이라고 했거니와, 현존재인 나는 세계 속의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또한 같은 말이 아닌가.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예술도 마찬가지고, 김수영의 시적 성취와 사유의 열매 또한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다.

김수영의 시작 초기 이력을 자세히 보니, ‘묘정의 노래’(‘45)에 이어 ‘공자의 생활난’(‘45), ‘가까이할 수 없는 서적’(‘47), ‘아메리카 타임지’(‘47), ‘이’(‘47), ‘웃음’(‘48), ‘아버지의 사진’(‘49), ‘아침의 유혹’(‘49), ‘음악’(‘50), ‘토끼’(‘50) 등을 일 년에 한두 편 이어오던 과작의 시인이 1950년 이후 3년의 공백을 깨고 무슨 노다지처럼 ‘번쩍!’ 하고 들고 나온 것은 예의 ‘달나라의 장난’이었다. 어찌해서 시인은 3년여 동안 한 편의 시도 낳지 모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시인이 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암시한다. 대체 물때가 맞아야 고기도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김수영 사유의 오롯한 싹이 트고 영롱한 꽃이 피고, 단단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는 '달나라의 장난'(1953)부터다. 왜 하필 1953년인가. 대체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금편이 출현하기 위한 시대적 조건은 무엇이었나. 아니, 금편을 낳은 시대적 토양은?. 앞장에서 본 바대로 그것은 '공자의 생활난'(1949)이 해방 후 혼란한 시대현실에 대한 시적 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꼭 그처럼 ‘달나라의 장난’ 또한 6.25라는 한국의 참혹했던 '사회정치적 환경socio-political milieu'에 대한 명증한 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 이것은 ‘달나라의 장난’을 낳은 사회정치적 환경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엄격한 검증을 요구하거니와, '공자의 생활난'에서 보여준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이어 태풍이 지나가면 바닷물이 더욱 푸르듯이, 시인이 거친 파도와도 같은 죽음의 사선을 몇 고비 넘기고 드디어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고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6.25라는 혹독한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결과였다. 

머 타고 남은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니...

이와 마찬가지로 김수영이 몇 차례의 사선을 넘어 피워낸 사유가 금꽃처럼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것는가. 그러니 김수영의 시적 개화와 사상적 성취 역시 내, 외적 영향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그는 지적인 관심이 남달랐던 당대의 문화인이 아니었나. 이에 나는 먼지가 소리없이 내려앉듯이 김수영 시에 조용히 내려앉은 사유의 내적, 외적 기원을 그 영향사적 관점에서 좀 밀도있게 밝혀보려고 한다. 
2-1, 김수영 사유의 내적 기원

우선, 앞으로 밀도있게densely 논의하게 될 원작부터 보자.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전문

이 시를 어티케 해설해야 하나. 천학비재한 나는 참 난감한 글쓰기 상황에 놓여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뭐 간단한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달나라의 장난’은 분명 현재 자신의 심경을 솔직 토크하고 있는 자유로운 산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시이지만, 무슨 금덩이처럼 형식 이상의 중요한‘그 무엇’이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대체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토포스, 시적 주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주조음으로 화자는 분명 서러운 감정에 휩싸여 있음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지배적 정서로‘서럽다’는 것은 원통하고 슬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시어의 지층 속에서 하나의 광석처럼 빛나는 언어가 우리를 주목케 하는 것은 서러운 감정에 사로잡힌‘정의적 모습’의 화자이기보다는 자연적 외물에 대한‘추상적 사유’의 진수를 접하게 되는 흔치 않은 학이學而의 즐거움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김수영의‘달나라의 장난’은 추상적 사유의 진수를 드러낸 작품...

먼저, 화자는 왜 서러운 감정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자. 그것은 무슨 보풀이 일듯이 아이가 팽이를 돌리는 것을‘물끄러미’보게 되먼서 감정이 자연스럽게 이입되어 일어난 결과다. 그리하여 여기, 팽이는 하나의 시적 오브제이자 정치적 무의식을 지닌 알레고리로 기능하고 있는데, 이것이 화자에게 서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우선 그놈이 신기하고‘낯선’물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추운 겨울 얼음판에서 나무로 깎아 만든 팽이를 나무에 헝겊을 맨 채로 있는 힘껏 후려치먼서 돌리곤 했지만, 당시에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서 돌게 하는 전혀‘새로운novel’팽이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이건 참 신비하고 이상한 물건이 아닌가. 그래‘이놈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소설'이 연상되고,‘별세계’가 튀어나오고, '달나라의 장난' 같다는 상상의 끈이 이어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시적 지평으로 달나라의 장난처럼 신기한 것은 팽이만이 아니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나의 일이며/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가 또한 신기한 일이 아닌가. 그런 어느 순간 나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삶과는 다른 그들의,“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바쁘지도 않은” 나와는 다른 그들,‘뚱뚱한 주인’의 낯선 삶이 겹치게 되고 대치되먼서 화자는 이내 뭔지 모를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결핍감과 따돌림을 받는 것 같은 소외감에 젖게 되고, 뭐 원통하고 슬픈 서러운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감정의 불길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그러니까 시적 지평은 동심원을 그리며 대상사물에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 자신의 삶과는 다르게 낯설게 돌아가는 사회정치적 영역으로 점차 증폭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감동을 느끼게 되며, 그 이상한 감동의 끝에서 정의적 감정에 사로잡힌 화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사유의 뼈대를 단단히 물고 있는 성숙한 화자를 본다.

여기, 화자가 잠시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자연계의 외적 세계에 감정이 휩싸이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숭고sublimity2)-‘숭고’는 거대한(‘성인’) 공포(‘비웃는’)에서 오는 신비한 관념의 일종인데, 이것은 또한 그 불분명함(‘까맣게’, ‘회색빛’)에서 말미암는다-라는 미적 감정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지만, 분명 피동적인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팽이는 주인공이지만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니 나와 세계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관계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니 팽이는 나를 울리고 비웃는 낯선 외물처럼 보인다. 이렇게 외물에 감정을 빼앗기고 마는 것은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 되지 모하고, 그러니까 ‘스스로 도는’ 팽이처럼 자립하지 모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안타까운 처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치 무엇엔가 무거운 망치로 뚜드려 맞은 듯이 화자는 서러운 감정에, 비탄에만 빠져서는 안 되는 자신이 놓인 현실을 자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사명을 냉철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과연,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 그 추상적 사유로서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그 어떤 사명을 완수해야 할 자신을 자각한 화자가 깨달은 시적 직관이 만만치 않다는 데에 '유명론nominalism의 승리’로서의 한국시의 일대 쾌거라는 평가에 손색이 없는 번쩍이는 시의 금편을 마주하게 된다. 유명론의 승리라니! ‘달나라의 장난’에 유명론이 어디에 있고, 더욱이 승리라니! 대체 ‘유명론’이라 하먼 중세철학에서, 아니 저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볼 수 있듯이, 장미가 더 이상 장미가 아니었던 것처럼, 개체만이 실재하고 보편은 개체에서 추상하여 얻은 명목에, 이름에,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으로, 언어 비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근대 인식론의 하나로,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유명론은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는)유물론의 최초의 표현3)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여기,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에서‘생각하면 서러운 것’은 화자의 내면에 졸졸졸 흐르고 있는 원통하고 슬픈 감정의 물결이 아닌가. 앞에서 보았다시피 그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외로 된 삶을 게우 유지해 가고 있는 못난 자신에 대한 박탈된 감정으로서의 그 무엇을 대변하는 정서임에 틀림없는데, 그러나 팽이로 촉발된 서러운 감정은 주변으로 떠도는 자신과는 다른 ‘별세계’를 살아가고 있는‘뚱뚱한 주인’과, 비대한 권력과 관련되어 있음을, 당시의 이승만 독재 권력과 긴밀하게 연계된 사회정치적 상상력의 시적 암시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내밀한 정서를 넘어‘사회정치적 무의식socio-political unconsciousness’이라는 위험한 뇌관을 건드리고 있는 표현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하나의 이념 지향을 드러낸 이데올로기 시로서‘달나라의 장난’이 보여준 시적 인식이 결코 장난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자, 그렇다먼 대체 ‘달나라의 장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뭐란 말인가.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시어가 단순한 비유와 상징을 넘어 하나의 사회정치적 메시지로 기능할 수 있는 전거를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과연 우리는(‘너도 나도’) 주체적인(‘스스로 도는’) 인간이 되어야지 노예적인 삶에 휘둘려서는(‘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나라와 역사를 움직여 가는 힘이 정부에 있지 않고 민중에게 있다는 자각이 강해져 가고 있고 이러한 감정이 의외로 급속도로 발전해 가고 있다”(‘아직도 안심하기 빠르다-4.19 1주년’, 민국일보, 1961. 4. 16)는 대사회 메시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의식은 이미 이데올로기적 '금기taboo'-시는 오직 모방만을 일삼아야지 정치를 논해서는 안 된다는 오랜 묵계로서의-를 깨고 지식인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던 문화인의 의식이 여기 계몽적 성격을 지닌 산문 형의 교술시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오롯하게 박혀있지 않은가. 그렇다니‘달나라의 장난’은 실로 그 솔직 토크로서의 진실한 정도에 있어서나 물론 ‘문학은 사회적 공기와 꿈’을 지닌 것이라는 미적 규범aesthetic norm에 있어서나 인간 존엄이라는 시적 위의를 잃지 않으먼서도, 거기 하나의 탈은폐적 기도try로서 정치적 무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낸 저항시로서 한국시의 어떠함을 보여준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내면에는 늘 ‘시인’과 ‘철학자’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렇게 김수영이‘달나라의 장난’을 통해 탈은폐적 기도의 일환으로 진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던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우리는 그의 내면에는 늘 시인과 철학자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 시인은 전통적으로 집단의 모럴을 상징하는 존재이고, 철학자는 개인주의 도덕을 나타내는 문화적 표지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시인과 철학자는 대립과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가령,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각각 그 니체적 의미에서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을 나타내는 표지로 기능하고 있는데, 왜냐하먼 시인은 다만 어린이처럼 노래mimesis하고, 철학자는 어른처럼 이야기diegesis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철학자가 이야기 하는 존재라는 점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시인은 대상을 묘사하는데, 사물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그 사물의 진상을 은폐하는데 그치는 종속적인subordinated 존재에 불과하지만, 철학자는 대상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을 넘어, 저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처럼 시시콜콜 따지고 들며, 그 대상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판관과도 같은 독립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여기,‘달나라의 장난’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화자는 단순히 팽이가 돈다는 것을  말하고, 노래하고, 모방하고자 한 게 아니다. 그는 재현의 기술자가 아니다. 화자는, 아니 화자를 앞세워 시인은 ‘은폐’와 ‘개진’의 싸움에서 분명 하나의 알레고리로 팽이를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극심한 정치적 부패 현실을 비판하려는 기도를 지니고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시인이 노래하는 종속적인 존재였다는 것은 그 플라톤적 의미에서 맹목적인 찬사를 늘어놓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하는 국가시인임을 암시하고, 철학자가 이야기 하는 자라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편에 선 자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사실은 김수영의 경우,“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의 은폐’의 반대되는 말이다”(‘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진술에서 잘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철학적 소명과 관련되어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 아니것는가. 그러니까 김수영은 시를 ‘모방’이 아니라 ‘모험’으로 전제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시적 모험’을 이루기 위해서는 숨겨진 진실을 거짓없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노래하기 위해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서, 진실을 밝히는 사도로서 탈은폐적 기도를 위해 시를 썼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 시인의 임무를 ‘은폐’와 ‘개진’의 싸움을 대전제로 놓고 본다고 할 때에 있어서, 김수영이 전통의 수사학에 비판적 거리를 지녔을 것이란 점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왜냐하먼 전통의 수사학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처럼 대상의 분식에, 대상에 대한 노예적 찬사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칭찬의 대상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그것을 훌륭하게 칭찬하는 방법은 그 대상의 본모습은 상관하지 않고 가능한 한 무조건 그 대상에 대한 거창하고 훌륭한 찬사들을 덧붙이는 것처럼 보이네 그려! 더구나 그 찬사가 거짓일 경우에도 전혀 문제로 삼지 않으니 말일세.”

-플라톤, <향연>, 문학과지성사

자, 이런 사실은 하나의 철학적 소명으로서 진실의 개진에 온통 관심을 쏟았던 유명론 철학자 김수영에게 있어서 왜 그가 전통의 수사학보다는 서사학에 큰 관심을 쏟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시여, 침을 뱉어라’)는 그의 말처럼, 대체 소설은 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통해서도 잘 볼 수 있듯이 중세 실재론의 허구를 까발리는, 근대의 리얼리즘에 기초한 유명론을 대표하는 시대적 형식이거니와, 그의 시가 왜 산문시에 가까워지고 있는지-김수영의 말대로,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그것은 과연 숨겨진 진실을 탈은폐시키려는 기도try와 다르지 않은 것이고, 이를 실천하다보니 그의 시가 왜 냉정한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산문의 형식을 띠고 있는 가운데서도 또한 성숙한 은유로서의 해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지 예측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잠시 니체, 하이데거가 현대 해석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다머를 비롯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 저 뭇별과도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운들은 모두 독일 해석학의 아들들이 아닌가. 그러나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해석만이 존재할 따름이다.”(<권력에의 의지>)라고 해석에 권위를 부여하며 기름을 붓듯이 처음으로 해석에 존재 의의를 부여한 것은 꿈쩍 않고 있던 형이상학의 성채를 무너뜨린 니체다. 그는 분명 해석학의 선구자다. 아니, 그는 익명의 대부4)다. 그러나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론적 체계를 더하고 해석학적 관심을 폭발시킨 것은 전혀 하이데거의 역할이 컸다. 그는 해석학의 공식적 대부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발현에는 본질적으로 ‘개시’와 ‘해석’이 속해 있다.”라고 했다. 그럼으로써 해석은 드디어 실존적 인간인 나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이데거를 사숙한 김수영 또한 이런 하이데거에 주목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화자가 팽이를 통해 그 추상적 사유의 막대에 해당하는 해석학적 명제로 제시한 것은 "스스로 돈다"는 표현이다. 이것은 현존재로서 시간성을 지닌 실존적 존재인 내(존재자)가 주체성과 역사성을 지닌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먼, 나는 스스로 도는 존재라는 것이다. 

-스스로; 주체성
-돈다; 역사성

현존재인 나는 어티케 존재하는가. 그것은 하이데거에 따르먼 열어보임으로써의 '개시'와 능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니까 나는 시간성을 지닌 존재로서 역사에 내던져 있는‘개시開示’된 존재다. 그러나 이렇게 개시된 존재인 내가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피투된 존재로서의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유의미한 존재로서 주체성을 지닌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해석학적 혁명a hermeneutic revolution’으로 의미의 불火이 일어나야 한다. 의미가 불인 이유는 이 불이 어떤 것을 가령, 자연식품을 가공식품으로‘가치화valuing’하기 때문인 것처럼, 개시된 존재인 내가 유의미한 존재가 되기 위한 의미형성의 조건은 바로 적극적인 '해석interpretation'행위에, 사실의 가치화에 있에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대상 플러스 알파다. 대상에 능동적으로 개입inter하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를 따지는 해석행위는 일종의 기호sign행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는 근본적으로 기호로 된 해석의 세계라 아니할 수 없다.

기호의 세계(해석의 세계)=사실(소)+가치(소)

어원적으로 볼 때,‘해석interpretation’은 본래‘중개자, 거간꾼, 브로커’등을 뜻하는 라틴어 명사‘interpres’에서 파생된 단어다. ‘interpres’는 ‘~사이에(between)’라는 뜻의 라틴어 전치사‘inter ’와 ‘물건을 팔다’라는 뜻의 원시인도유럽어‘per-’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물건을 팔 때 중간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interpretation’은 "거래를 할 때 양 당사자의 의사를 중간에서 정확히 해석해 설명하고 전달하는 작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의 주관과 입장, 이해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먼서 자연 해석에는 주관적 요소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해석의 요점은 자의적이고 판명한 설명에 있다. 이것을 해석학의 선구자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역사적 세계구성'이라 했다. 달리 말해 역사의 역사학적 개시라 할 이런 변화는 바로 현존재의 시간성으로서 내던져인 피투된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시간 속에 개시된 존재의 유의미한 해석을 통해 결단성으로서의 역사성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자, 이왕 나온 얘기이니 해석으로서의 의미의 불은 어티케 일어나는지 보자. 

"조각이 아로새겨진 보기에도 육중한 찬장, 거무스름한 떡갈나무 자재였다
아주 오래된 물건이었다 마치 선량한 노인과도 같은 모양새다
찬장 문이 열리자, 그 깊은 안쪽에서
마치 오래된 포도주를 따를 때의 사람 마음을 끄는 듯한 향이 일어났다

찬장 속은 꽉 차 있었다 잡동사니들로 가득 메워있고, 손댈 수 없을 정도의 낡은 옷가지들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고, 누런 속옷가지들,
여자들과 어린이들의 낡은 옷가지들,
그리고 퇴색해버린 레이스들,
대형 독수리의 모양이 새겨진 할머니의 어깨가 파인 드레스

-구석구석을 찾아보니 나오는 것은
그리고 장신구와 검은 머리타래, 흰 머리타래 그리고 초상화, 과실향기를 뒤섞은 듯한 향기를 피우는 그 옛날 눌러서 말린 꽃 등이 있었다
-아, 그리운 옛날이 낡은 찬장이여, 그대는 수많은 옛날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으련만...
검은 광택이 나는 육중한 문을 천천히 여닫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면서
아무래도 그대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 같구나"

-아르튀르 랭보의 '찬장Le Buffet', 피천득 번역 

사물들은 어티케 '시성詩性'을 부여받는가. 그러니까 삶은 어티케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가. 그것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사실에서 가치로, 그러니까 묘사에서 서사로, 돌덩이가 석불로, 재가 다시 기름으로, 일개 사물에 불과한 ‘찬장’이 ‘그대’로 의미 전환되고,  인격personality이 부여됨으로써 비로소 사물에 시성이 부여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하나의 해석으로 찬장은 곧 너다. 

자, 그러니 여기 무심한 성냥개비 하나가 있다고 치자. 이것은 다만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기어코 확! 하고 인력이 당기어지먼 성냥개비가 성냥불이 되는 것처럼, 이 불이야말로 과연 어둠을 몰아내는 서사의 불이, 시성이 부여된 의미의 불이 아니것는가.

여기, '찬장'도 마찬가지다. 찬장은 다만 하나의 사물로 찬장일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무엇에 의해서인지 모를 마법의 광기에 휩싸이는 때 찬장은 밀물을 만난 수초들이 누웠다가 고개를 발딱 세우듯이 평면의 사물에서 둥근 그대가 되고 직립의 주체가 된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사물에도 내력이 있고, 그녀를 알게 된 그의 생이 갑자기 빛을 발하듯이, 생의 비밀을 간직한 서사의 문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앞에서 무심히 돌고 있는 팽이에 ‘스스로’ 돈다는 서사의 불이 당겨지는 순간 해석학적 혁명이 일어났던 것처럼, 꼭 그처럼 여기 하나의 알레고리allegory로 그대라는 찬장의, 서사의 문이 열리자 드디어 너는 오래된 성처럼 비밀에 휩싸인 성채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한다. 거기, 우리들의 지난 사랑이 있었다고...이제는 오래된 포도주향이 나는 빈티지한 매력을 풍기는 고아한 풍경으로 남아 있지만, 그 잊지 모할 포도주향이 전해주는 알싸한 세계에서...너는 어깨가 파인 드레스를 입고 멋진 장신구를 하고 흰 머리 검은 머리 과일향이 나는 너는 머 전설 같은 꽃소녀가 아니었던가...너는...그러니 너는 지금도 살아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찬 푸른 생명의 잎을 매달고 있다니...그러니 네가 어찌 한갓 사물이것는가...누가 이야기를 죽었다 하는가. 너는 지금도 이렇게 나에게 속삭이고 있거니...서사는 쉽게 죽을 수 없다니...금꽃처럼 빛나는 너의 꿈과 욕망과 생의 의지를 담은 서사의 들풀은 제아무리 힘센 칼에 버히어도 버히지 않는다니...

사물에 인격이 부여될 때 DU, 너는 그대가 되고 시성이 부여된다니...아, XX! 내 맴의 시가 된 사물이여! 그대!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의 문이여! 부글거리는 욕망의 불꽃이여! 해석을 통해 사물에 인격이 부여된다니! 반대의 경우는 없을까?

“아침밥 먹는데
술독에 빠진 울아부지
벌겋게 현관문 열었다
야간조 끝난 신새벽
해장국 먹다가 취했단다
사과 봉지 건네며
딱 한 잔 마셨어 진짜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
종잇장처럼 쓰러지는 아버지
손바닥에 꽉 쥔 만원 한 장“

-강병철, '만원 한 장', <호모중딩사피엔스>, 봉구네책방

해설 (조해옥, 한남대교수, 문학평론가)을 보니,

"‘만원 한 장’의 아버지는 '야간조'를 끝내고 아침에서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다. 아버지의 손에는 만원 한 장이 쥐어져 있다. 화자에게 용돈을 주려고 손에 쥐고 있었을 만원 한 장은 어쩌면 가족을 위해 잠까지 내던진 아버지의 전부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슬프다."

라고 되어 있다. 시도, 해설도 더 없이 좋다. 무엇보다 시어가 명쾌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다. 시는 묘사이고 '극적 제시'라고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여기, 강병철의 '만원 한 장'은 일상의 단면이 하나의 실감으로, 손에 잡히는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가. 뭐 생각해 보먼 울 아버지도 저렇게 종잇장처럼 힘없이 쓰러지지 않았는가. 그놈의 돈 때문에, 아버지의 삶을 옭아 맨 그놈의 가난 때문에, 아덜에 대한, 나에 대한 붉은 사랑 때문에, 아, XX! '꽉 쥔'에 울 뻔했다.

'만원 한 장'은 이렇게 눈물 나는 일상이 빛나는 시편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줬다. 중요한 것은 과연 ‘사실의 가치화’다. 화자는 아버지는‘종잇장처럼’쓰러졌다 했다. 그렇다먼 이것은 곧 우리 아버지는 종잇장처럼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라는 뜻이, 자기비하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이 단편 서사 같은 짧은 시에서 이상한 감동을 느끼고 가슴을 저리게 되는 까닭은 거기, 아버지와 종잇장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비록 ‘아버지’가 ‘종잇장’으로 전락하고, 예의 비인격화가, 그러니까 사물화de-personalization가 되었다 할망정, 아니 오히려 그럼으로써 비인간화된 현실을 고발하고 인정의 중요성과 가족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기제로, 더욱 나와 사물간의 두텁고도 새로운 대등한 유비적 인식이, 거기 하찮은 종잇장조차 금빛으로 구워내는 하나의 해석학으로서의 시의 서사적 연금술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과연 하찮은 종잇장이다. 그렇지만 대체 아무것도 아닌 종잇장이 왜 이리 중요해진 걸까? 그것은 종잇장이라는 사물이 단순이 ‘있다’는 대상으로서의 사물로서가 아니라 종이에 불붙듯이 지금, 여기라는 나의, 현존재의 구체적 상황을 암시하고 드러내는 사물로서 매우 비근한 존재로, 그것 또한 나와 결코 다르지 않은,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닌 주요 모티프로 기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대체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이 하나의 모럴로, 이상으로, 가치로, 하나의 시적 등가물로 나라는 현재의 상황과 다르지 않은 대상으로 마주서고 있다는 것 아니것는가.

존재차원과 의미차원

자, 그렇다먼‘달나라의 장난’을 통해 서사의 연금술은, 사실의 가치화는, 존재는 어티케 의미를 얻게 되었는지 보자.

1, 팽이가 돌고 있다
2, 팽이는 스스로 도는 존재다

현존재인 나는 통상 존재자로 인식되고 있다. 나=존재자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자로서의 이데아적 존재자의 형상일 뿐‘지금’,‘여기’라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존재로서의 개별자인 나는 단순한 존재자로 존재하기도 하고, 의미 있는 존재자로 존재할 수도 있다. 즉 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 세계에 던져진‘개시’된 존재다. 여기, 1에서 ‘팽이가 돌고 있다’는 진술은‘나무가 서 있다’와 다르지 않고,‘순이가 밥을 먹고 있다’단순 서술과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을 일반화시켜보먼 '무엇이 어떠하다' 또는 '누가 어찌어찌하다'에 해당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있다’에 해당한다. 형용사와 동사의, 용언의, 비주체로서의 술어의 세계다. 그러나 이것은 사물(인간)의 존재차원에 즉자적으로 그냥 머물러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다’이지‘있다’가 아니다.

그러나 2는 1과 전혀 다르다. 2가 1과 다른 이유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1이 일차상태에 머물러 있다먼, 2는 1의 이차상태로 변환되어 있다. 이차상태를 일반화하먼 '무엇은 무엇이다'가 된다. 이차상태는 명사로, 실체로, 주어로, 중요한그 무엇something으로 바뀌었다. 술어에서 주어로, 사물에서 인간으로, 대상에서 주체로...중요한 것은 ‘이다’이지‘있다’가 아니다. 하나의 차이로서 사실의 가치화, 그것은 대상을 대자적으로 인식한 성숙한 해석이고, 의미전환이고 초점화이자 주제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제화topicalization는 세계-내-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전언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차상태로서의 현존재가 단순한 존재차원에 불과하다먼, 이차상태인 주제화는 성숙한 의미차원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여기,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제화, 초점화, 가치화는 상호변환 가능한 언어로, ‘주제화’는 하이데거(<존재와 시간>)가, ‘초점화’는 제라르 즈네뜨(<서사담론>)와 미케 발(<서사란 무엇인가>)이, ‘가치화’는 글쓴이의 지적 창조물임을 밝힌다)

중요한 것은 과연 의미차원으로서의 주제화이고, 여기 하나의 가치있는 삶으로서의 이 주제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해석의 기능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딜타이의 해석학을 넘어 '해석학적 존재론'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수영을 구원한 것이 하이데거였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거기서 저 암귀와도 같은 전쟁과 죽음을 넘어(초월하여) 하나의 근거로서 주제화를 통해 성숙한 해석에서 희망의 언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통해 자신을 의미라는 새로운 지평의 확트인 세계로 스스로를 역사화하고, 자기화personalizing해낼 수 있는 방법과 암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범주와 가치범주5)


자, 나는 김수영이라는 텍스트를 숙주로 삼아 하이데거의 '개시'와 '해석'을 한국적 철학의 한 개념으로 수정受精시켜 보려 한다. 그러니까 여기 ‘개시’는 사실범주이고, ‘해석’은 가치범주를 구성하는 기호적 표지다.

1, 사실범주; 무엇‘이’어찌하다/묘사/시의 세계
2, 가치범주; 무엇‘은’무엇이다/설명/소설의 세계
3, 정책범주; 무엇‘을’어찌해야 한다/논증/에세이의 세계

여기, 기호의 세계를 사실범주와 가치범주, 정책범주로 다르게 설정한 것은 기호가 '사실'과 '가치', 나아가 ‘정책'이라는 판연하게 서로 다른 다중적 요소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호는 다층의, 레이어layer한 상태로 존재하지 단선의, 레니어linear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는 발화자의 초점화 의지에 의해 <마담 보바리>처럼 끊임없이 시점 이동하는 가변체6)다. 가령, 밀가루로 빵을 굽는다고 했을 때에 있어서 밀가루는 사실이고, 빵은 가치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도 가능하듯이, 사실이 있어야 가치도 있다. 그러나 밀가루가 밀가루인 상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밀가루가 반드시 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밀가루는 다양한 존재 가능성을 지닌 채로 있다. 그러나 이 밀가루를 빵으로 굽는 것은 너와 나와의 공감에 따른 가치의 여부 문제에 다름 아니다. 현대의 기호학은 ‘다양성diversity’과 ‘상호성reciprocity’이라는 모럴에 기반 해 있다.

대중들의 이야기storytelling가 차고 넘치는 대중 서사, 대중 평자시대의 기본 구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이야기 또한‘사실-事-story’에 대한‘가치-敍-telling’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밀가루를 빵으로 굽듯이, 사실을 가치로, 의견으로, 평가로, 의미로 구워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에 경제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듯이, 사실범주에서 가치범주로의 의미변환, 여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먼 김수영이 가치화valuing를 통해 성숙한 해석의 힘으로 자기화시켜 낸 한국철학적 사유의 한 형태로서의‘달나라의 장난’이 던진 철학적 깊이는 만만치 않다. 가치화 단계에서의 해석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고, 김수영의 시가 산문화 경향을 띠고 소설(철학적 인식론)의 세계에 닿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사실범주; 달나라의 장난인 듯 신기한 팽이가 눈앞에서 돌고 있다.
-가치범주; 팽이는 ‘스스로 도는’ 것이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도는 게 아니다.

그리하여 여기 하나의 철학적 화두로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먼 안 될 김수영 사유의 핵심에 ‘스스로 도는’ 팽이와 함께 ‘공통된 그 무엇’이 있다. 대체‘스스로 도는’팽이는 민중의 주인됨을 암시한다고 한다먼 ‘공통된 그 무엇’은 또 무엇인가. 아니, 중요한 것은 김수영은 왜 예의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공통된 그 무엇’에 하나의 시적 상징이자 사회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추상적 사유의 깊은 철심鐵心을 박아넣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보건대,‘스스로 도는’팽이라는 능동적이고 성숙한 해석과 더불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과연 비판의 대상으로서의‘공통된 그 무엇’에 대한 관심이다. 앞에서 보았다시피,‘달나라의 장난’의 김수영 사유의 내적 기원은 6.25라는 사회문화적 환경의 산물이다. 대체 ‘6.25’와 ‘공통된 그 무엇’은 무슨 관계인가 생각해 보자.

......

6.25가 터지고 잔류파로 남아 미적미적 대던 자유의 신봉자 김수영이 의용군으로 인민군에 끌려가먼서 겪은 말 모할 고통과 깨달음은 산문‘내가 겪은 포로 생활’,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와 연대기적 성격을 띤 시‘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하여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었음을 곧 알 수 있다.

“내가 6.25 후에 개천(价川) 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 내무성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자, 이것은 한 자연인이, 연약한 시인이 겪은 실로 무시무시한 전쟁의 참상이거니와, 그는 이런 생명의 위급을 겪고 자유를 찾기까지의 여정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아미 위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고 일어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감(錯感)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밑줄-글쓴이)

자, 여기 한 자연인은, 아니 연약한 시인은 전쟁을 참상을 겪고 국가에 대한 회의의 눈길을 던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시인이기 전에 회의주의 철학자였다. 그러니까 국가를 위해,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착각이라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나의 관념론이자 정명론, 실재론으로‘공통된 그 무엇’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스스로 도는 팽이를, 민중들의 자유로운 인생을 망가뜨리고 있는,‘뚱뚱한 주인’으로 상징되고 있는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비판의 눈길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대체 이런 인식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과연 한 자연인이자 연약한 시인이 전쟁을 통해‘말할 수 없는 학대’와, ‘체포’와,‘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겪은 개인 체험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개인의 진술이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분명 시대의 진실과 통하기 때문이 아닌가. 

대체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국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던져준 근대 철학자는 세계정신의 사무총장이라는 헤겔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자, 프로이센(후에 독일)의 국민철학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쓴 대표적인 국가철학서가 바로 <법철학>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를 통해 국가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며 도덕은 정신의 생에 종속되는 하나의 형식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말해 헤겔은 프로이센 국가의 변호자란 지적7)처럼, 헤겔은 플라톤과 더불어 국가철학의 신봉자로 그의 철학이 왜 프랑스 혁명을 낳은 부르주아의 철학을 대변함과 동시에 하나의 종족주의로서 국민과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독일적 파시즘을 상징하는 국가철학이 되었는지, 왜 그의 철학이 인간성 옹호라는 본래의 숭고한 취지와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전체주의 논리의 학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은 당파적으로 볼 때, 철학 역시 하나의 태도 표명으로 ‘국가’와 ‘개인’ 간에 걸친 오랜 투쟁에서 그가 국가편을 들게 된 이유에 다름 아니다. 과연 그런가 보자. 

마르크스로부터 헤겔 철학의 진정한 탄생지요 비밀이라는 찬사를 받은 <정신현상학>은 전문가8)의 해설에 따르먼 “웅장한 사상체계와, 치밀하고 심오하며 오묘하기까지 한 헤겔 특유의 변증법적 사유논리가 실로 인간과 신과 자연을 포함한 전체의 본질 규명을 위한 궁극의 경지를 아우르는 초인간적인 고투의 결실”이라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자신이 서설에서 밝힌 바대로 “철학이란 그 본질상 특수적인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을 지반으로 하고”있는 것으로, 그 철학적 보편성을 지반으로 하고 있는 절대정신의 철학은 과연 “오직 정신적인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다”란 말에서 반복 변주되고, 이렇게 정신의 경험을 체계화한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현상만 다루는 진리의 세계로, 다시 “진리는 곧 전체이다”란 명제로 부연되거니와, 헤겔 철학은 전혀 관념철학의 성격을 지닌 것이자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민족 파시즘화를 옹호하는 위험한 씨앗을 품고 있는 사유체계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국가 중심의 전체주의 철학은 잇달아 내놓은 작품들을 통해, 특히 <법철학>에서 그 완성태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는 하나의 건축학적 구조물, 또는 현실 세계 속에 나타난 이성의 상형문자”라고 거창한 의미를 박아넣었거니와, 그 유명한 서문에서 또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며 현실을 합리화, 속물화(니체, <반시대적 고찰>)하는데 기여했다. 결국 “우리는 국가를 지상의 신처럼 숭상해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헤겔의 모습에서 우리는 국가지상주의로서의 헤겔 철학의 궁극적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의 이런 국가(민족)지상주의 철학은 전체주의 논리에 다름 아니며, 한국의 우파 지성9)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분명 정신의 나치즘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인식을 전제로 하고 볼 때, 김수영이 하나의 해석학적 혁명으로 ‘달나라의 장난’을 통해 보여준 실재론으로서의 서구 전통의 관념철학을 집대성한 헤겔적 국가철학을 연상시키는‘공통된 그 무엇’이라는 충격적인 사유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로 국가 또는 민족으로 연상되는 당시의 부도덕한 국가 질서와 가치에 대한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내고자 했던 탈은폐 기도이자 하나의 문화사적, 철학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what matters is that~

중요한 것은 과연 이런 인식과 시적 성과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라는 기원의 내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특히 <전쟁과 사회>(김동춘, 돌베개, 2020)라는 신뢰할만한 저술을 통해 한국전쟁의 마고스적 대립과 민간인 살해의 무시무시한 죄악의 실상과, 그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국가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보기 드문 걸작을 통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7일 밤 서울은 혼란 그 자체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이제 서로가 서로를 가리켜 반역자라고 아우성치는 아비규환이었다. 서울을 사수하자던 대통령과 행정부가 서둘러 서울을 떠나게 되자 이제 국가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이제는 정부고 뭐고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고 각자도생의 생지옥이 연출될 판”이었다. 전쟁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무방비 상황, 대통령의 은밀한 피란, 국민에 대한 거짓 전황보도, 그리고 국가기구의 핵심구성원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아노미 상황을 부채질하였다. 당시 교사였던 리영희가 회고하는 것처럼 학교를 사수하자던 교장이 “피란 보따리를 먼저 싸는”것을 목격한 교사들이 “강도처럼”캐비닛을 뺏어서 돈을 분배하던 모습은 바로 ‘국가’에 배신당한 ‘국민’들이 생존을 위해 가장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상황을 연출한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158쪽)

그러니까 하나의 단적인 사례로 한강다리를 건너려다가 수많은 민중들이 물에 빠져 죽은 일을 잘 알고 있는 대다수 민중들은 국가가 더 이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지 모하며, 또 책임져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된 것이다. 뭐 말 그대로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었다. 이것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실재론에 대한 미망迷妄에서 벗어나게 되는 소중한 유명론적 체험이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국가’는, 또‘민족’은 나에게 무엇이었는지...6.25는 이렇게 권력의 외부에서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모하고 겉돌기만하던 힘없고 불쌍한 민중들이 국가니 민족이니 하며 듣기 좋은 말로 주워대는 말들이 사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자신들을 어르고 달매가며 속여먹기 위한 허튼수작임을 깨닫게 하고, 대한민국은 해방된 국가이고, 민주주의 국가라는‘의사擬似 현실’이라는 가상에서 벗어나 살상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한‘실제實際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대면하게 하는 미증유의 역사 체험이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는 한 존중받을 수 있는 가치이지만, 거꾸로 인간을 노예나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을 존중하자는 주장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408쪽)

여기, 김동춘의 지적 그대로, 당시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모한 이승만 정부와 행정부는 허구 그 자체였다. 그것은 뭐 쩍! 하고 얼음이 깨어지듯이, 민중들의 머리를 깨는 망치와도 같은 뼈아픈 고통이자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국가의 그 죄악적 실체를 경험했을망정 이런 국가를 사유한 적이 없다. 일제시기, 우리는 나라를 세우기도 전에 ‘빼앗긴 들’을 걱정해야 했고, ‘가버린 님’을, ‘산산히 부서진 이름’을 그리워해야 했다. 해방 이후, 우리는 다행히 한반도에서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결정적 시기를 맞았으나,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구제하고자 할 때는 오직 우리 자신의 힘에 기대는 수밖에 없10)기 때문인데, 불행히도 남과 북이 모두 타력에 의해 급격하게 국가가 건설되고 말았으니, 뭐 하나의 건축학적 구조물로서, 현실 세계 속에 나타난 이성의 상형문자를 충분히 숙고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모하였으니, 그리하여,‘국가’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예의‘공통된 그 무엇’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사유의 대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헤겔 우파에 대한 반정립이자 하나의 대안으로‘스스로 도는’팽이로서의 시민의 권리보호를 위한 투쟁에 나서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 그리하여 그 언제 오롯하게 국가에 대해 사유해본 경험이 전무한 국민들에게 그가 제시한 한국적 사유의 시적 구현으로 김수영이 보여준 정치적 무의식으로서의 탁월한 해석학적 막대를 여기‘달나라의 장난’을 통해 본다.

이제까지 본 바대로, 김수영 사유의 그 반헤겔적 성격으로서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은 6.25라는 한국전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강박으로 김수영이‘민족주의nationalism'에 대한 심한 비판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어느 평자의 말대로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11)일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도,그리고‘민중’이라는 당파적 언어가 하나의 개인취향을 넘어 당대의 새로운 인식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자각적 계층에 대한 한국적 사유의 개념도구로, 한국철학의 민중지향적 요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여기에 그 사유의 기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통된 그 무엇’과 더불어‘스스로 도는’팽이로서의 민중적 자각과 주체의식은 또한 어디서 나온 사유의 덩어리인가? 김수영 사유의 외부를 사유하먼서 이를 다시 재구해 보자.

 

2-2, 김수영 사유의 외적 기원(예고)

 

1)헤겔, <법철학> 서문, 한길사. 2008

2)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마티, 2019

3)소비에트 과학 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세계철학사1>, 중원문화. 1990

4)장 그롱댕, <현대해석학의 지평>, 동녘, 2019

5)늘샘 김상천, <네거리의 예술가들>, 사실과가치, 2020 글쓴이는 이 책의 ‘<님의 침묵>과 불이不二의 대승정신/한용운론’을 통해 사실범주와 가치범주를 소개하먼서 일연의 <삼국유사>(솔출판사, 2007년)의 사례를 분석해 놓은 바 있다. 

"신라 제 48대 경문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왕후와 나인들은 모두 알지 모했으나 오직 관을 만드는 복두장이 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에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죽으려 할 때 도림사의 대숲 속의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나무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만 불먼 댓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왕은 이 소리를 싫어하여 이에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나무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면 다만 그 소리는 "우리 임금님 귀가 기다랗다"고만 했다"

이것은 <삼국유사> 제 2권 '기이편'에 실려 있는 짧은 이야기 한 토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이야기지만 이 작은 이야기 속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빽빽한 석류알처럼 박혀 있습니다. 대체 이 작은 이야기에 머가 그리 마니 박혔다는 것인가 이야기도 하나의 기호로 서술자가 '약호맺기encoding'를 통해 의미를 숨겨 놓았으니 '약호풀기decoding'를 통해 어떤 의미가 박혀 있는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서사는 하나의 욕망이고 꿈이고 의지의 세계입니다.

우선적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은 먼가를 알고 싶은 근질근질한 이야기라는 서사의 세계가 도대체가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만이 능히 제어할 수 있는 본능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왕으로 대표되는 권력자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어하고, 복두장이로 상징되는 피권력자는 권력자의 약점을 알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기호놀이는 하나의 권력 게임입니다. 즉 기호는 항상 그 누군가를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승 일연의 시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서술은 하나의 초점이자 퍼스펙티브이고, 하나의 전망을 보여주는 담화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서사가 팽팽한 긴장으로 넘치고 있는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즉 왕은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복두장이는 이 약점을 탈은폐시키려는 기도try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왕은 이 소리를 싫어하여 이에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나무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면 다만 그 소리는 "우리 임금님 귀가 기다랗다"고만 했다"

이 대목을 보건대, 일단 왕으로 대표되고 있는 권력자가 승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그게 아닙니다. 대체 왕은 왜 복두장이의 소리를, 정확히는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싫어했을까요. 그러먼서 "우리 임금님의 귀가 기다랗다"는 말은 왜 용납했을까요. 

가, '우리 임금님의 귀가 기다랗다'

나,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다'

여기, 왜 하나는 수용되고, 다른 하나는 거부되었을까. 바로 여기에 서사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먼 믿을까. 좀 객관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그러니까 제 48대 경문왕은 통일신라 하대의 임금으로, 그는 성대盛大를 지나 내분이 일고 균열이 일던 시기의 통치자였습니다. 곧 나라의 통어가 어렵던 시기의 지도자였습니다. 여기, 그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는 것은 임금이 마치 당나귀처럼 고집이 세어져서 신하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했다는 풍자입니다. 과연 그 이후로 처용(헌강왕)이 나타나 풍속이 문란해지고 견훤, 궁예 등 지방호족이 득세하고 저 스트롱 맨의 딸 같은 무능한 진성여왕이 나오고 얼마 안 가 통일신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은 복두장이, 대나무로 상징되는 백성들의 풍자요 비판인 것입니다. 마치 이솝 우화寓話처럼, 직접 말하기보다는 이렇게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비유를 써서 자신들의 견해를 '암시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풍자comedy이고 알레고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가'와 '나'는 무슨 차이가 있길래 임금은 '가'를 용납하고 '나'를 혐오했을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서사, 그러니까 이야기의 세계가 사실과 다른 차원의 세계형식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사실의 세계가 재현된 모방mimesis의 세계이고 평면의 세계라먼 서사의 세계는 사실의 재구이자 굴절된 서술diegesis 세계임을, 그리하여 사실을 가공하여 만들어진 서사의 세계는 대상세계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사의 세계는 은폐된 세계를 탈은폐시키는 서사 폭탄, 이야기 혁명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임금님의 귀가 기다랐다'는 묘사(소)가 산수유나무로 상징되는 노예들이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마는 종놈의 수사학을 보여준다먼, 그러니까 종놈의 수사학이 묘사라는 것은 대상에, 동일성에 사로잡혀 있는 조화의 언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서사(소)는 대나무로 상징되는 민중들의 '주체적인' 풍자정신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대체 '누구는 무엇이다'는 서사적 기술이 주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은' 또는 '누구는' 하는 세계가 벌써 대상에 대한 거리를 두고 있는 주인의, 주체의, 차이의 분류학에 기초하고 있는 심판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다' 라는 분류를 통해 임금의 귀가 당나귀처럼 매우 크다는 사실과 함께 또한 그런 당나귀처럼 매우 고집이 세다는 것이니, 이 을매나 훌륭한 비유이고 약자가 강자에게 날리는 통쾌한 풍자의 펀치인가 말입니다. 이솝 우화가 왜 비유로 가득차 있는지, 자고로 비유는 약자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생활의 무기였던 셈입니다.

What matters is narrative

중요한 것은 과연 서사입니다. 그러니까 묘사가 대상에 중심이 가 있다먼, 서사는 그 중심이 이야기 주체인 인간으로 시점 이동합니다. '대상'에서 '인간'으로, 그러니 서사(학)은 주인의 학문인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풍자기능으로서의 주체적 성격을 지닌 서사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대개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자를 비롯 아리스토텔레스, 다산 등 대체로 당대의 권력에 붙어먹던 최고의 정치엘리트들이 왜 한결같이 시('가')를 옹호하고 소설('나')의, 이야기의, 서사의 세계에 대해 '적의hostility'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인자 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조너선 컬러의 말대로, "이야기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해 가르치고, 세상이 어티케 움직이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제라르 즈네뜨, <서사담론>, 교보문고, 1992

7)요하임 리터, <헤겔과 프랑스혁명>, 한울, 1983

8)임석진 옮김, 헤겔 <정신현상학1,2>, 한길사, 2013

9)김현 문학전집2, ‘민족문학의 의미’, <사회와 윤리>, 문학과지성사, 2011

10)피히테, <독일국민에게 고함>, 동서문화사, 2019

11)김현, ‘자유와 꿈-김수영의 시세계’,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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