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채의 사랑
액채의 사랑

“얼음은, 빛이 투과하면 반짝이며 투명해지는 부분이 생기고, 그 빛이 지속되면 녹고, 추운 데 놓아 두면 다시 언다. 이런 얼음의 속성이 마음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21년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를 펴낸 김연덕 시인의 첫 에세이집 “액체 상태의 사랑”이 지난 4월 25일 민음사 ‘매일과 영원’ 다섯 번째 시리즈로 출간됐다.

김 시인은 이번 첫 에세이집에서 인간의 감정을 차가우면 얼었다가 뜨거워지면 녹아 증발하는,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액체에 비유하며 이렇게 서로 다른 온도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마음들을, 일기를 쓰듯 그 속을 들여다보며 독자에게 고백한다.

사랑으로부터 상처가 남고, 우정으로부터 기쁨이 오며, 그 자리가 매번 뒤바뀌기도 하는 삶. 슬픔이 환희가 되고 가장 가깝던 이가 가장 멀어지기도 하는, 그 모든 상태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김 시인은 스쳐 간 사람과 머무는 장소, 그날의 장면과 읽었던 책을 한데 기록한다. 사랑이 남긴 수치와 슬픔조차도 잊어버리기보다 기억하기를 택한 시인의 태도는 불꽃에 안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눈사람 같다. 시와 삶 사이로. 그리고 그런 시인의 문장은 상냥하고 애틋한 마중물이 되어, 사랑이 흐르고 상처가 자라고 우정이 뿌리내리는 스산하고 아름다운 정원처럼 가꿔진 시인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엄마와 옛집에 다녀왔다. 종로구 부암동 산자락, 지금은 가정집 대신 박물관이 되어 버 린, 내 유년기의 창백한 기쁨이자 글쓰기의 전부인 곳. 언니의 방이 있던 자리가 이제 매 표소가 되어 버린, 노크만 하면 드나들었던 방문 대신 차례로 줄을 서 표를 끊고 들어가 야 하는 곳. 나는 그 거칠고 높고 기이한 곳에서 태어나 11년을 살았다.”

김 시인은 기억들이 묻어 있는 장소들을 돌아보며 그곳에서 떠오르는 다양한 감정들과 마주한다. 남자 친구와 다툼 후에 그를 만나러 가던 길, <대산대학문학상> 등단의 부상으로 가게 된 런던, 우연히 단골이 된 카페와 와인 바, 각각의 공간에는 저마다의 감정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시인의 마음이 입혀진 공간은 결코 하나의 감정으로만 단순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그가 한 장소를 두 번 방문하기 때문이다. 처음 발걸음이 닿았을 때와 문장으로 다시 한 번 닿을 때. 첫눈에 흐리고 앙상했던 곳도, 혹은 처음 본 순간부터 명쾌하고 온화했던 곳도 데생의 빈 부분을 채우듯 다시 손을 뻗어 그려 본다.

김연덕 시인 [사진 = 본인 제공]
김연덕 시인 [사진 = 본인 제공]

 

질문 01
이번 에세이집에서 작가님은 마음을 온도에 따라서 형태가 변하는 얼음과 같다고 표현하셨는데요, 그래서인지 기쁨, 사랑과 같은 감정에도 ‘차가운’이라는 다소 낯선 표현이 쓰였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이런 감정과 마음의 변화에 어떻게 주목하게 되셨는지, 또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작가님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감정을 그릴 때 고정적인 단어나 비슷한 이미지, 비슷한 온도의 스펙트럼으로만 인식하는 것을 피하려는 편이에요. 저에게는 그런 방식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기만 한 감정은 없고, 따뜻하거나 차갑기만 한 감정도 없는 것 같아요. 기쁨의 끄트머리에서도 슬픔이 발견되고, 슬픔의 중심에서도 이상한 기쁨이 솟는 찰나의 순간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 순간들만이 제게는 영원하게 느껴지거든요. 
  감정 자체가 가진 속성이 그러하지만, 글을 쓸 때 역시 감정의 온도나 질감, 투명도에 있어서의 변화가 많겠지요. 뜨거운 감정에 대해 써내려갈 때 비로소 나와 그 감정 사이에 객관적인 거리가 생기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나 차가운 기억과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쓰면서 내가 크게 동요되고 뜨거워지기도 하고요. 이런 것들이 글쓰기의 신비이자 두려움, 자유인 것 같아요.


질문 02
책에서는 사랑이라는 마음에 대한 서술이 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사랑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죽어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느끼셨다고 하셨는데요,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그 문장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를 인용한 대목이었는데요. 저는 죽음이 아주 고요하고 강렬한 결말로 매듭지어진 상태이면서 ‘삶’에는 가닿을 수 없는, 그러니까 단절과 멈춤의 상태라고 해석했어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다보면 세계나 주변이나 어쩌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일정 부분 단절되는 것 같은데요, ‘단절’ 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 이 단어는 결국 사랑하는 상대와의 연결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환하고 팽팽한 의미의 단절이에요. 이 이상하고 진정한 단절이 이전과는 다른 세계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해주기도 하고요. 
  또, 제게 멈춰있다는 건 끝이 아닌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여겨져요. 죽어 있는 상태는 죽음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인 것이고, 무력해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성실하게 어떤 에너지가 이 상태에 복무하고 헌신하고 있는 것이죠. 저에게 사랑은 이런 것이에요. 조용하면서 무시무시한 확신에 차 있는, 괴이쩍으면서 부드러운 상태요.


질문03
자전적인 이야기와 그 내면의 감정들을 글로 옮기면서 많은 감정들이 작가님의 마음 속에서 교차했을 것 같은데요, 책이 완성되어 독자들에게 읽히게 된 것에 대한 소감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등학생때부터 블로그에 꽤 오랫동안 공개 일기를 써왔지만, 인터넷 너머로 제 일기를 읽어주는 사람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형상으로 상상해본 적은 없었어요. 그들이 사람이라기보단 그저 조용하고 상냥한 정령들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아주 솔직한 일기 쓰기가 가능했었고요. 수치스럽고 복잡하고 어두운 상황에 대해 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막상 저의 일기들(혹은 일기로부터 시작된 글들)이 모여 실물의 책이 된다고 하니 처음에는 몸이 뻣뻣해지고 긴장이 되더라고요. 서점과 도서관, 실물의 책상과 매대와 책 표지를 쥔 손가락들을 상상하니 이것을 ‘현실의 사람들이 읽는다’는 사실이 뒤늦게 자각되었다고 할까요.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세해지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략해야 할지 고민되기도 했고요. 일기 검사받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네요. 산문집을 다듬으면서는 이런 기분들과 싸우기 위해 노력했어요. 사람들의 반응을 과도하게 의식하면 중요한 많은 것들을 다 놓치게 될 것 같았어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요. 
  날것의 제 모습을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아직도 제 일기가 출간되어 읽히고 있다는 사실에는 익숙해지지 않아요. 다만 삶과 사랑의 진짜 면모를 사랑하는 독자분들이라면 이런 제 개인적인 씨름들을 읽어내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질문04
끝으로 뉴스페이퍼 독자들에게 전달하거나 못하신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행위가 저에게조차 무척 무용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때때로 내 안에 이해할 수 없는 숨구멍을 내어주는 일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슬프고 답답해서 혹은 너무나 벅차고 좋아서, 마음이나 감정의 무수한 경계가 지워지는 삶의 순간들이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내가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는 당황스러운 순간에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겹쳐보는 일이, 같거나 다른 삶을 체험해보는 도전이 저는 좋았어요. 제 책이 독자분들께도 이런 기묘하고 다정한 무게의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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