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빛
-김연덕


머리 위로 어두운 구름이 흐른다. 세로로 높이 쌓아올린 책장에서 무너진 책들처럼, 무의식적으로 접혀 삶과 죽음이 사선으로 나누어진 어느 작가 연보의 페이지처럼, 선의 기울기에 의해 가볍게 흐트러지는 작가의 결혼생활과 전원생활처럼, 책이 흘린 그림자가 거실 바닥에 한 겹씩 달라붙어 개개의 공백으로 환히 썩어가는 
알 수 없는 흰 
숨의 전염처럼, 입 안에서 어두운 구름이 흐른다. 산발적으로 밟는 페달 
외래 나무열매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붉어진 페이지들끼리는 스스로 머뭇대다 넘겨진다. 연보의 첫줄 작가의 느긋하고 척박한 고향에 그림자가 드리우면 모자걸이에 어색한 면적으로 걸려있는 새 마스크를 꺼낸다. 마스크의 표면은 구멍 뚫린 겨울 언덕처럼 아득하게 차갑고 몇 세기 전 작가의 얼굴에 비스듬히 걸치거나 겹쳐볼 수 있을 만큼 그의 
희고 펑퍼짐한 코를 곧바로 잊어버릴 수도 있을만큼 그러다 결혼과 생활의 매캐한 연기, 모서리가 특별히 부드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수 있을 만큼 창백하고 고전적인 기운으로 반짝인다. 이 물건은 몇 세기 후 작가 묘비의 단단한 사선 현실의 
구름을 건너 어렵게 도착한 것이고 거실에 흩어져 쏟아진 책들 중그 어느 것에도 이 슬픈 물건에 관한 감상이나 정보가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얼굴에 휘감기는 까슬한 굴곡과 곡선은 사랑과 병으로 마모되다 사라진 전원에 이미 가보았던 것 같다. 

순식간에 전염되었다는 말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푹신하고 어두운 구름 속을 걷는 것 같고 모르는 작가의 뒷모습을 따라 세로로 긴 언덕을 쫓는 것 과거를 조금도 찢지 못한 채 내팽개쳐지는 것 같다. 그곳 가지에 걸려 헤매는 마스크를 쓴다. 사적인 천의 표면 그림자의 기움이 잔 속 얼음들에 갇혀 책 표지로 휩쓸려 빠져나간다. 느닷없이 올라오는 화와 졸음처럼 여러 방향으로 솟은 나무가 보인다. 

 

<시작노트>
코로나 19 의 존재는 나의 일상과 너무도 가깝고 생생하며 무거워 지치고 지겨울 때가 많지만, 가끔은 나에게 아주 비현실적이고 머나먼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이 병으로부터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병의 시작과 진행과 계속됨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시를 써볼까 했지만, 내가 느끼는 답답함과 애매함과 비현실적임에 가까이 가보는 편이 맞다고 느꼈다. 고전적인 상황과 언어들을 최대한 활용해 마스크에 대해 적어본 것이 이 작업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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