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표지작업
사진= 표지작업

<1화

사는 게 어쩜 이리 쉬울까.

완벽한 여주인공의 삶이란 평탄을 넘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엘리즈, 내일이면 우리가 정말 부부의 연을 맺는 거야. 왕자비가 되는 소감이 어때?”

“떨려서 잠들지 못할 것 같아요. 세이든.”

“나도 오늘 밤은 쉬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

남주는 내게 빠져 허우적대기 바빴고, 나는 그의 사랑을 즐겼다. 소설 속 환생처럼 고단한 변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만큼 완벽한 연인이 세상에 또 있을까.”

“있을 리가요.”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인데.

짧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세이든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전생에선 꿈꿀 수조차 없던 달콤한 입맞춤이다.

“오늘 밤에 선물을 가지고 올게. 시녀들은 물려놓고 있어.”

그가 등을 돌려 방을 나설 때까지, 내 가식적인 미소는 내려갈 줄 몰랐다.

이로써 원작도 끝이다.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연재 중지됐으니까.

환생한 지 23년, 비참한 전생을 끝마치고 눈을 떴을 때, 자그마한 손을 꼼질대던 그 순간부터 나는 알았다.

내가 이 왕국의 왕자비가 될 여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완벽한 여주인공의 삶을 살아냈다. 순수한 공녀를 연기하는 건 예상대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전한 감옥에 갇힌 삶. 그러나 안전하다는 것 자체로 난 만족했다.

비록 소설 속이니 삶이 늘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성녀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나 하지요. 가여운 공녀께서는 결국 자신의 가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겁니다.'

성녀의 탈을 쓴 악녀, 리에네트는 같잖게도 내 가족을 모욕했다. 내 사람을 건들다니 어리석은 짓이 따로 없었다.

그래봤자 이제 다 끝난 일이다. 그 악녀는 지금 이 왕궁의 탑에 갇혀있으니.

그런 줄만 알았다.

***

늦은 밤이 찾아왔다. 세이든을 기다리며 단장을 하고 있자, 시녀 하나가 다가왔다.

“공녀 저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고마워. 편지는 거기 올려두고, 너희는 이만 침실로 돌아가렴.”

내 명령에 시녀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두 개의 편지만을 남긴 채였다.

넓고 어두운 방에 홀로 있자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괜찮다. 곧 자정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난 스스로 다독이며 괜스레 편지에 관심을 옮겼다.

결혼식 전날에 올 편지야 뻔하다. 아버지와 동생들에게서 온 것이겠지.

역시나 하나는 아버지가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펠…?”

대제국의 황태자이자, 소꿉친구인 펠 아브로티스. 그에게서 편지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상하지 못한 편지에 당황한 건 잠시였다. 이내 나는 조심스레 편지를 뜯었다.

[네가 날 이곳에 보낸 이유를 알아.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서였겠지.]

황권 문제로 어릴 적부터 왕국에 머물던 펠은 얼마 전, 내 권유로 제국에 돌아갔다.

그에게 제국으로 떠나달라 한 건 원작을 벗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행동이었다.

원작에 의하면 펠은 날 경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이든의 손을 잡은 나를.

그 사실을 눈치챈 세이든은 펠을 암살한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다 하더라도, 연인이 친구를 죽이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아래 내용은 날 경멸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겠지. ’

편지를 더 읽어야 할까. 고민이 스치기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편지를 서랍 깊은 곳에 숨기고는 서둘러 자물쇠를 잠갔다. 아버지의 편지까지 숨겨버린 건 덤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 펠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걸 알면 세이든이 길길이 날뛰리라.

“잠시만 기다려줘요. 세이든!”

그렇게 다급한 발걸음으로 문을 연 순간.

난 고통에 잠식됐다.

“엘리즈. 기다리던 사람이 아닌가 봐? 유감스럽네.”

리에네트였다.

탑에 갇혀 울부짖어야 할 악녀가 내 눈앞에 있었다.

손에 든 단도로 내 심장을 찌른 채….

그 사실을 알기 무섭게 심장이 불에 댄 듯 아려왔다. 잔혹한 감각에 신음만이 흘렀다.

“으흑, 리에네트…….”

고통스럽다.

살려달라는 말도, 저주한다는 말도 전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정도로.

피를 뒤집어쓴 리에네트가 날 바닥에 내던졌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벌써 너무 힘들어하면 재미없지. 내가 주는 선물은 육체의 고통 따위가 아니거든.”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파헤쳐진 심장이 뜨거운 액체를 계속해서 뿜어낸다.

“미쳐가면서 살아. 아쉽게도 난 볼 수 없겠지만, 그걸로도 매우 만족스러우니까.”

뺨을 매만지는 감각과 함께 눈앞이 까마득히 어두워졌다.

***

“헉, 흐윽….”

정신을 차려보니 왕궁 정원 한복판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꿈인가 싶었지만, 내 소망을 꺾듯 비릿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전생에서 죽을 때도 풍겼던, 그런 피의 냄새다.

이게 현실이 아닐 리 없다.

더듬더듬 손을 옮겨 찔린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을 가로지르던 칼날은 누가 뽑았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감각이 생생히 기억났지만 우습게도 아프지 않다.

어디선가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있다. 죽음 직전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난 죽겠구나.

하긴,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살길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렇게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벽을 짚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 순간이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익숙한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누군가 풀숲을 가로질러 인기척을 드러냈다.

세이든, 나의 다정한 남주인공.

그가 날 구하러 온 것이다.

“돌아가자. 여기 있으면 안 돼.”

“이게 대체….”

“쉿. 금방 데려다줄게.”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리에네트가 반란이라도 일으켰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조용히 움직일 이유가 없다.

습격을 당한 건 이쪽이다. 죄를 지은 사람인 마냥 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상함을 감지한 건 멀지 않아서였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리에네트가 갇혀있던 탑이었다.

“여긴, 왜….”

그러나 난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

감은 눈 사이로 조금씩 밝은 빛이 들어왔다. 절로 눈을 찡그리기 무섭게 얼굴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살며시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세이든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마주 누운 그는 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다정한 세이든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살댔다.

“좋은 아침.”

안도감이 스침과 동시에 불안한 감정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본 것이 거짓이 아니듯, 이곳은 리에네트의 침실이었다.

유폐된 사람의 방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꼴이라니.

하긴, 성녀를 시궁창에 처박아놓을 수 없을 테니 이해는 한다.

“왜 여기로 왔어요?”

아무리 호화로운 침실이라 하더라도 내가 리에네트의 침대에 누워있을 이유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최악의 가설을 세우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애써 억누른 불안은 그의 한마디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난장판이 된 왕자비궁을 바로 쓸 수는 없잖아. 세간의 눈도 있고.”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리에네트, 내가 널 어떻게 죽은 공녀의 침실에서 재우겠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대체 무슨 말인가.

나를 보고 리에네트라 말하는 것도, 공녀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이해할 수 없다.

공녀가 죽었다니, 버젓이 내가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는데.

“그 여자, 시신은 내가 수습했어. 의심받을 일 없을 거야. 전부 다 계획대로 잘 끝났어.”

“장난치지 말아요. 세이든.”

“어울리지 않는 예의는 왜 지켜. 미리부터 왕자비의 품위를 연습 중인 거야?”

흐뭇하다는 듯 웃어 보이는 미소가 역겨웠다. 칼에 찔린 사람 앞에서 이런 농담이라니.

더는 들어줄 가치가 없다. 이깟 말도 안 되는 불안감 따위 거울 한번 보면 해결될 문제다.

거울 안에는 분명 금발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내 몸이 있을 테니.

그러나 내 마지막 희망을, 거울은 무심히도 지려 밟았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깊고 어두운 녹색 눈, 성녀답지 못한 매혹적인 외모.

리에네트 세리아티나.

거울 속에 비친 건 그 여자의 몸이었다.

“리에네트, 좋은 날이잖아. 지루하던 공녀는 죽었고, 빌어먹을 공작가는 곧 몰락할 테니까.”

“…….”

“이제야 세상 공기가 좀 맑아진 것 같네. 그렇지 않아?”

너무나 현실감 없는 상황 때문일까. 머릿속이 비이상적으로 차가워졌다.

“…그 여자 언제부터 죽일 생각이었어?”

“그건 왜 다시 물어봐?”

“다시 듣고 싶어서. 내 귀로.”

언제부터 날 배신한 건지 알아야겠다.

내가 언제부터 그들의 장난감이었는지, 전부 다.

거울 속 리에네트의 어깨 너머로 그가 다가왔다. 그는 다정한 얼굴로 이 낯선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처음부터, 리에네트.”

“…처음부터?”

“내가 필요한 건 너였어.”

넌 그 다정한 목소리로, 이 여자에게 늘 달콤한 말을 퍼부었겠구나.

“애초에 그 여자는 공작가를 무너트리고 왕권을 강화할 수단일 뿐이었으니까.”

행복에 겨워 웃음 짓는 날 보며, 언제 죽일까 입맛을 다셨구나.

“내게 여자는 너뿐이야.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네게 완벽한 왕자비의 자리를 줄 테니.”

그 부드러운 입술은, 사실 리에네트의 것이었구나.

비참했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이 내 심정을 대신하듯 찌르르 울렸다.

그는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검은 드레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리에네트, 옷만 갈아입고 출발하자. 장례식 많이 기대했잖아.”

장례식 많이 기대했잖아.

짧은 그의 말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자신들의 손으로 사람을 죽여놓고, 장례식을 기대했다니.

날 더러 내 장례식에 가서, 흰 꽃으로 장식된 내 시신 앞에 서라니….

“가서 기분 좋게 구경하고 오자.”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냉정하게 행동해야 한다.

집에 가족들이 있다. 믿어줄진 모르겠지만, 우선 만나서 이 이야기를 털어놔야 한다.

아버지라면, 분명 나를 알아봐 주시리라.

그렇게 겨우 정신을 다잡고 마차에 올랐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세이든이 입을 재잘댔지만, 나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결국, 그 또한 지쳐 입을 다물었다.

“도착했어. 리에네트.”

창문 너머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저택이 보였다. 약혼 직후부터 쭉 궁에서 머물렀기에 참 오랜만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응.”

짧은 답을 남기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내 뺨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면 기분이 풀릴까?”

눈을 피할 수조차 없게 뺨은 붙잡은 상황에 구역감이 몰려왔다.

세이든은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듯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였다.

“어젯밤에 이 집 인간들 처형시켰어. 네 소원대로.”

“…뭐?”

“네가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네. 진짜 아름다운 광경이었는데.”

머릿속에 어둠이 들이닥쳤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만 같았다.

“너무 아쉬워하진 마. 그 집 막내는 남겨뒀으니까.”

<2화>

“너무 아쉬워하진 마. 그 집 막내는 남겨뒀으니까.”

내 부모를 죽인 남자가 칭찬을 바라는 듯 눈을 빛냈다. 아직 죽일 사람이 남았다는 이유로.

“처형 날짜는 최대한 빨리 잡을게. 너도 재미 보라고 힘 좀 썼어.”

처형대에 오른 부모님이, 그걸 바라보며 절규했을 동생이 머릿속이 그려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을, 고작 열네 살짜리 작은 아이가.

불과 어젯밤, 이 저택에서 벌어졌을 참상이다.

심장이 답답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전에는 어떻게 숨을 쉬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 리에네트, 그만해!”

가슴을 쥐어뜯는 내 손을 떼어내듯 세이든이 감싸 쥐었다.

“리에네트!”

세상 가장 증오스러운 이름을, 세상 가장 치 떨리는 남자가 부르짖었다.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건지 말을 해봐! 숨, 숨이 안 쉬어져?”

날 붙잡은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리에네트가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가족을 위할 수 있게 됐다.

“공작 부부의 시신은.”

“곧 광장에 매달아 놓을 생각이야. 네가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

리에네트, 널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찢어 죽였을 텐데. 아니,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선물해줬어야 했는데.

“…이 저택으로 옮겨 줘.”

“뭐? 하지만 리에, 왕가의 체면도 있고, 게다가 너도 이렇게 하길 원했잖아.”

“광장에 전시할 필요는 없잖아. 엘리즈도 그걸 원하지 않았을 거야.”

“뭐? 그 여자가 무슨 상관이야.”

결국 난 너에게 이런 존재였구나.

나는 어째서 지금껏 그가 날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사람들도 그렇게 떠들 거야. 엘리즈가 원하지 않는 짓을, 네가 분풀이로 일삼고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잠시 침묵의 시간을 거친 뒤, 결심했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이로써 부모님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이게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엘리즈의 여동생도 살려줘. 제니아 시헨 말이야.”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시녀로 쓰게 해줘. 이 저택에서 지내면서 알아서 처리할게. 파탄 난 집안의 딸을 거둔 성녀. 보기 좋잖아?”

“시헨 저택 소유권도 넘겨달라고?”

쉽게 그러라 하진 않을 테다. 왕실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예정된 처형을 취소하긴 곤란하겠지.

“그래, 그렇게 하자. 생각해보니 네 명예도 되찾아야 하고.”

그러나 생각보다 세이든은 리에네트를 많이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내게 보여준 거짓된 사랑과 달리.

그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귀중한 것이라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리에네트, 먼저 내려. 십분 뒤에 따라갈게.”

그의 말을 끝으로,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나고 자란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약혼 이후 왕궁에서 머물렀기에 근 반년만이었다.

못 보던 꽃이 만개해있었고, 앙상했던 겨울과 달리 나무가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저택에서, 어제 내 가문은 몰락했다. 세이든과 리에네트의 손에 의해.

“이 층 복도 끝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장례식은 관례대로 내 침실에서 이뤄졌다. 발걸음이 무거워서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장례식에 참석하는 기분이라….

“이곳입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문이 개방된 침실은 온통 검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관에 누워 잠을 자는 듯한 내가 보였다.

우습게도 처음 마주한 내 얼굴은 아름다웠다. 자신이 아직도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듯이.

칼에 찔린 구멍은 꽃으로 가려졌고, 검은 꽃을 중심으로 생전 즐겨 찾던 보석들이 놓여있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시신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한 남작이 내게 다가왔다.

“성녀님, 오셨습니까.”

성녀, 리에네트, 여백작.

언제쯤 이 이름에 익숙해질까.

익숙해질 날이 오긴 할까.

리에네트를 알아본 한 남작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주위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성녀님의 예언을 믿지 못한 저희의 불찰입니다.”

“공작 부부의 인자한 미소가 거짓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들은 하나둘, 자신들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노라 핑계를 늘어놓았다.

그중에는 어머니께 은혜를 입은 이도, 아버지께서 손수 키운 인재도 있었다.

결국 난 더 지켜보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고민 끝에 향한 곳은 동생의 방이었다.

제니아의 방 앞은 기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비켜라. 리에네트 세리아티나다.”

리에네트의 이름을 대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너무도 쉽게 열렸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누가 이곳을 뒤집어놨는진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제니아 시헨.”

제니아는 겁에 질렸는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난 오늘부터 이곳에서 지낼 거란다. 이 저택은 곧 내 소유가 될 거야.”

아이답지 않게 텅 빈 눈동자, 초췌한 얼굴과 헤집어진 머리칼.

그 모든 게 하루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넌 죽지 않는단다.”

이 말은 구원일까. 저주일까. 가늠할 수 없다.

살게 만든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부모님의 곁에 가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내게는 제니아가 남았다. 그러나 제니아는 모든 걸 잃었다.

부모님도 자신의 언니까지도.

싫어할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 제니아를 끌어안았다.

리에네트를 반길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늦어서 미안해.”

역시나 아이는 날 밀쳐냈다. 가냘픈 몸에서 거센 힘이 나올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난 밀려났다.

전부 괜찮다.

아니, 괜찮지 않았지만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제니아 시헨!”

언제 들어왔는지 세이든이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와 거센 손을 치켜올렸다.

제니아의 앞을 가로막은 건 본능에 가까웠다. 다행히도 그는 급히 손을 멈추었다.

“왜 막아. 이게 지금 널 밀쳤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 괜한 데에 힘쓰지 마.”

세이든은 반쯤 뒤집힌 눈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주위를 의식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는 제니아의 등을 떠밀어 방을 옮기게 했다. 저놈과 한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다.

“오늘부터 이 집에서 지낼 거야. 따로 찾아오지 마. 보는 눈 많으니까.”

“뭐든 핑계 댈 건 많아.”

어깨를 떨군 그는 절망에 젖어 보였다. 고작 며칠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저런 얼굴이라니.

“괜한 잡음 만들어 봤자 좋은 거 없어. 알잖아.”

이제야 눈에 보인다.

사랑에 빠진 세이든의 얼굴이.

“내 걱정은 하지 마. 여유 생기면 곧장 만나러 갈게.”

23년을 완벽한 여주인공으로 살았다. 완벽한 악녀로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빼앗긴 모든 것들을 되찾아올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의 몸으로, 널 산산이 조각낼 거다.

네가 이 세상 누구보다 불행할 수 있게.

***

밤이 깊었다.

조문을 왔던 사람들은 전부 돌아갔고, 세이든 또한 등 떠밀리듯 왕궁으로 향했다.

저택 안에 남은 건 사용인들과 제니아, 그리고 나뿐이었다.

눈을 피해 제니아를 만나러 갔지만 문은 잠겨 열리지 않았다.

“내가 싫다는 건 알아. 따로 말 걸지 않을 테니 식사하렴.”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방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말라 죽기로 작정했는지 종일 물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

결국 난 몸을 일으켰다. 계속 문 앞에서 기다려봤자 날 더 싫어하기만 할 거다.

그렇게 착잡한 걸음을 옮길 때, 집사가 찾아왔다.

“머무실 방을 준비했습니다. 이동하며 저택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생을 우리 가문에 몸 바쳐 일한 집사다.

역시나 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루아침에 바뀐 주인을 받아들이기 쉬울 리가 없다.

그것도 바뀐 주인이 리에네트라면 더욱.

주인이 친족 살인을 저지르리라 예언한 성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리에네트의 예언만 없었더라도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테니.

“보고는 종이로도 충분해.”

나름의 배려였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게 미치도록 괴로운 것처럼, 그 또한 내 얼굴을 마주하는 게 유쾌하지 않을 테니.

모시던 주인을 죽이는 데에 일조한 몸이 아니던가. 당연한 일이다.

“내일 아침에 공작 부부의 시신이 도착할 거야. 작게나마 장례를 치를 테니 준비해둬.”

“…장례를 치러도 됩니까?”

“조용히.”

“…삼 층 왼쪽 복도 첫 번째 방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난 가던 길을 갔다. 집사의 억누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도착한 방은 생각보다 더 깔끔했다. 전에 지내던 방보다는 작았지만, 곧 방을 옮길 테니 이만하면 됐다.

난 곧장 테라스로 나섰다. 손에는 술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어두운 하늘이 눈에 담겼다. 주위의 불빛 때문인지 별은 몇 개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

지금쯤 이 모습을 보고 계실까. 그랬으면 좋겠다.

“제가 다 갚아드릴게요. 그리고 제니아도…. 행복하게 해줄게요. 지켜봐 주세요.”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잡아먹을 듯 흘러내렸다. 울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처음 갖은 가족이었다. 전생에선 감히 탐낼 수 없던 가족다운 가족.

그렇게 한참을 울기만 할 때였다.

멀리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이내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눈물로 가득 찬 시야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펠?”

펠 아브로티스, 그였다.

제국에 있었을 테니, 곧바로 소식을 들었다 하더라도 내일 밤에나 도착해야 하는데….

그는 말에서 뛰어내린 뒤, 보기 드문 다급한 걸음으로 저택에 뛰어 들어왔다.

정문이 활짝 열려있으니, 그를 막아 세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난 급히 술병을 내려놓고 내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먼 복도에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해하게 두지 않았을 텐데…. 널 혼자….”

눈물 섞인 목소리가 끊겨 들렸다. 예상치 못한 펠의 절규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문이 활짝 열린 침실에서, 난 숨을 죽인 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펠은 내가 본 어느 때보다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게 내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울음이 옅어졌다. 숨죽이고 있던 난 조심스레 몸을 돌리려 했다.

그가 날 바라보지만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여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지.”

펠이 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가는 한눈에 봐도 붉게 물들어있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나를 경멸하던 게 아니었던가. 소설대로라면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펠….”

차가운 날붙이가 목에 닿은 건 그때였다.

<3화>

“여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지.”

펠이 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가는 한눈에 봐도 붉게 물들어있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나를 경멸하던 게 아니었던가. 소설대로라면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펠….”

차가운 날붙이가 목에 닿은 건 그때였다. 살결을 파고드는 싸늘한 감각에 숨이 턱 막혀왔다.

심장을 관통당한 게 불과 어젯밤이다. 가슴이 내려앉을 듯 거세게 요동쳤다.

“무슨 낯으로 기어들어 왔냐고 물었다. 리에네트 세리아티나.”

아직 듣지 못했나 보다. 이 저택이 내 소유가 될 거란 소식을.

하긴,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달려온 듯하니 들었을 리가 없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리에네트의 몸으로는, 뭐라 말해도 화를 부추기는 꼴일 게 분명하다.

“여기서 널 죽일 수도 있지만.”

“…….”

“너에게 편안한 죽음은 사치다.”

그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검은 꽃 한 송이를 내 시신 위에 올려두었다.

“…내일 또 올게. 엘리즈.”

그의 목소리에 깊은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이런 와중에도 아침 해는 밝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하루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성녀님, 공작 부부의 시신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시녀의 말에도 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두려웠다. 두 분의 마지막을 마주하게 되면 모든 것이 실감 날 것만 같아서.

“우선 장례를 준비하고 있어. 그동안 나는…. 제니아에게 다녀오지.”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제니아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직 방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급하게 굴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저러다 동생마저 잘못될까 두려웠다,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니까. 제니아만큼은 지켜내야 했다.

“나와보렴. 제니아.”

“…….”

역시나 문 너머는 묵묵부답이다. 뭐라고 한마디만 대답해주면 좋으련만.

“전해줄 소식이 있단다. 중요한 이야기야.”

두 분의 시신이 돌아왔다는 걸 알면 제니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틀 전, 밤에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릴까. 아니면 광장에 전시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할까.

어느 쪽이든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다.

“…공작 부부의 시신이 돌아왔단다. 나와서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게 어떻겠니.”

그래, 생각해보면 나도 참 이기적이다.

나조차도 부모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이리 왔으면서, 제니아에게 비극을 직면하라 하다니.

“싫다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돼. 장례는 간단하게나마 내가 치르도록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더는 부모님을 외롭게 둘 수는 없었다.

이 몸을 하고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괴로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장례조차 없이 부모님을 보내드릴 수는 없다.

그리고 아마 부모님이라면 알아봐 주실 테니까. 내가 엘리즈 시헨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기름칠 되지 않은 문이 뻑뻑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않는다고는 안 했어요.”

제니아였다. 다 갈라진 아이의 목소리가 심장을 찢어질 듯 아프게 했다.

당장이라도 눈을 맞추고, 내가 네 언니라 고백하고 싶다. 네 곁에는 아직 내가 남아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그럼 가자.”

그러나 지금은 매정히 등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제니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속여야 하니까. 무엇보다 진실을 알게 되면 제니아 또한 위험해질 게 분명하다.

일부러 걸음걸이를 늦췄지만, 아이는 걸음을 재촉했다. 나와 함께 걷고 싶지 않은지 아주 빠르게 짧은 다리를 휘젓는 게 분명했다.

부모님의 침실에 도착한 건 한순간이었다.

“들어가고 싶을 때 말해.”

제니아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나조차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제니아의 앞에서 리에네트의 몸을 하고 울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기만이라고 생각하리라.

역시나 기다려주겠다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곧장 문을 열었다.

“아….”

방 안을 마주한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은 장미가 놓인 방에는 내 것과 같은 두 개의 관이 놓여있었다.

“오셨습니까.”

집사는 흠뻑 눈물 적신 얼굴을 닦아내고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떨리는 그의 목소리만으로 나는 그가 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을 알아차린 건 나뿐만이 아닌지 제니아의 시선이 잠시 집사의 붉어진 눈에 머물렀다.

“장례 준비는 끝났습니다.”

조문객 없는 장례식. 아래층에서 이뤄지는 호화로운 장례와는 사뭇 달랐다.

두 분이 죄인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집사가 나가며 문을 닫았다. 눈에 띄기라도 할까 두려운 모양이다.

왕국의 법에 따르면 처형된 죄인은 장례를 치를 수 없다. 혹여 장례식이 적발되기라도 하면 두 분의 시신을 빼앗기리라.

“엄마, 아버지….”

제니아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관과 가까워지는 모습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나는 안 믿어요. 전부….”

결국 아이는 부모님의 시신을 바라봤다. 나조차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이틀의 밤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는지 이제야 실감 났다.

“언니한테 전해줘요. 언니 안 보러 가서 미안하다고…. 언니를 볼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절대 언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고 전해줘요….”

꾹 참던 제니아가 눈물을 떨구었다.

한참 소리를 죽이고 울던 아이는 곧 손등으로 눈물을 감췄다.

우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지 않나 보다.

“내가 많이 사랑해요.”

두 분의 가슴 위에 검은 꽃을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른이 됐구나. 너무 일찍….

제니아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급한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차마 떨구지 못한 눈물이 아이의 눈에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제니아가 방문을 닫음과 동시에 난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제야 움직이지 못하던 발걸음을 떼어낼 수 있었다.

창백한 피부의 부모님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 시신은 곧장 부패하지 않게 처리됐지만, 부모님은 하루 뒤에야 손을 썼으니 당연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당연히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니아가 저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 나중에 전해주세요. 꼭 잊지 말고 전해주셔야 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이든이 곧 올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눈물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제 전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검은 장미를, 아버지의 상처 난 목덜미에 올려두었다.

또 다른 장미는 어머니의 손에 꼭 쥐여 드렸다.

“제가 많이 사랑해요.”

걷잡을 수 없이 얼굴이 젖어 들었다.

“이번 생을 행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세이든은 내 앞을 빠르게 가로질러 걸었다.

“제니아 시헨이야? 아니면, 이 집 사용인? 제발 말을 좀 해봐.”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도 나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리에, 말을 해보라고. 누가 네 목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어젯밤 목에 생긴 상처 때문이었다. 펠이 날 위협했던 증거.

여기서 펠이 왔었다고 이야기 해봤자, 세이든 좋을 일을 만들 뿐이다.

난 몇 번째 반복되는 물음에 지겨운 답을 건넸다.

“아무도 안 그랬다고 했잖아. 자다가 실수로 긁힌 거야.”

“그게 말이 돼? 실수로 그랬다는 게? 그 상처, 딱 봐도 손톱에 긁힌 게 아니잖아.”

“그렇게 분이 안 풀리면, 그냥 내 손목이라도 잘라가서 벌을 주던가.”

“리에!”

더러운 애칭을 어찌나 다정히 부르는지, 절로 구역감이 치밀어 오른다.

“애칭 부르지 마.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제발 조심 좀 해.”

그는 짜증 짙은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차마 더 리에네트의 애칭을 부르짖진 않았다.

“됐으니까 돌아가. 세이든. 내일 내가 왕성으로 찾아갈게.”

당연히 그를 보러 가는 게 아니다.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지.

리에네트의 물건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의 약점이 될만한 건 전부 찾아야 하니.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죽던 그 방에도 찾아가 봐야 하고.

“누가 보면 의심해. 어서 가.”

“솔직히 말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의심? 그런 거 이제 다 상관없어.”

원수의 고집을 받아주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작은 일에 징징대는 꼴이란, 차마 맨정신으로 지켜보기 어려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을 때였다.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제국의 황태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녀가 문밖에서 펠의 방문을 알렸다. 왜 하필 이때일까. 세이든과 함께 있을 때는 오지 않길 바랐는데….

예상했듯 그의 얼굴이 기괴할 정도로 찌푸려졌다.

“누가 와? 황태자라면 지금쯤이나 서제국에서 출발을….”

그는 얼추 계산해보고선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뛰쳐나갔다.

어젯밤에 도착했음을 모르니 가능한 계산이다. 아무리 봐도 펠이 그 시간에 도착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세이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는 게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이든은 펠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원작의 내용처럼 날 경멸했기 때문은 아니리라.

그저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일 뿐이겠지.

펠과 늘 비교를 당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그를 암살하는 게 정당화된다는 건 아니다.

“멈춰, 세이든. 그만하지 못해?”

펠을 세이든과 함께 둘 수 없다.

아무래도 펠은 이 이야기의 내막을 알아차린 듯했다.

이 상황이 모두 세이든과 리에네트로 인한 것임을 말이다.

어제 내게 했던 것처럼 참지 못하고 세이든에게 위해라도 가했다가는….

아마 펠의 입장이 난처해질 거다.

그러나 내가 멈춰 세우기도 전에 세이든은 침실에 발을 디뎌버렸다.

급히 뒤따라 들어가자, 침실 바닥에는 한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세이든이다.

“왕국의 왕자가 황태자를 위협하다니, 제국에 반하는 것이라 봐도 되겠나.”

예상했던 대로 펠의 짓이었다.

그는 세이든을 내려다보며,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펠은 분노를 눌러 담은 기색이었다. 분노와 경멸로 점철되어 있던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펠은 그 혼란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잠시 갈등하던 나 또한 그를 따라 밖으로 움직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춰 세웠다.

“무슨 용건이지.”

지금 이 판단이 옳은 것일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이보다 승률 높은 판단은 없으리란 사실이다.

“네 편지, 잘 읽었어. 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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